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스크랩] 바위에 꽃처럼 핀 절, 불명산 화암사

마음정원(寂光) 2011. 7. 30. 07:56

 

세연世緣에 달뜬 부화하고 경박한 절이 아니라

외로움이 깊어 무거운 적막감으로 가라앉은 그런 절,

닿는 길조차 희미해 차라리 비현실적인 실루엣으로나 그려지는 그런 절.

모르긴 해도 화암사 정도가 지금까지 남은 옛 절 가운데

그에 가장 근사치로 다가선 절이 아닐는지... 

 

 

 

 

화암사 가는 길은 찻길이 없다. 모든 이가 자신의 두 발에 의지하여 올라가야 한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요즘에는 산천조차 날로 달라지고 달로 바뀌는 게 예사지만 화암사 가는 길은

옛 모습 그대로다. 오르내리는 사람이 간신히 몸을 비켜설 만큼 점점 좁아드는 바위골짜기, 그 흔한

중장비조차 접근을 허용치 않는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에 반천 년 전 사람들이 걷던 길을

고스란히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절은 고산현高山縣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이 비스듬이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렵다.

 

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닿는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다."

 

15세기에 쓰여진 <화암사 중창기>花巖寺重創記에 묘사된 길과 절의 모습이다.

 

 

 

 

숨을 고르며 마지막 한 구비를 돌면, <화암사 중창기>에 묘사된 것처럼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 인 화암사가

견고한 외양으로 내부를 감춘 채 길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화암사에는 문이 없다. 옛 절이라면 어느 절이나 있게 마련인 일주문이 여기에는 없다.

사천왕문, 금강문, 해탈문, 불이문 ...... 그 어떤 문도 없다. 이런저런 문을 세울 여백도 마땅치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진입 공간이 충분히 드라마틱하여 굳이 문들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그래 그런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도 하나도 이상치 않다. 굳이 인공적 장치가 아니라도

우리는 그저 옛 길이 인도하는 대로 걸으면서 자연스레 '절로 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차원 높은

 구조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 과정이 생략된 채 단숨에 중심에 다가서는 그런 구조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생략된 것이 없는 미묘한 진입부를 화암사는 보여 준다.

 

 

 

 

  

산문이 하나도 없는 화암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건물이 누각인 雨花樓이다.

"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보통의 누각처럼 개방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아래층은 앞쪽에만 한줄로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중간 또는 뒷줄의 기둥이 서야 할 자리에는

막돌을 차곡차곡 맞물려 축대를 쌓았다. 따라서 누각 아래는 전체가 벽처럼 막혀 버린 구조로

산지가람에서 흔히 채택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

 

 

 

 

우화루는 집의 외형이나 가구架構, 공포 등의 세부 수법에서 개성을 찾기보다는

공간의 특성과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화루의 마루바닥과 안마당의 지면은

거의 레벨이 같다. 이 말은 건축적으로 우화루의 내부가 안마당의 연장,

 혹은 안마당이 우화루의 지속이라는 뜻이 된다. 달리 표현하면

우화루는 지붕 얹은 안마당이고, 안마당은 지붕 없는 우화루라고 할 수 있다.

 

요컨데 우화루와 안마당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듯이 화암사의 전각들은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성으로 서로 만나고 있다 하겠다. 수평성, 바꿔 말해 평지성이 백제계 건축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지형상 평지와는 거리가 먼 화암사에서

백제계 건축의 면면한 전통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에서-

 

 

 

우화루에 걸려 있는 투박한 조각의 목어와 목탁

 

 

목어의 모양을 작게 줄여서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든 것이 목탁이다.

목탁은 물고기 모양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데,

손잡이는 물고기의 꼬리, 목탁에 뚫어져 있는 구멍은

물고기의 아가미에 해당된다.

 

 

 

 

 

우화루의 벽화는 박락(剝落)이 심했다. 그냥 지나가려다 마음을 바꿔

 그런대로 볼 만한 벽화 두 폭을 필름에 담았다.

