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월출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영암 도갑사

마음정원(寂光) 2005. 9. 21. 01:34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 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도갑사 홈페이지 안내 www.dogapsa.org

 

도갑사의 일주문..........

월출산 아래 도갑사에 이르니 벌써 18시30분경이 되었다.

입장료를 받는 분도 없고 문은 중생을 위하여 활짝 열려있고,

여름날의 해가 긴덕분에 아직도 답사할 시간은 충분하리라 생각되는데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도선국사비와 수미선사비를 보아야하는데...........

 

 

 

 

 

 

 

 

 

 

 

 

 

 

 

 

 

 

 

 

 

 

 

 

 

요즈음 어디를 가나 절집들이 중창불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데

이곳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번듯한 대웅전을 짓고, 개금불사를 하고, 석탑과 석등을 세우고....

제발 도갑사의 옛멋을 잃지않도록 다른 절집에서는 볼수 없는 도갑사만의 특징을 살려

중창불사를 하길 바랄뿐..............


 

일주문을 지나 5분정도 숲길을 따라 걸으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비를 만날수 있는데

아마도 도갑사의 위용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에서 만들었으리라...........

 

유홍준님은 왜 도갑사의 해탈문이 국보로 지정되었는지 도대체 이해할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주심포식과 다포식을 겸한 정통맞배지붕으로 귀한 건축양식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초보자인 내 눈에도 무위사의 극락보전만한 기품은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무식한 내 눈 탓일테고 분명 국보로 지정될만한 이유야 있었겠지....................

 
 
금강역사상.........
 
 

해탈문 앞의 소맷돌................

공그리고 굴린 솜씨하며 와선형의 문양이 참으로 아름답다.

 
 

 
 

불전사물이 잘 갖추어진 범종각............

그런데 스님이 타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거사님이 종을 치고 계신다.

내 나름대로 짐작만 하면서 묻지는 않았는데 좀 씁쓸한 기분이 든다.

 
 

더운 날씨 탓인지 오가는 탐방객도 스님도 보이지를 않고

단정하게 석양햇살을 받고 있는 요사채가 덩그렇게 있다.

 
 

석조..........

1682년에 만들어졌다면 320년전 작품인데 과연 석조하면 도갑사의 석조라고 할만큼

모양도 연륜도 품위도 있어보인다.

 
 

 
 

중창불사로 인하여 이곳 저곳이 파헤쳐지고 어수선한데

대웅전도 임시로 모셔져 있다.

조감도에서 보듯 해탈문-사천왕문-회랑-대웅전-적멸보궁을 일직선상으로 배치하는

정통 전각배치를 하려는듯 하고 이렇게 불사를 모두 마치면 월출산 도갑사의 위용이

대단하리라 생각이 든다.

 
 
임시 기거하시는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터를 다듬고 있는 대웅전과

괘불대사이로 계단이 들어 설것이고

대웅전 뒤로는 적멸보궁이 들어설 계획인가보다. 하루속히 중창불사가 끝나길....나무관세음보살

 
 
아마도 이 많은 석물들이 하루속히 제자리를 찾기를 고대하고 있을것이다.
 
 

이 많은 일들을 끝내려면 더 많은 시간들이 필요할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갑사 5층석탑

규모도 크지않을뿐 아니라 운주사의 돌탑들처럼 전체적으로 너무 마른 느낌이 드는데다가

옥개석의 끝처리 부분이 대개는 치솟아있는데 수평을 이루고 있어 흔치않은 모양이다.

 
 

 
 

수미왕사비.............

목이 짧아 우둔하게 보이며 머리부분이 너무 크고 다리가 작아 균형미는 없으나

거북등이나 얼굴의 표정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스님, 석조여래좌상이나 도선국사비가 있다고 하던데 어디로 가야하나요?>

<저쪽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이정표가 있으니 찾아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스님.....그런데 부도전도 어디 있을것 같은데요?>

<예! 부도에 관심이 많으신 분 같은데 도선국사비 옆에 있습니다.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5분거리도 안됩니다.>

 

도갑사를 끼고 도는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끊이지를 않는다.

이렇게 경내로 계곡이 흘러 행락객들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용화문......
그럼 미륵부처님이 있는 곳인데......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적막과 고요만이 흐르는 용화의 세계로 들어선듯하다.
 
 
 
 
 
 
 
 
 
 
 
 
 
 
 
 
 
 
 
 
 
 
 
 
 
 
 
 
 

용화문을 들어섰는데 석조여래좌상.........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신다.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광배까지 한개의 돌로 만들어진

불상은 좀처럼 보기 힘든데 더구나 육도, 삼계까지 아주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어

<사진촬영 절대금지>라고 쓰여있음에도 부처님의 무릎으로 들어오는 7월 한여름의 햇살과

함께 한장을 찍었다. 부처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Flash는 안썼어유......

