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반야심경 6장 - 본래 밝은 마음자리

마음정원(寂光) 2011. 11. 27. 10:38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해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부분에서는 십이인연법을 설명한 구절입니다.
지금까지 일체는 공인 까닭에 오온도 십이처도 십팔계도 본래 없다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다시 십이연기도 무(無)라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십이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연의 법칙을 상세히 분석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내지>라는 말로써 그 하나 하나의 항목을 모두 생략해 놓았습니다.
연기(緣起)란 의지하여[緣] 일어난다[起]는 뜻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인연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가장 중심이 됩니다.
우주 또한 자기 자신을 통해 있는 것이며,
이 우주의 주인은 곧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연으로부터 모든 인연이 성립되는 것이어서
십이인연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생성, 변화, 발전, 소멸의 연결고리를
열두 가지 과정으로 나타낸 것이 십이인연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십이인연은 자기 자신의 전체 삶을 그려놓은 하나의 그림에 해당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십이인연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육년 고행을 마치고 다시 명상에 들어갔을 때
그 명상 내용이 바로 십이인연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출가의 동기였다면
십이인연은 생사해탈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십이인연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태어나서 일어나는 과정과 살다가 죽고,
죽은 후의 상태를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은 열두 단계로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이인연은 구체적으로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열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다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 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무명과 행의 두 가지는 과거이인(過去二因)이 됩니다.
그 원인에 의해 식과 명색과 육입과 촉과 수의 다섯 가지가 생겨납니다.
이 다섯 가지를 현재오과(現在五果)라고 합니다.
즉, 전생의 두 가지 원인에 의해 현생의 다섯 가지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애·취·유의 세 가지는 현재삼인(現在三因)이 됩니다.
현생의 이 세 가지가 씨앗이 되어 미래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과 노사입니다.

십이인연은 마치 둥근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연속적으로 반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은 인간의 생사(生死) 비밀과 나아가서
우주의 근원적인 순환 법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십이인연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명(無明)-
무명이란 밝은 지혜[明]가 없어 미망에 덮여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무명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연기를 알지 못하고, 모든 사상을 알지 못하고
참다운 지혜가 없어 어둡고 어리석어 밝지 못한 것, 이것을 무명이라 한다.'
무명은 한마디로 반야지혜 즉 인생과 우주의 참 모습인
공의 도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기초적인 중생의 생존형태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에 흔히 근본무명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번뇌망상의 근원이 이 무명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서
무지무명(無知無明)이라고도 합니다.
무명은 정신작용의 가장 초기 단계입니다.
곧 아뢰야식에 남아 있는 충동적이고 맹목적인 욕구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기 이전의 상태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무명의 세계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일어납니다.

-행(行)-
행이란 산스크리트어 삼스카라(samskara)로서 만들어진 것 또는 지어서
만드는 힘을 말합니다.
어두운 정신세계에서 무엇인가 요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행은 잠재적인 무의식력이며 충동력입니다.
행은 습성, 즉 업을 쌓게 됩니다.
행에는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뜻의 업, 마음으로 짓는 업을 가장 중요시하셨습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의 두가지 원인으로 식·명색·육입·촉·수라는
현재의 다석 가지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행으로 말미암아 식(識)이 일어납니다.

-식(識)-
식은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이곳에서의 식은 제8식 아뢰야식을 가리킵니다.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겠다는 사고를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과거의 행에 이해 인간 존재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 의식작용을 말합니다.
식의 상태는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간 때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탁태라고 하며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名色)이 있습니다.

-명색(名色)-
명색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가서 받는 <오온>, 즉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막연하게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이 나누어집니다.
어머니 태 속에 탁태된 후 받는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새로운 생명체가 이루어진 상태가
명색이라고 합니다.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입(六入)이 생깁니다.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는데,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 형성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여러 가지 기관들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외부의 자극이 들어온다고 해서 육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제5주 정도가 되면
여러 근육이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육입으로 말미암아 촉(觸)이 생깁니다.

-촉(觸)-
촉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시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촉의 시기에서는 느낌만 있을 뿐이지
느낌을 식별하는 기능은 없다고 말합니다.
촉은 태어나서 느끼는 단순한 인식작용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깁니다.