 

 

 

우화루 연등천장

 

 

화암사 안마당에서 들여다본 우화루 내부이다. 우화루는

2층 누대 건물이지만 안마당에서는 단층처럼 보인다.

 

-우화루 내부사진; 문화재청 제공-

 

 

 

문 간 채

 

 

화암사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다소 특이하다. 누각 아래 길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데로 돌아가야 한다. 우화루 왼쪽으로 돌계단이 놓였고 그 위에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는 민가의 그것과 꼭 닮은 3칸 일자(ㅡ字)집이다. 3칸 가운데 왼편 두 칸은 방이고

제일 오른쪽 한 칸을 '대문'으로 쓴다. 절집에 문간채가 있는 것도 새롭거니와

하필 가운데 아닌 옆칸을 문으로 활용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대문은 문턱이 아래로 휘우듬히 휘어졌고 문미(門梶)는 반대로 위로 부드럽게 굽었다.

딱딱하여 눈에 거슬리는 모양새가 아니라 본래 그래야 하는 듯 자연스럽다.

 

 

 

 

 세월에 닳은 문턱을 처음 넘어설 때, 나는 마치 어릴 적 외갓집 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ㅁ자형 구조를 가진 경내로 들어가면 그곳은 절이 아니라

여염집의 편안한 안마당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때의 적막은 또 얼마나 큰 위안인가!

-안도현 수필 '잘 늙은 절, 화암사' 중에서-

 

 

 

 

세로로 긴 몇 짝의 널을 이어붙여 만든 대문에는 '화암사 대문 시주기'라는 題名과

"차영재, 이길용, 이상호...' 등등 시주자 이름이 삐뚤빼뚤 어줍잖은 한글로 길게 새겨져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근엄한' 절집에서 순한글로 뭔가를 적었다는 것도 소박하고,

그 많은 이름들로 보아 푼돈들을 시주했을 사람들을 낱낱이 기념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번듯한 글씨로 거창한 현판에 오른 이름을 보는 때와 달리

잠시나마 따뜻한 시선이 머문다.

 

 

 

 

 

 

화암사 극락전은 이 땅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건축의 유구이다.

건축학자들은 극락전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앙구조를 갖추고 있는 법당이라고 자랑한다.

 

(자료) '하앙식(下昻式)' 공포기법이란

 

화암사에 오늘의 명성이 있게 한 '하앙식(下昻式)' 공포기법은 그 동안 국내에 백제시대의 흔적만 있고

물증이 없었었는데, 1978년 극락전에서 국내 유일의 하앙식 공포구조가 발견됨으로써

국내 고건축학계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이 발견으로 한반도에는 없고 중국에 다수 있는 하앙식 구조가 일본 법륭사(호류사)에도

 나타나 있음을 근거로 '한반도를 거치지 않은 중국기법의 직접도입'이라고 주장해온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극락전의 하앙식 공포 도해 (하앙: 짙게 칠해진 길다란 부분으로,

서까래 밑에서 도리를 받치며 길게 나온 뭉툭한 부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면 하앙 도해                                                                                    후면 하앙 도해

 

하앙(下昻)이란 굵은 나무를 두텁고 길다란 각재로 다듬어 출첨과 장식을 겸하여 쓰는 부재이며

하앙식 구조란 하앙의 머리 부분을 서까래의 경사를 따라 건물 외부의 처마 아래까지 돌출시켜

 외목도리를 받치고, 꼬리 부분은 건물 내부의 보나 통장여, 내목도리에 고정시켜

지붕 상부의 하중과 처마의 하중이 동시에 하앙에 얹혀져 주두(柱頭)를 지렛목으로 하는

 이른바 지렛대의 원리인 상호작용의 힘을 받아내게 하는 공포 방식이다.