 
 

 
 

바로 옆의 선방에는 단정한 흰고무신 두켤레가 놓여져 있는데 숨소리도 안들린다.

공부에 방해하는 중생들이 쓸데없이 사진을 찍어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꾸중들을까봐

얼른 나왔다.

 
 

진화문........진화전........참으로 변화되었다.

부처님의 진실한 세계로 들어섰다는 뜻일까?

 
 

돌담을 잘 쌓아서 부도전을 꾸몄는데

이승과 저승의 세계가 이토록 허망하게 구분되다니

아니지 이승과 저승의 세계가 불과 돌담하나 차이라니

그럼 해탈과 번뇌의 차이도 종이하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렇게 부도 한기로 남은 스님들의 해탈을 위한 노력은 어디까지 도달하였을까???????

 
 

도선국사비...............

거북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전혀 과장됨이 없고 발가락 하나까지도

너무나 섬세하여 금방이라도 헤엄을 치며 나아갈듯하다.

 
 

 

 

 

도선국사와 수미선사 두분을 배알하면서 저물어가는 석양에 도갑사는 그렇게

또 하루를 묻고 지나간다.

 
 
 
<도선국사에 대하여>
 

893년, 왕건은 도선에게 도선비기를 전수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도선국삽니다.

고려사 첫머리에 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된 내력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여기에도 도선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하는데요. "내년에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으시오.
" 이렇게 왕건의 출생과 고려건국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
전해주었다고 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왕건이 17세때 도선은 직접 송악으로 와서 왕건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출사치진'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고,
'지리천시지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
'망질산천 감통보우지법'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대로라면 도선국사는 왕건의 출생부터 교육까지 전과정을
도맡았던 스승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되도록
도와준 은인인 셈이죠. 왕건의 출생과 성장을 적은 이 고려사의 기록은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
자들까지 있습니다.

전남 광양에 있는 백계산 자락.
도선국사가 살던 절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지금은 인가가 들어서있지만 이 일대가 바로 도선이 중창했다는
옥룡사가 있던 자리랍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던 옥룡사는 1878년 화재로 폐사된 이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부도터가 발견되었는데요.

규장각에는 목판본으로 된 도선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선이 입적한 해는 898년 72세.
고령의 나이에 죽은 옥룡사 무덤의 주인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됩니다.

사실 그동안 도선에 관한 확실한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도 아래서 발견된 도선의 유골은 천년전 도선의 존재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 부도옆에는 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도는 그동안 비문으로만 남아있던
도선의 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증겁니다.

도선에 비문을 보면..
'연좌망언 삼십오년' 옥룡사에서 35년간 참선하면서 수도를 한 고승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 '음양지리' 그러니까 풍수지리를
배운 내력과 왕건의 고려창업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비의 뒷면을 보면 이 비를 건립하게 된 내용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천덕이년 봉선'
그러니까 1150년 고려인종때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서 세웠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선국사비는 도선이 입적하고 250여년이 지난뒤에야 세워진 것입니다.

월출산 자락에 있는 성기동 유적지는...
백제 왕인박사와 함께 도선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도선의 어머니는 꿈에 광채나는 구슬을 삼키고 도선을 잉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은 사람이 안 살고 성인이 태어난 유적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보호하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도선이 태어난 마을 인근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이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입니다.
도갑사 국사전에는 도선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데요.
조선 세조때 그려진 영정을 최근에 모사한 것입니다.
15살에 출가한 도선은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를 시작.
스무 살 되던 해, 도선은 승려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전남 곡성에 있는 동리산 태안사.
통일신라때 고승 혜철대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이곳에서 도선은 스승 혜철대사를 만나 새로운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설설 무법법이라는 화두였습니다.
"불법이 무어냐 하면 우선 뜰앞의 잣나무라 한다든지 마른 똥막대기다 한다든지
그런 화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설설이니 무법법이니 하는 것
은 하나의 화둡니다. 그걸 알아채면 견성, 성불한거죠."
도선은 바로 이곳에서 선종에 입문한 것입니다.

어려운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라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선종.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수 있다는 사상으로..
당시 불교계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선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우선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선으로서 실천성이 없는
그런 불교를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불교는 대단히 혁명적인 개혁입니다.
이것을 그당시 교학승들이 이론에 치우쳐있고, 권위주의 명예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런 것을 타파하고 순수한 불교의 근본정신을 뒤돌아보자는 운동의
모티브가 되어졌다, 그래서 이것은 개혁도 보통 개혁이 아니라 혁명적이었다,
이렇게 볼수 있는겁니다.

