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반야심경 2장 - 생명의 근원은 부처님

마음정원(寂光) 2011. 11. 27. 10:31

반야심경 2장 - 생명의 근원은 부처님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제도하시느니라.

우리들이 선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완성자다.
그 지혜를 통하여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모든 형상계와
온갖 감정의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깨달아 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었기에 일체 고난과 불행과 문제들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이니, 불행이니, 문제니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내 몸을 중심 하여 나라는 것, 나의 것이라는 것 등,
많고 많은 감정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삶을 통하여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였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내가 이와같이 들었다'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구절이 맨 먼저 나오지만 『반야심경』에서는 경전 성립의 배경 설명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야>의 진수를 뽑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독송되고 있는 『반야심경』의 본문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범서로 된 『반야심경』에는 경의 맨 처음에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체지자'란 바로 지혜를 완성한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을 가르친 경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지자에게 귀의한다'는 구절은 『반야심경』이 지혜의 경전임을
잘 나타내주는 귀중한 말입니다.

관자재보살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에 있어서 자유자재한 분'이란 뜻입니다.
지혜에 의한 바라밀행(波羅蜜行)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분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재한 위신력을 표현하기 위해서 관자재보살이라고 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운 마음을 그 직관지로 투사하는 보살이며,
부처님의 자비가 인격화된 분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자비를 통한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을
완성하는 자로서 등장시킨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디'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것으로
불교의 이상적인 구도자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진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上求菩提 下化衆生)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넓은 의미로 볼 때 보살은 올바른 인생을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 보살은 '위대한 신심과 용기를 바탕으로 모든 유정
중생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인 것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행>은 '움직이다'를 뜻하고 은 반야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합니다.
<심>은 '깊숙이'라는 뜻입니다.
<심반야>는 깊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움직여서 내 마음 깊숙한 자리로 들어가야
함을 듯합니다. 곧 공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밀다>는 경의 제목에서 살펴봤듯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상태 혹은 완전에 도달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좀더 자세히 풀어보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실천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
<조견>은 '두루 환히 비추어 본다' 또는 '저 먼 곳으로부터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희미하게 대충보는 것이 아니라 밝은 햇살 아래 먼지
하나라도 빠뜨림 없이 완전히 통찰하여 근본까지 꿰뚫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오온>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색·수·상·행·식)를
일컫는 말입니다. 여시서 온(蘊)은 '축적한다', '쌓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한데 뭉쳐 한 덩어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 즉,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현상으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아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를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라면 <조견오온개공>은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일체고액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고통과 액난을 다 초월했다'는
뜻입니다.
<도>란 괴로움의 세계에서 즐거움의 세계로 건너가는
도피안(到彼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도>의 의미는 일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일체>라는 말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고액>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액>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경전을 보면 사고(四苦)와
팔고(八苦)가 있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르는 고통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와 정신적인 고통 네가지를 더해서 팔고(八苦)라고 했습니다.
생고(生苦)는 태어나는 고통입니다.
노고(老苦)는 늙어가는 고통입니다.
병고(病苦)는 육신의 고통입니다.
사고(死苦)는 죽음의 고통입니다.
이 네 가지 육체적 고통에 마음고통 네 가지가 붙어서 팔고(八苦)가 됩니다.
첫째는 구부득고(求不得苦)입니다. 무엇을 얻고 싶어도 제대로 얻어지지
않을 때의 괴로움입니다.
둘째는 애별리고(愛別離苦)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셋째는 원증회고(怨憎會苦)입니다. 원증회고란 미운 사람과 만나게 되고
싫은 사람과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을 말합니다.
끝으로 오음성고(五蔭盛苦)입니다. 우리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요소인
오온에 너무 집착하여 생기는 고통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고액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라밀다의
지혜로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온이 없는데 물질이며
정신현상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현상이 없으므로 거기에 따르는
고통이나 액난도 소멸되어 이름조차 없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괴로움에서 구함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괴로움이 공함을 깨달은
눈으로 환희 비추어 보면 그 괴로움으로 하여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마음의
평안이 깃들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방향타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으로 해서 불교란 무엇인가를
알고 불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 지광스님의 '저 짙푸른 창공과 나는 하나라네', 대한불교조계종포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