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손길...

마음정원(寂光) 2005. 5. 20. 18:48
제목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손길... 법인스님
오월 산사의 밤, 자정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잠이 쉽사리 들 것 같지 않아 숲길 산책하고 돌아왔습니다.
간간히 들리는 산짐승 울음소리와 도량의 적막, 산새소리와 물소리가 한 몸이 되고 여러 몸이 되어 마음이란 마음을 죄다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새벽 물소리는 싯다르타의 깨침과 환희의 물소리로 천지간을 흔들고, 한낮의 물소리는 고요와 침묵의 언어로 흐르고, 지금 한 밤의 물소리는 그저 간절하게  간절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마음 우울합니다. 여전히 가슴 무너집니다.
며칠 전  세속의 아버님 뵙고 하룻 밤 자고 아침 일찍 왔습니다.
초파일 일로 바빠서 이 때 가지 아니하면 늦어질까 급히 마음을 내었습니다.

전화를 하고 갔는데, 이미 아버님은 내가 잘 자리를 깔아 놓고 계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넌즈시 연세를 여쭈었더니, 84세라 하십니다.
한 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밖에 나가시더니만, 시장할 터이니 먹어라고 스폰지 케익을 가져 오십니다. 그리고 목도 마를 터이니 무얼 마셔야 한다며 보온이  된 보리차를 손수 따라 주십니다.
그만 목이  매입니다. 세상의 부모 마음이 이런가 봅니다.

이제 얼마나 사실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연민은 들지 않습니다.  한 번 이 생에 오셨으니 인연이 다 하시면 그렇게 가실 것입니다. 저는 늙음과 죽음을 서러워 하지 않습니다.

다만, 늙음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집착과 무지와 미움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별 것도 아닌 일상사에 부침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합니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인정과 사랑이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지혜를 구하고 깨침을 이루고 무욕과 자유를 구한다는 미명 아래 생명의  근원에 대해 절실하게 아파하지 않고, 참되고 간절하고 뜨거운 정과 사랑을 애써 외면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대흥사로 돌아와야겠기에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팔십 넷의 아버님은 벌써 일어나셔서 아침 밥과 따듯한 미역국을 끓여 놓고 든든하게 먹고 가라 하십니다.
강직하고 내성적인 나의 아버님께서... 그리고 어서 가라며 흔드는 앙상한 그 손길...

아, 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런 공양을 받으셨을까요.
천상의 공양을 받았다는 원효대사께서 이런 공양을 받으셨을까요.

열 여섯에 출가한 내가 스물 두 살 때 즈음, 일이 있어 속가에 하룻 밤 머물던 그 아침에도, 아버님은 고기국을 끓여 주신다며 이른 아침 길섶의 이슬을 털고 십리 길을 걸어 시장을 다녀 오셨습니다.

오늘 밤, 그 분의 외로움과 사랑의 손길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내 생명과 모든 생명의 외로움과 허무를 생각하니 이도 역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진정한 지혜와 진정한 사랑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
어렵고도 아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