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침묵의 향기 - 정목스님

마음정원(寂光) 2005. 9. 29. 14:35


 

마음고요


침묵의 향기



                                                               정목스님 글



침묵의 향기


보내주신 선물과 편지 잘 받았습니다. 달라이라마를 만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는 스님의 편지를 읽고 저 또한 떠오르는 얼굴이 많습니다.

짧은 인생에 삶의 귀감이 될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건 행운이지요. 달라이라마 곁에 있으면 그분의 자비스러움에 저절로 감전된다는 스님 말씀 또한 공감되는 바가 많습니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향기가 나는 존재, 그 향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놓는 존재, 그런 존재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먼 길을 헤매었던 것은 아닐까요?

향기가 나는 존재를 생각하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 은사스님을 따라 통도사에 갔던 기억이 나는군요. 큰 행사가 있어 따라갔다가 극락암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향기 나는 한 존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극락암엔 경봉 큰스님이 계셨지요. 경봉 스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던 저는 그저 인자한 노스님이 한 분 계시는구나, 정도로 생각하며 은사스님을 따라 절만 했습니다. 조금 있다 은사스님과 다른 스님들은 행사 때문인지 큰 절로 내려가시고 어린 제가 노스님 곁에서 한나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노스님은 몸이 불편하신지 잠시 누워 계시다가 햇살이 따뜻한 툇마루에 가만히 나앉아 계시기도 하고, 또 먹을 갈아드리면 묵묵히 글씨를 스시기도 하셨습니다. 노스님의 침묵과 고요함을 이끌어 저 또한 차분하게 하루를 보냈지요.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건대 그때 경봉스님께 받았던 감동은 은은한 행복감이었습니다. 달라이라마 곁에 있기만 해도 그 자비스러움에 감전된다 하셨는데 저 또한 그때 경봉스님의 그 온화한 침묵에 감전되어 가슴 가득 행복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온종일 침묵 속에서 있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하루는 잔잔한 평화가 넘치는 하루였습니다. 스님이 방으로 들어가 계시면 따라서 방에 들어가고, 툇마루로 나가시면 따라서 툇마루로 나가며, 그림자처럼 스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스님은 따뜻한 손길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줄곧 침묵 속에 있던 스님은 제가 나비를 가리키며 예쁘다고 좇아가려하자 갑자기 “지금 나비를 따라가려 하는 자가 누구냐?”하고 저를 쳐다보시며 물으셨습니다.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지요.

보석이 귀하다 해도 그 가치를 아는 이에게만 귀한 물건이 되듯,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그때의 제게 스님이 주신 가르침은 그 가치만큼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날개를 접었을 때는 접은 것만 생각하고, 날개를 펼쳤을 때는 펼친 것만 생각해라. 그렇지 않으면 벗어나질 못한다.”

이어서 한 말씀 또한 그 당시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렴풋이 알 듯 하면서도 핵심을 잡을 수 없던 그 말씀을 알아차린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였습니다.

스님의 말씀이나 스님을 싸고도는 그 침묵의 향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스님을 싸고도는 그 침묵의 향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마냥 스님 곁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조급하지도 안고 복잡하지도 않으며, 긴장하거나 눈치 볼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하고 고요한 것만으로 충분하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땐 또한 마음의 문이 지그시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 제 마음은 맑고 개운한 여운으로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향기로운 꽃처럼 그렇게 큰 스님은 짧은 시간동안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으셨지요. 그날 이후 나는 고요가 주는 온화한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이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위를 행복하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몇 해 뒤 큰스님은 입적하셨고, 세월이 간 뒤에야 비로소 스승의 큰 이름을 알게 된 저는 그때 그 온화했던 스님의 미소와 침묵을 떠올리며 저 또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꽃 같은 서원 하나 세워보곤 했습니다.




정목스님은 1976년 열여섯 살에 출가해서 동국대 선학과와 중앙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 오랫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화 상담기관인 ‘자비의전화’를 만들었습니다. MC로 방송에 나서면서 많은 활동을 하셨죠. 현재는 ‘마음고요선방’을 열어 종교를 초월해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일과 아픈 어린이를 돕는 ‘작은사랑’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마음에 고요함을 주는 정목스님의 글이 이어집니다.


출처 : 불교상담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