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반야심경 5장 - 일체가 空함을 아는 지혜

마음정원(寂光) 2011. 11. 27. 10:35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눈과 눈의 대상인 물질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작용,
이것을 합해서 눈의 영역이라고 한다.
이 눈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지는 모든 세계는
지혜의 눈으로 조명해 보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귀의 세계, 코의 세계, 혀의 세계, 몸의 세계,
뜻의 세계까지도 역시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해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눈의 세계도 없고 내지는 의식의 세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 인식이 되는 것이 육식입니다.
이 육식은 그 대상에 따라 시각작용의 안식[眼識界],
청각작용의 이식[耳識界], 후각작용의 비식[鼻識界], 미각작용의 설식[舌識界],
촉각작용의 신식[身識界], 의식작용의 의식[意識界]의 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육식(육식)이라고 부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줄여서 안계 내지 의식계로 표현했습니다.
육근과 육경의 만남으로 해서 일어나는 육식을 합해서 십팔계(十八界)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십팔계(十八界)의 부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팔계란 우리가 경험하여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일체존재를 말하며 객관대상이 감각기관과 인식작용을 통하여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근이 없으면 육경도 없으며 또한 육경이 없으면 육식도 없습니다.
육식은 하나의 의식현상(意識現象)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형태는 일반적인 수준의 존재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보다 높은 무색계(無色界)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감각의식들이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한 것은 십팔계를 줄여서 한 말입니다.
<내지>라는 말 속에는 안계와 의식계를 뺀
나머지 열여섯 가지가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색·수·상·행·식의 오온과 육근, 육경을 합한 십이처와
육근, 육경, 육식을 합한 십팔계를 삼과(三科)라고 말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현재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이 삼과설(三科說)의 복잡한 심리적인 과정을 거칩니다.

공의 세계에서는 이 십팔계가 본래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본질이 공이기 때문에 십팔계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해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에
십팔계는 항상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식에서 좀더 깊이 들어가면 칠식(七識)과 팔식(八識)까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칠식은 육식과 팔식의 중간 단계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팔식입니다.
팔식은 다른 말로 ‘갈무리한다’고 해서 장식(藏識),
혹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멸식(無滅識), 무몰식(無沒識)이라고 말합니다.

팔식은 육근과 육경과 육식에 의해 훈습(薰習)되어온
온갖 것들이 갈무리 되어 저장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팔식은 속 마음, 잠재의식, 무의식, 심층의식 등으로 불리웁니다.
불교에서는 이 팔식을 윤회의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육식은 보고 듣는 것이 표면에 드러나는 것이므로
겉 마음, 표층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 보고, 냄새 맡고, 의식하는 일체의 것은
하나의 종자가 되어 모두 팔식에 심어집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팔식까지 충격이 전해지면
거기서 싹이 터서 표면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이나 작업, 훈련, 연습 등의 일을 되풀이 하는 동안
그 모든 것은 팔식에 쌓이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우리가 복덕을 짓는 것도 팔식에 모두 갈무리 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하나의 종자가 되어 팔식에 심어집니다.
나쁜 습관도 팔식에 갈무리 되기 때문에
자꾸 그 일이 반복되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좋은 종자를 심어 놓으면 좋은 싹이 나듯이
좋은 습관을 길들이면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 한편을 볼 때는 아무런 잡념 없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대로 팔식에 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공부할 때는 온갖 잡념을 다 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뒤엉킨 상태로 갈무리 되면 좋은 종자가 심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행한 일이 기억이 잘 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훈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좋은 것은 익숙해질 때까지 훈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는 것도 자꾸 듣고 보고 공부하다 보면
훈습이 되어 팔식에 좋은 종자로 갈무리 되는 것입니다.