 

그 효과는 지붕의 하중으로 처마를 길게 낼 수 있고 처마의 하중으로 보가 없는 무량구조도 만들 수 있으며

공포의 출목을 손쉽고 안전하게 만들고 작은 출목으로도 큰 건물을 만들 수 있다한다.

 

 

 

 

극락전 전면 하앙의 머리 부분(昻頭)은 구름 문양으로 투각하고 용머리를 조각하여 얹어

위엄 있고 아름답게 장엄하였다.

 

  위의 용머리는 장식이고, 아래의 구름문양의 투각된 부분이 '앙두昻頭'이다.

앙두의 하단을 보면 판벽을 뚫고 들어간 사선의 틈을 볼 수 있다.

내부에서의 하앙은 천장(반자)으로 인해 볼 수 없다.

 

 

 

뒷면 하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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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하앙 

 

극락전의 앞면과 뒷면의 하앙은 사뭇 다르다. 앞면의 하앙이 한 마리의 용으로 형상화한

화려한 기법인데 비해, 뒷면은 아무런 장식 없이 길게 삼각형을 이루며 날카롭게 잘리고 있는

 구조와 기능에 훨씬 충실한 형태다.

 

 

 

 

 앞면 하앙 - 장식적이다                                                       뒷면 하앙- 구조적이다

 

전문가들은  뒷면의 하앙 형태를 임란 이전의 양식, 앞면의 것을 임란 이후의 양식으로 본다.

이렇듯 멀리 백제에 뿌리를 둔 하앙구조가 시대에 따라 변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 글자씩 나누어 붙인 편액  

 

극락전은 편액 또한 흥미 있다. "極*樂*殿" - 이렇게 한 글자씩을 작은 판자에 써서

정면 어간 포벽 위에 나누어 붙였다. 그 이유를 어떤 이는 "화려한 포작과 하앙의 장식성을

편액이 가리지 않도록 배려한 결과"라고 풀이하고, 다른 이는 주심포와 주심포의 첨차 길이가 달라서

생겨난 포벽의 불균형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야 어쨌던

유쾌한 파격이자 예외임에는 변함이 없다.

 

 

잠깐만 ~~! 문득 생각나는 절집이 있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편액도 나누어 붙였다 

 

 

 

 

널판에 그려진 비천상들

 

극락전의 단청 중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출목과 출목 사이의 빈 공간을 판자로 메운

널판(반자널.순각판)에 그려진 주악비천상들이다. 이미 풍화가 심하여 알아보기조차 힘든 것이 많지만,

그런대로 윤곽과 색채가 선명한 것들을 보면 천의자락 나부끼며 하늘을 나는 천녀의 모습이 또렷하다.

 

얼굴은 복스럽고, 색조는 부드러우며, 필선은 자유분망하다.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인다. 어쩌면 극락전 단청의 백미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발

 

장고

 

천도

 

젓대

 

향로

 

비파

 

바라

 

 

 

 

 

 

극락전 내부

극락전 우물반자 천정

 

1981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주도로 화암사에 대한 실측조사와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바가 있는데 그때 우화루와 극락전에서 상량문과 묵서명이 각각 발견되었다.

예의 묵서명에 의해 극락전이 1714년에 단청을 했음이 밝혀졌다. 만일 지금의 단청이 당시의 것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단청 가운데 퍽 시대가 올라가는 데 속한다.

 

세월이 오래 흐르다보니 그 상태는 안팎이 상당히 다르다. 안쪽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무늬와 채색을 거의 온전히 식별할 수 있음에 비해 바깥쪽은 박락(剝落)도 심하고

퇴색도 심한 편이다. 공교롭게도 오히려 이렇게 낡은 단청이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극락전 내부. 보궁형寶宮形 닫집

"닫"은 옛말로 "따로"의 의미이다. 따라서 닫집은 집 속의 또 하나의 집이다.

