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반야심경 4장 - 일체가 空함을 아는 지혜

마음정원(寂光) 2011. 11. 27. 10:34

반야심경 4장 - 일체가 空함을 아는 지혜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이런 지혜의 눈으로 까닭에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없으며......

시고공중무색
<시고공중무색>은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물질적 존재인 색(色)이 없다'는
뜻입니다.
색이 없다는 것은 색이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니라 색은 인연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無)>의 의미는 무한한 세계를 말합니다.
그릇이 비어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텅 비어 있는
허공이 만상을 살찌우는 근원이고 무한대로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무(無)와 무한(無限)의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양극단이 서로 통하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주 즐거운상황이 되면 기쁨의 눈물이 나오는 이치도 같다고 보겠습니다.
price란 단어에 less를 붙이면 priceless가 됩니다.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한 가치를 지닌,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라는 뜻이 됩니다.
전라도에 무등산이 있습니다. 등급을 매길 수 없는, 비교를 초월한 산의 위용을
그렇게 '무(無)'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무(無)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시고공중무색>에서부터 나오는 '무'의 의미는 전부 무한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색은 인연 따라 형성되는 것이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온 우주에 꽉 찰 수 있고, 모양이 없기 때문에 온갖 모양으로
다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無)에는 공(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무수상행식
<무수상행식>이란 감수작용도 상상작용도 의지작용도 분별작용도 어느 것
하나 독립하여 홀로 있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간 따라 변하고 공간
따라 변하기 때문입니다.
<오온> 즉 색·수·상·행·식이 공하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은 없는 것입니다.
색은 곧 몸이며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됩니다.
<오온>중에서 색만 존재하면 그것은 시체에 불과합니다.
또 수·상·행·식의 정신만 존재하면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로 결합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오온개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기가 없다는 뜻의 무아(無我)의 개념도 <오온개공>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앞에서도 여러 번 설명했듯이 색은 인간의 육신을 위시해서 모든 물질적인
것을 통틀어서 말합니다.
수?상?행?식은 일련의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오온>의 공한 모습을 바로 아는 것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이 엄연히 살아서 움직이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공한 모양으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분리될 수 있는 것도 <오온개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불교에서 자기가 없다는 뜻의 무아(無我)의 개념도 <오온개공>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 밖을 보면 밖의 물체가 끝없이 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밖의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차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일종의 착각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착각, 곧 우리의 업식(業識) 작용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영원히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본래 모습은 텅 빈 것이며, 그것은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는 것입니다.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지만,
그래서 인연이 결합하는 순간 색도 될 수 있고, 수·상·행·식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뿐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으로 나의 실상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그 눈 · 귀 · 코 · 혀 · 몸 · 생각,
이 모두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눈 · 귀 · 코 · 혀 · 몸 · 생각들의 대상이 되는
물질 · 소리 · 향기 · 맛 · 촉감,
그리고 법 또한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나의 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안 · 이 · 비 · 설 · 신 · 의가 없는데
그 객관적 대상인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은 너무도 밝은 이치이다.

해설
여기서는 불교의 근본 교리에 해당하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 대안 부정인데,
먼저 육근과 육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육근은 여섯 가지 주관적인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안·이·비·설·신·의>입니다.
육경은 여섯 가지 객관적인 인식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킵니다.
육근이 있으므로 육경이 존재합니다.
육근에 의해 외부로부터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육근의 대상으로서 육경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육근인 눈·귀·코·혀·몸·생각의 여섯 가지를 통해서
눈의 대상인 물질, 귀의 대상인 소리, 코의 대상인 냄새, 혀의 대상인 맛,
몸의 대상인 촉감, 생각의 대상인 일체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지각하는 여섯 가지 작용은
앞의 육근이 있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것들입니다.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이 없다면 나는 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꽃이 꽃병에 꽂혀 있어도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내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 객관 세계를 인식의 주체인
내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으며, 피부로 감촉함을
통하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경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고 합니다.

육근의 주관적인 인식 능력과 육경의 객관적인 인식 대상이 만나서
하나의 현상을 이루는 것이 십이처입니다.
육근과 육경이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눈이 없다면 볼 수 없고, 귀가 없다면 들을 수 없고, 코가 없다면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혀가 없다면 맛을 느낄 수 없고, 몸이 없다면 감촉할 수 없고,
의지가 없다면 지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이기 때문입니다.
공은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십이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에는 육근과 육경, 즉 십이처까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를 개별적 구성 요소로 분석하고,
그것을 다시 결합하여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는데 있어 육경을 도적에, 육경을 창문에
비유하여 도적의 침입을 막는 창문 단속을 중요시 했습니다.
방안을 도둑에게 내맡기지 말고 당신이 주인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좋은 일을 만들려거든 자신의 육근을 좋은 대상과 만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좋은 눈으로는 좋은 것을 보도록 하고, 코로는 좋은 냄새를 맡도록 하고,
혀로는 좋은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으로는 항상 기도하며
좋은 행동을 해야 하고, 마음으로는 항상 좋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대상의 취사 선택을 매순간 잘 해야 합니다.

마음을 닦는 일은 온갖 번뇌 망상의 시발점인 안이비설신의를 단속하는
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육근이 무상하고 '나,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수행을 하게 되고 언제인가는 해탈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참고: 지광스님의 '저 짙푸른 창공과 나는 하나라네',
대한불교조계종포교원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