악한 지식과 악한 알음알이라는 뜻으로 악지악각(惡知惡覺)이란 말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잡다한 지식에만 치우쳐 있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불필요한 지식으로 팔식을 가득 채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종자를 갈무리할 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팔식을 다른 말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팔식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뇌가 아닙니다.
대뇌는 인식을 발동시키는 조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식에 좋은 것을 갈무리해야만 대뇌를 통하여
좋은 것이 싹터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팔식에 갈무리된 것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뢰야식, 즉 팔식에 갈무리되어 있는 것을
현행해 내지 못하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뇌손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팔식에 심어진 종자가 거의 백지에 가깝기 때문에
뭐든지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종자가 심어지면 먹물을 찍듯 선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기억이 잘 안 되는 것은 팔식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마치 글씨가 가득 차 있는 신문지에는 그 위에다 무엇을 써 놓아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훈습을 통해서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보다 분명히 심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팔식에 심어진 종자는 기억으로 되살아나지 않더라도
업이 되어 팔식 속에 모두 갈무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짓거나 참선을 하거나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 놓으면
언젠가는 마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팔식과 육식의 경계선은 명확하게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식, 즉 표층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팔식, 즉 심층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심층의식 속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무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기도나 참선, 수행을 통해 개발이 가능합니다.
보통 사람은 육식의 작용에 그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수행력이 높은 사람은 잠재의식에 내재된 힘을 끌어내어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것은
전부 팔식에 갈무리 되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엄청난 업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팔식은 우리가 육식을 버릴 때도 없어지지 않고 다음 생까지 연결됩니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본능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전생의 업이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전생부터 익혀온 것이 팔식에 갈무리되었다가 현행한 것입니다.
다음 생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부터 열심히 훈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신·구·의 삼업을 통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일 때
그것이 저축이 되어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항상 젊게 살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팔식에 갈무리된 것은 인연을 만나면 언젠가는 움이 돋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순간이 출발점입니다.
가을에 추수를 하려면 봄에 씨를 뿌려야 하듯이
금생에 닦지 않으면 결코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팔식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반야심경』에서는
육근과 육경과 육식, 즉 십이처와 십팔계를 모두 <무>라고 하여 부정했습니다.
그것은 공이기 때문에 <무>이며, 그래서 <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는 현재 존재하는 본질을 공으로 바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도리를 밝힌 것은
결국 그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이기 때문에 연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이 한 장의 존재 법칙이 공이기 때문에
종이를 접어서 학도 만들 수 있고, 종이로 불쏘시개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이가 종이로만 고정되어 있다면 다른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종이 한 장으로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며,
종이 한 장 때문에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의 가능성이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 입장에서 말하는 <무>가 단순히 없는 것이라면 공부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공덕을 닦으면 그 공덕이 팔식 속에 스며들어 현행하는 것입니다.
또 지혜를 닦으면 지혜의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무>의 의미를 잘못 인식하게 되면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흔히 인생무상이나 허무를 생각하고 비관에 빠지는 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무>는 그와 동떨어진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무>라는 부정 속에는 강한 긍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의 철학 속에는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활기차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지혜를 닦아도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공(頑空)이라고 해서 죽은 공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항상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기의 법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똑같은 이치로 모두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이치이며, 연기의 법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가 자꾸 쌓이고,
공덕을 지으며 지을수록 복덕을 누리는 이유가
바로 공과 연기의 법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은 연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가도 있게 되며,
있다가도 없어지게 되는 이유도 존재의 실상이 공이며
그래서 연기의 법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현상은 연기의 측면에서
생성, 변화, 발전,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거듭 되풀이 하지만 존재의 본질은 공입니다.
존재의 양상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이 공이라면 현상은 연기인 것입니다.
모든 현상의 이해는 연기가 그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연기의 법칙으로 다 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이해할 때
비로소 완전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무>라는 표현을 잘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공의 이치에서 보면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더욱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잘못하면 더욱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공에 대한 철저한 관조로써 지혜를 얻어 성공적인 삶,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반야심경』의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본질이 공이라는 사실은 바로 지혜로써 문제를 풀어나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