법당은 단순히 보살 그리고 신중(神衆-신의 무리)들을 모셔놓고 예불을 올리기 위해 만든

기능적 공간만은 아니다. 부처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묘사해 놓은 상징적 공간이다.

 

 

 

 

 

화려한 닫집 내부에는 여의주를 문 우람한 비룔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좌우에는  동자상이 천의를 나붓기며 하늘을 날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광해군 때 주조한 동종(전북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무기 제조에 쓰기 위해  종을 강탈하려는 일본 헌병들이 이 곳 화암사로 몰려올 때

동종이 미리 알고 스스로 울어 스님에게 알렸다고 한다.  스님들이 이 동종을 땅에 묻었다가

해방 후 꺼내어 오늘까지 무사히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적묵당은 두 날개를 가진 ㄷ자 평면의 승방이다. 

 

 

 

안마당 쪽  툇마루는  길손들을 마냥 머물고 싶게 만든다.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한 房門, 들보 위의 꽃병문양이 눈길을 잡는다.

 

 

 

 

몸채와 두 날개채가 교차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뒷마당은

적묵당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유지하는 공간이 된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옛 절집이라면 으례 있게 마련이던 이런 공간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지금, 화암사 적묵당에서

우리는 생활과 밀착된 공간의 고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뒷벽의 튀어나온 부분(벽장인 것 같다)을 보호하기 위해 작은 지붕을 설치했는데,

이와같은 지붕을 '눈썹지붕'이라 한다.

튀어나온 벽의 윗부분이 비에 젖지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어느 장인의 발상이었나!

극락전 풍판을 가위질 하듯 잘라 내어 적묵당 지붕을 살렸다.

 

 

 

 

적묵당의 다른 쪽 지붕은 우화루의 풍판을 자르고...

 

 

 

산신각 山神閣

 

 

적묵당 뒤편은 절로 미소가 나올만큼 아기자기하다. 뒷마당 서편으로는

펑퍼짐하게 자연암반이 퍼져 있는데 그 위에 장독대도 있고 산신각도 있다. 다시 그 뒤로

돌각담이 나지막이 감돌아나간다. 모두 절 크기에 걸맞게 작고 아담하고 야트막하다.

 

산신각은 격식은 모두 갖추느라고 양쪽 박공면에는 풍판까지 달았지만 워낙 집이 작아 꼭 장난감 같다.

흔히 산신각이라면 법당 뒤편 한구석에 있는 듯 마는 듯 자리하게 마련인데 화암사는 그것을

후원으로 끌어 들였다. 장독대에서 그러하듯 정한수라도 한 사발 떠놓고 소원을 빌면

될 만한 곳에 위치하였다.

 

우리네 조상들의 민간신앙이 불교 속에 유입된 모습의 하나가 산신각인데, 화암사 산신각은

그게 다시 민간속으로 환원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적묵당의 굴뚝

 

 

 

철영재

 

극락전과 불명암 사이로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뜻의 철영재(綴英齋) 보인다.

 

 

 

철영재 뒤쪽, 주인 모르는 자그마한 부도가 홀로 외롭다.

 

 

 

화암사 중창비

 

담 밖, 언덕을 오르면 화암사의 내력이 적힌 화암사 중창비가 서 있다.

몸돌의 높이 1.3m, 받침을 포함해도 1.7m가 채 안되는 작은 '대리석 비'이지만

15세기 이전 화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예전 신라의 원효, 의상 두 조사祖師가 중국과 인도를 유력遊歷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願佛이다 

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臺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元曉臺라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이라 하는데, 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중창비의 한 구절이다. 원효스님이 중국에 갔었다거나 의상스님이 인도까지 다녀왔다는

내용 등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나머지 내용은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의상스님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관음상이 남아 있던 것이 틀림없는 듯하고, 의상암은

15세기에는 물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엄연히 존재했다 한다.

