불교의 이해

반야심경 3장 -현상세계의 연기와 순환

마음정원(寂光) 2011. 11. 27. 10:32

반야심경 3장 - 현상세계의 연기와 순환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불이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여, 이 몸을 위시한 모든 현상계는
텅 빈 공과 다르지 않다.
텅 빈 공 또한 이 몸, 이 현상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 몸, 이 현상계는 그대로 텅 빈 공이고,
텅 빈 공 그대로 이 몸, 이 현상계인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의 작용들,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생각을 발전시켜 가는 일과 모든 인식의 근본까지도 또한 텅 빈 공이요,
텅 빈 공 그대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의 작용들 그대로다.


해설
첫 구절의 <사리자>는 관자재보살과 함께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주체자라면
<사리자>는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법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곧 <사리자>로 하여금 관자재보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의 차원이란 바로 완전한 지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에서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사리자>는 그냥 막연하게 부처님의 제자이니까 부른 것은 아닙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지혜가 제일 높은 제자입니다.
<사리자>는 직관지가 가장 뛰어난 제자인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 설하는 반야 지혜는 단순한 세속적 지혜가 아닙니다.
반야(prajna)란 '머물지 않고 진행하는(pra) 지혜(jna)'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어떠한 경계에 부딪친다 해도 그것을 공(空)이라고 부정할 수 있는
지혜를 뜻합니다.
인생과 우주의 참 모습을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으로 보는
공의 도리를 완전히 이해한 최상의 지혜입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혜 제일의
<사리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전의 중심 내용과 등장 인물이 일치되도록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색즉시공 공즉시색>
앞의 <조견오온개공>의 내용과 연관지어 한 번 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첫 구절인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상인 색과 존재의 본질인 공과의 관계를 사상적으로 표현한 대목입니다.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유한한 현상인 색과 무한의 본질인
공은 별개가 아닌 것입니다.

<색>은 오온(색·수·상·행·식) 가운데서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이는 곧 육신에 대한 바른 견해가 우선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텅 빈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색>이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수·화·풍의 네 가지를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이든 바깥 현상계이든 모두가 인연에 의하여
거짓 화합하여 잠깐 있는 듯이 보이는 까닭에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본질상으로 볼 때 텅 비어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상인 색과 본질인 공에 대한 그 체험적 결과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즉 현상인 색과 본질인 공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절대적인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입니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얼음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은
인생과 우주를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색과 공의 관계는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이 공이라면 파도는 색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공의 본질을 명확히 밝힌 이 대목은 현실에 있으면서 현실에 집착되지 않으면서
현실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단순한 현실 부정이나 현실 집착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되 자유자재한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의 진정한 의미는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중도의 입장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중도의 입장이란 양쪽을 다 포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색과 공을 전혀 상반된 개념으로 받아들이듯이 선과 악, 삶과 죽음,
정신과 물질, 이 모든 것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어서 <수상행식 역부여시>는 글자 그대로 색뿐만 아니라 수상행식
또한 공하다는 것입니다. '감각과 생각과 인식도 그와 같이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상행식>은 오온 가운데 정신적인 네 가지 요소, 즉 정신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이 다음과 같이
전개할 수 있습니다.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
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
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역부여시>란 앞의 색과 공의 관계처럼 수·상·행·식도 똑같은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축약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색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색으로 인해 일어난 수상행식 역시 집착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실체가 없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시해서 정신작용 또한 텅 빈 것이며,
텅 빈 것 또한 마음의 작용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감정들은 <수상행식>의 영역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잡다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결국 공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지혜의 눈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의 눈만 뜬다면 사물 하나하나, 사건 하나 하나가 그대로 진리화
될 수 있습니다. 또 지혜는 그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 바로 지혜에 있습니다.
지혜는 곧 모든 것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일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돈이나 명예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의 실체를 파악하여 반야의 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坵不淨 不增不減)


사리불이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해설
이 대목은 공에 대한 참모습을 밝히는 부분입니다.
지혜제일 <사리자>를 불러 주위를 환기시키며
공상(空相)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이란
'모든 만상의 본질은 공상이다'라는 뜻입니다.

<시(是)>는 '이다'라는 뜻이고
<제법>이란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 즉 삼라만상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법>속에는 광물, 식물, 생물, 무생물을 비롯하여 인간까지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서 형상을 가졌거나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 <제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법>이란 진리라는 뜻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사물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공상>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본질의 속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입니다.
<제법>은 공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텅 빈 것입니다.
공의 본질 속에는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表相)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습니다.
물의 본성이 없다는 뜻은 물이라는 물질이 없다느 것이 아니라
본성이 없기에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본성이라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의 세 가지 속성 가운데 첫째는 생겨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불생불멸>의 의미를 새겨보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현상은 생겨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면에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은 <역생역멸(亦生亦滅)>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불생불멸>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승경전의 대표되는 가르침이라 불리우는
『화엄경』,『법화경』,『반야심경』에서
공통적으로 존재의 실상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일체법불생(一切法不生) 일체법불멸(一切法不滅)」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말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그 자체로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현상계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이 세간에 늘 그대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상 불생불멸>도 같은 맥락에서
존재의 본질을 명확히 밝힌 대목입니다.

존재의 본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 과학의 이론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물질에 대한 세 가지 해결하지 못하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질량은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물체라도 그 근원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완전히 새로운 물체는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 <공상>과 잘 들어맞는 이론입니다.
<제법>의 공한 모양이 <불생불멸>인 것을 과학이 증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이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달라집니다.
종이를 태우면 에너지로 변하든지 재로 바뀌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 공간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 낼 수 없으니 <불생>입니다.

이처럼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얽히고 설켜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며, 또 새롭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기계를 동원한다고 해도 종이는 못 없앱니다.
태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를 태운 재는 없애지 못하며, 또한 허공중에 날아간 에너지는
더 이상 없애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멸>입니다.
또 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리 산소재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있던 물질을
화학적 반응으로 배합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불생>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터득하는 일이야말로
괴로움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구부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구정>은 ‘더럽다, 깨끗하다’의 뜻이지만
그 속에는 ‘좋다, 나쁘다’고 하는 선악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구부정>의 본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구부정>은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도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쇠붙이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시계가 되면 좋은 것이 되지만, 무기가 되면 아주 나쁜 것이 됩니다.
자신의 인식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분으로 보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다른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구부정>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
마음의 본질이 텅 빈 것이므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가 되는 이유가
바로 존재의 실상이 공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증불감>은 ‘더한 것도 아니고 또한 덜한 것도 아니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증불감>도 본질에 있어서 더한 것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바로 물질을 위시해서 우주와 마음의 존재 법칙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법의 공한 모양이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한 순간 생각을 일으키지만,
가만히 생각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면 도저히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뿌리는 텅 비어서 없는 것입니다.
수행이 부족해서 못 찾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없기 때문에 못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리는 텅 빈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데서 숱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룻동안 분별하고 인식하며 일어나는 생각의 양을
형상으로 만든다면 아마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아무런 형체도, 뿌리도 없으므로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마음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해서 얼마든지 생각을 일으키지만
그 근본은 텅 비어서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법이 모두 그와 같이 공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공의 실상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할 때 생이 있고,
멸이 있는 것이지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결국 현상계의 본질이 공하다는 불변의 법칙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지광스님의 '저 짙푸른 창공과 나는 하나라네', 대한불교조계종포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