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희양산 봉암사

마음정원(寂光) 2005. 7. 9. 16:49

희양산 봉암사



    산문을 굳게 닫아놓고 중생의 접근을 사양하는
    이 땅의 마지막 청정도량 희양산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문을 여는 까닭에
    모든 일 제쳐두고 새벽같이 먼 길을 달려가야 했다.
    몇 차례 절집 어구까지 왔다가도 매번 돌아섰던 발길.
    초파일이면 찾아가는 나만의 산사가 있기는 하지만,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인데 오늘을 놓칠 수는 없었다.
    봉암사는 일반인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스님들까지도 출입이 철저히 제한되어 있는
    조계종단의 특별선원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 각각 석달을 수행하고
    남은 3개월 씩 휴식을 취하고 있으나,
    봉암사는 해제 기간이 따로없이 일 년, 삼 년을
    계속 참선과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따라서 칩거에 드는 수도승이 아니면 스님들조차도 아예 출입이
    불가할 정도의 철두철미한 참선도량인 것이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고대하던 이가 어디 나뿐이겠는가?
    밀려들 인파를 염려해 문경과 가은읍으로 들어가는 길을 피해,
    아예 휘양산 북쪽을 돌아 괴산의 쌍곡을 거쳐 반대 방향에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태교 다리가 있는 상괴리 삼거리를 채 못 가서 발길이 막힌다.
    신도들을 실어나르는 순회 차량이 쉴새없이 잇달아 왕복하지만,
    그마저 타고 가기엔 여의치 않다.
    고작 십 리 길인데 차를 타기 위해 긴 시간 기다리는 일도 무료하려니와,
    푸른 신록도 청명한 하늘도 상쾌함을더하리니 처음부터 걷기를 시작한다.
    산사로 가는 길은 호젓해야 제격이고,
    몇 시간 아니 하루 종일 걷는 길이라야 제 맛이 나기 마련이다.
    백로두(白老頭)의 희양산 암봉을 바라보며 봉암사로 들어가는 길은
    양산천 개울을 끼고 느티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늦봄 가뭄철에도 보(洑)를 막은 소(沼)에는 청정한 물이 넘치고,
    손바닥만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닌다.


    윗상괴 마을 앞 길 가엔 서낭당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나그네의 발길을 쉬어 가란다.
    허리에 낡은 금줄을 두른 수령 400년의 노거수 느티나무도
    그윽한 정을 느끼게 해 주려니와 그늘 아래 원형이 고스란이 보존된 서낭각이
    더없이 소중한 느낌으로 반갑게 다가온다.
    한때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던 시절,
    누천 년 마을을 지켜오던 장승이며 서낭당을 헐어내야
    마치 문명한 현대인이 되는 것처럼 날뛰던 일이 있었는데도,
    이 고장 순박한 민심은 '내 것'과 '우리 것'을 지킬 줄 아는 지혜가 있었고나.


    차길이 끝나는 원북리 냇가에 십여 평이 넘는 평반석이
    마을 사람들의 더없는 쉼터가 되고 있다.
    이름하여 야유암(夜遊岩).
    그 옛적 어느 풍류객이 달밤에 이 너러바위에 앉아 퉁소라도 불었음직도 하다만,
    지금은 상혼에 눈먼 음식점이 평상을 즐비하게 깔아놓고
    취객을 불러앉히는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
    예서부터는 딱딱한 포장길이 끝나고 폭신한 흙길이다.
    노송과 잡목의 울창한 숲그늘이 드리워져,
    땡볕을 걸어오느라 흘린 땀을 일거에 시원히 거두어 준다.
    나무기둥에 걸어놓은 청홍색의 연등을 하나씩 헤아리며, 발걸음은 세속을
    뒤로하고 피안의 골짜기로 깊숙히 빠져들어 간다.




    터덜터덜 숲길을 10분 남짓 오르다 보면
    오른편으로 개울 건너 직접 절마당으로 이어지는 널찍한 새 길이 나타나고,
    그대로 직진하면 일주문에 이르게 된다.
    아름드리 싸리나무 둥치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일주문 현판엔
    '曦陽山鳳巖寺' 글자가 선명하고, 뒷편엔 '鳳凰門' 편액을 걸어 두었다.


    일주문을 지나면 침류교.
    다리에 서서 바라보는 봉암사의 전경은 전해오는 얘기 그대로
    봉황새가 알을 품는 형상이다.
    백두대간의 연맥이 희양산(998m)을 솟구쳐 만들고,
    모든 흙을 씻어내려 허연 바윗살만을 드러내 천혜의 기묘한 암봉을 이루어 놓았다.
    신라적 지증대사가 이 곳의 지세를 일러
    '중들의 수도처가 들어서지 않으면 도적떼의 소굴이 될 자리'라 하며
    봉암사를 창건했다 하니, 속인의 눈에도 이만한 명당이 다시 없을 듯 싶다.


    대웅보전 앞마당을 가득 메운 초파일 연등은 붉고 푸른 채색의 연꽃등이 아니다.
    그 어떤 덫칠도 꾸밈도 없이 창호지의 바탕 빛깔 그대로
    소박하고 질박한 흰색등 뿐으로
    여느 절에서 볼 수 없었던 이채로운 관등의 모습이다.
    흰색은 만유색채의 근본이기에,
    모든 물상들의 진여(眞如)한 자태를 형상하고자 하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


    무명을 밝히는 연등의 광명한 빛을 받들어
    작은 염원을 실어 나도 등을 하나 달아본다.
    설산 고행을 통한 석가모니 부처의 득도의 경지를 헤아리며,
    뭇 중생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108 고뇌를 저으기 덜어보려 함이려니.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하여 피안의 안식을 도모함은
    스스로 세속적 욕망의 존재임을 드러냄이 아니겠는가.
    생로병사야 원초적 4고(四苦)로 인간의 업보라 했는데,
    연말 이래의 병고로 일터를 나가지 못한 채
    아직껏 기적의 영험이나 바라고 있으니,
    나의 존재도 이만하면 한낱 미물에 불과할 뿐이다.
    종교(宗敎)란 용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가장 큰 가르침이요,
    진리와 도를 깨닫기 위한 수행이어야 한다.
    고작 자신과 가족의 안위나 영달만을 기도하는 소아적 기복신앙이
    부처의 가르침이 아닐진 대,
    건강이나 재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서야 이를 어찌 신심이라 이르겠는가.


    대웅보전 앞뜰 한가운데 높이 1m 정도의 노주석은 '불우리'라 하여
    본래 밤중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역할을 하던 유물이다.
    이제야 산중 절간에도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머리에 작은 소나무 한 그루 청청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거슬러 5분 여 오르면
    널찍한 반석과 크고작은 바위들이 어우러진 백운대.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은 청정하기 이를 데 없고
    사위를 둘러친 노송은 천하의 절경을 이루어 냈다.
    봉암사와 함께 휘양산 자락 모든 곳이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으니,
    천혜의 수림과 경관, 그리고 생태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다.
    연전에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과 문경시 측에서
    희양산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개발을 추진하였으나
    주지인 원타 스님의 오랜 단식과 불교 종단 및 환경 단체,
    그리고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일이 있다.


    세월의 이끼에 형체조차 희미한 '白雲臺' 각자는
    대문장가 최치원의 필적으로 전해오지만,
    필체나 음각의 형태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백운대 바위벽의 마애불>


<일주문에서 백운대로 이어지는 봉암사 건너편의 오솔길>

 

- 출처 : 좋은 인연 향기로운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