그러므로 화암사가 원효와 의상 스님 무렵에 개산되었거나

그 이전부터 이미 존립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참고} 석장(錫杖)
 錫杖은 소리나는 지팡이라는 의미로 대승불교의 스님들에겐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18물 중의 하나이고,

천수천안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지니는 지물로서 널리 유행하였던 법구이다.

 

 

 

 

들리지 않고 그냥 가면 섭섭한 곳이 한군데 있다.

 

 

돌담을 둘러친 화암사 전경 

 

화암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삼국시대 말기쯤인 듯하다. 그 뒤 어느 때부터인가

절이 차츰 쇠락했는지 大德年間( 1297~1307)에 達生이라는 인물이 화주가 되어 절을 중창한다.

그리고 120년 뒤, 아주 기이하게도 이름이 같은 成達生(1376~1444)에 의해 화암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보게 된다. 그는 2품벼슬인 知中樞院事를 지낸 무신으로, 願刹을 삼을 목적으로

시주를 자청하여 1425년 불사를 일으켜 1440년에야 끝을 보게 된다.

 

이때의 중창은 15년이라는 긴 기간만큼 절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규모였던 것 같다.

佛殿은 극히 장려했으며, 그밖에 選僧堂, 祖聖殿, 여러 요사는 물론 부엌, 수각, 측간까지

이전보다 크고 넓게 고쳤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화암사의 골격이 이 무렵에 갖추어진 듯하다.

 

임진왜란은 산중의 작은 절에도 어김없이 깊은 상처를 안겼다. 1597년, 왜병의 침입으로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 극락전은 160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우화루는 1611년에 예전의 모습대로 복구되었다. 그리고 예닐곱 차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다. 절 모습처럼 화려한 각광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조촐한 매무새를

 아주 잃어버린 때도 없는 잔잔한 자취이다.

 

 

 

 

화암사 나들이를 마치려니 문득 '백문절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산에 사는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는 다시 올 날 알지 못하니,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 기울었도다.

 

 

 

화암사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오는 동안 물소리가 동반해 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에는 화암사에 대한 기록과

고려 백문절(白文節,?~1282)의 장편 시가 실려 있다.

 

어지러운 산들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밟기조차 어렵구나.

말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더뎌 나오고, 구름 끝에 보일락 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시내를 타고 있는 정자 벽에는 시가 가득하고, 풍헌의 현판에는 용과 교룡이 꿈틀거리네.

현공玄公이 지은 기문 옛말을 모았는데, 황견유부黃絹幼婦 세상에 드물도다. 

샘물은 비녀다리같이 갈라져서 구슬을 내뿜는데, 문득 오목한 돌 만나 몇 개의 못 이루었네.

백 마리의 고기는 여기서 노닐고, 아홉 마디 창포는 푸른 실처럼 어지럽다.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자 산새들이 모두 놀라 날아가네.

지팡이 짚고 웃고 맞는 것은 참으로 방미(龐眉눈썹. 점잖은 사람)인데,

종남산 엄연한 노인의 풍모로다.

 

흰 옷 입은 신선은 달 가득한 자태인데, 단정히 앉은 높은 담은 八部圍中에 싸였네.

누런 모란꽃은 뜰에 비추고, 작약꽃에 취서시(醉西施, 일종의 작약)도 있도다.

대통으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씻고 양치질 하겠고, 藥圃와 菜田에 가물들면 뿌려도 주네.

부들 자리에 찻잔 두고 말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비로자나불과 해장(海藏,연화세계)을 혓바닥 밑에서 펼처내네.

면마(眠魔.잠귀신)가 찾아오면 항복기 꽂으리니,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지 80년이라.

내가 와서 道를 물으며 스승되기 청하니, 배운 학식 다 털어 주어 헛되이 돌아감을 면했도다.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一萬)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매인 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에 사는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는 다시 올 날 알지 못하니,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 기울었도다.

-백문절의 장편 시 全文-

 

 

 

 

 

출처 : 덕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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