도선의 스승이신 혜철대사는 우리나라에 선종불교를 들여온 선승이십니다.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그곳에서 유행하던 선종불교를 접하게 되시고..
그가 귀국해서 창건한 태안사는 우리나라 선종불교가 태동한 중심지였죠.

혜철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승을 중심으로 선종은 전국적으로 확산.

당시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종을
대신해서 새로 일어난 선종은 중앙, 즉 경주에서 발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각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서 사찰을 짓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각 지역의 유력자들, 흔히 호족이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과 직접 연결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선종은 경주가 아니고 각 지역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여러 세력가들의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달까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무설설 무법법의 깨달음을 얻은 도선은 15년간의 운수행각에 들어가십니다.
운수행각이란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이 전국 산천을 순례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도선은 이 과정에서 신라말 혼란스러운 사회현실과 민심을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죠.

서른일곱살 되던해, 운수행각을 마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머물면서
인근에 4개 절을 창건한다. 바로 독자적인 옥룡산문의 출발이었던 것 입니다.

도선은 참선으로 불법을 깨달은 선승이었습니다. 제자가 수백명이나 되고
그가 창건한 절이 너댓개나 되는걸로 봐서 당대에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도선은 입적후 선사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도선은 고려시대에 더 높게 평가를 받습니다. 고려 현종은 도선을 선사에서
대선사로 한단계 더 올립니다. 숙종은 왕사, 인종은 국사로 추증합니다.
이 '국사'는 국가에서 승려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신라의 승려를
고려시대 국사로 추증한 경우는 원효, 의상, 도선 이렇게 세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선은 사후에 원효나 의상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현재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도선의 유작은 없습니다.
고려사에는 도선이 썼다는 책이름이 곳곳에 기록돼 있는데요.
옥룡기, 도선답산가, 도선비기, 송악 명당기, 도선밀기 등 다양한 비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기는 고려중기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거의 대부분이 후대인들이 부풀리거나 과장돼서 그 원형을 알수 없다는 도선비기.
그러나 고려사에는 비기의 내용을 짐작할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고려 숙종때, 김위제는 수도를 옮기자는 상소를 하며 도선비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선은 고려가 개국하고 160년이 지나면 한양에 도읍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도선의 비기에 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내용은 송악명당설에 관계된 내용입니다.
송악의 지기가 쇠해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를 보면
아무래도 도선은 송악의 명당에 관계된 얘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들이 굉장히 많은데 도선이 지었다고 나오는 구절을
보면 주로 국도나 도읍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히 명당의 규모가 상당히
큰것에 대한 얘기들이 많은데 그것은 책이 현존하는 책이 없긴 하지만 당시 도선이
생각했던 도읍으로서의 입지, 이런것들을 한반도 전체를 거시적으로 살펴서 이런
것이 도읍이 될만하다는 생각이나 이야기를 남겼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원형은 베일에 가려져있지만 도선비기는 실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거죠.

사람이 병들면 침이나 뜸질로 치료하듯이 산천의 문제점도 절이나 탑을 세워
고치고 보완하는 것이 바로 풍수의 대가였던 도선이의 비보사상입니다.

풍수적으로 완벽한 터를 찾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드센 곳이 있다든지 해서 어떤
실제적인 장소에 가서 결점이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결점이 있는 땅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보완조치를 해야되는데 그런 것을 통틀어서
비보라고 할수 있죠.
비보는 도선풍수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여기가 자연지형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는 지리산에서 도선이 이인을 만나서
산천순역의 흐름을 배웠다고 하는데 도선은 모래로 산천순역의 형세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창건했다는 사찰이 무려 3800개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다 믿을수는 없겠지만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 비보를 많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땅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혼란기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점이었던 도선의 비보사상.
왕건으로 하여금 도선의 비보사상을 활용해서 고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게
하였던 겁니다.

풍수는 도선이래 천년동안 우리 생활 깊숙히 자리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는 조상의 묘자리를 잘 써서 자손이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변해왔습니다. 그러나 원래 도선의 풍수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도선이 살았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불법과 땅의 힘에 의지하면서 믿고 살았습니다.
불교와 땅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이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땅을 다시 보고 환경을 가꾸면 좋은
터가 될수 있다는 그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가 살았던 후삼국의 혼란기-
그의 사상은 태조왕건의 통일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려면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으로 갈라져있는 다양한 세력을 어떻게
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묶을수 있었던 힘. 그것은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던 것입니다.

 

- 출처 : 네이버/연꽃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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