-수(受)-
수는 감정을 감수(感受)하고 인상을 느끼는 능력이 발동되는 시기입니다.
수는 육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별하여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면 싫은 것은 배척하고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 수의 단계입니다.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생깁니다.

-애(愛)-
애는 애착심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애착심은 애착하는 대상을 계속 진행시키려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성을 느끼는 감정은 바로 애의 단계입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것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애에는 욕애(慾愛)·색애(色愛)·무색애(無色愛)가 있어
이를 삼애(三愛)라고 합니다.
애로 말미암아 취(取)가 생깁니다.

-취(取)-
취는 쉽게 말해서 사랑하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끝까지 취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가지려는 행동을 말합니다.
취는 곧 집착을 의미합니다.
또 취는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그밖에 직업을 가지거나
명예, 물질, 사람, 돈 등을 가지려는 마음 또한 취가 됩니다.
취로 말미암아 유(有)가 생깁니다.

-유(有)-
유는 한번 취한 것은 자기 것으로 하려는 소유욕을 말합니다.
유는 애와 취를 바탕으로 하여 거기서 여러 가지 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됩니다.
앞의 애, 취와 더불어 유는 우리 인생살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세의 애·취·유 세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과 노사라는 미래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생(生)-
생은 애와 취와 유의 상태로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애와 취와 유의 생활을 계속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사(老死)-
노사는 살아가다 늙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즉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실존의 형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열두 갈래의 생존 양상은 이중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무명과 행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그 다섯 가지의 원인 때문에 애아 취와 유의 미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애와 취와 유의 미래가 원인이 되어 생과 노사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는 육신은 지·수·화·풍의 사대로 변하고 영혼만이 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전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깊은 잠과 형태가 유사합니다.
영혼은 깊은 잠 속에 있다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팔식에 잠재되어 있는 무명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연 있는 곳을 찾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업식이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 합니다.
때때로 살아있을 동안 어떤 한 곳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영혼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물질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애, 취, 유의 업을 잘 지어야 합니다.

생선을 싼 종이는 생선이 없어져도 오랫동안 비린내를 풍기게 되지만
반대로 향을 싼 종이는 끝끝내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인연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둥근 고리 모양의 순환 관계를 가진 십이 인연은
그 어떤 것도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무명이 첫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노사가 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근본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언제든지 자기가 마음먹는 그 순간이 시작입니다.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행한 업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시작하는 그 순간이 곧 출발점입니다.

나이를 탓하여 나태하거나 포기하려는 사람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인생이 일직선으로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둥근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끝낼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치를 안다면 아는 그 순간부터
계속 자기 발전을 위해 정진할 것입니다.
보다 낳은 꿈과 희망과 기대와 포부를 갖고 활기차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곧 불교를 배우는 보람입니다.

십이 인연의 이치는 모든 사물의 인연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이 인연의 이치를 관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본질은 물론 우주의 모든 이치도 한꺼번에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이 십이 연연을 관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본질을 거울 들여다보듯 환히 깨달은 것입니다.
십이 인연을 통해 현상과 내면의 세계를 빠짐없이 정리해 나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 해결은 곧 우주 질서 전체를 하나로 보게 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러한 십이 인연도
모두 텅 빈 것으로 보아 <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없기도 하며 있기도 한 것입니다.
있다는 것은 인연에 의해 잠깐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기도 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의 개념은 있다는 것의 부정이며,
또한 없다는 것의 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있기도 하며, 없기도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역무무명진>에서는 무명이 다한 것까지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이 인연의 하나하나를 관찰해 보니 무명이 다 끝나 무명의 밑바닥이 드러났는데,
그것마저 없다는 것입니다.
<역무노사진>에서는 노사가 다한 것까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십이 인연에 매달려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이 인연이 텅 비어 <무>의 상태가 되는 것까지 깨달아야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반야심경』에서는 십이 인연마저 <무>로 돌려버리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흔히 『반야심경』은
선사상(禪思想)과 아주 접목이 잘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