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남 - 만행

낙산대불 - 사천성 성도

마음정원(寂光) 2007. 4. 4. 23:38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다(佛是一座山, 山是一尊佛)"라는 낙산대불. 규모가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불상을 산에 비유하는 것일까? 중국사람 특유의 과장은 아닐까?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보니 전혀 과장이 아니다. 산 절벽 하나를 그대로 깎아 불상을 조각하였다. 대불 전체의 높이가 무려 71m, 머리는 높이 14.7m, 직경 10m이고, 불상의 발 하나의 넓이가 5.5m, 길이가 11m이다. 그 발 위에는 백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고, 발톱 하나에도 한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세계 최대의 석각 불상이다.

산 절벽을 깎아 만든 거대한 불상이지만 엉성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8등신이라는 잣대로 보면 머리가 전체 구도에 비해 다소 커 보이지만 올려다보는 사람들 눈에는 그 거리감으로 전혀 커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특히 눈매가 큰 물줄기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어서 대불 조성 목적에 맞는 얼굴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압도하는 위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좌불상과는 달리 대불은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형태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입식 생활이 불상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불을 처음 만들 때 낙산은 비가 많이 오고, 겨울에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짚은 안개가 끼는 일이 많아 악천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3층의 누각을 조성하여 대불의 얼굴만 보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누각은 송대(宋代)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대불을 보호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보인다.

많은 강우량을 대비하여 나선향의 모발 부분에 배수구를 내어 귀의 뒷면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였고, 또 대불의 정면 가슴 우측에도 배수구를 내어 물이 몸에 흘러드는 것을 막았다고 안내원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러한 대불을 조성한 시기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인 713년에 해통 스님에서 비롯하여 절도사 장구겸경(章仇兼琼)과 위고(韋皐)를 거쳐 90년이 흐른 뒤 803년에야 완성되었다. 해통 스님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원으로 대불을 세울 위치를 찾아 20여년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스님은 현재 대불이 위치한 낙산에 이르러 이곳에 대불을 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곳은 민강(岷江)과 청의강(靑衣江) 그리고 대도하(大渡河) 세 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당시 주요한 수상 교통로였다. 하지만 세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로 배가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다. 스님은 불력으로 이것을 막아보고자 하였다. 이 대불이 완공된 뒤부터 배가 침몰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력이라기보다는 대불을 만들면서 생긴 돌과 흙들이 물에 잠기면서 물살을 약화시킨 것은 아닐까.

이 대불에 만든 해통 스님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 하나. 해통 스님이 전국을 떠돌며 보시를 받아 대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한 지방 탐관오리가 보시 받은 재물을 탐내 그 일부를 뇌물로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때 스님은 "내 눈에 칼이 들어가도 보시 받은 불재(佛財)는 내줄 수 없다"고 하자, 화가 난 관리는 당장 '시험해 보자'고 위협한다.

이에 스님은 바로 두 눈을 그릇에 담아 그에게 주었다. 놀란 관리는 스님 앞에서 참회하고 불상을 세우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그 소문을 들은 백성들도 스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모두들 자기 일처럼 도왔다고 한다.

이 대불 뒤편의 능운사에는 해통 스님이 수련했다는 동굴과 그의 소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소상 밑에는 "자목가 불재득난(自目可佛財難得: 내 눈은 줄 수 있지만 부처님을 섬기는 재물을 얻기는 어렵다)"는 글이 써 있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대불이 워낙 거대하여 대불 앞에서는 그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고, 세 강이 합쳐지는 곳으로 배를 타고 나가야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감할 수 있다. 강물에는 몇 대의 유람선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

대불을 먼저 유람선을 타고 관람한 뒤 능운사를 찾았다. 대불과 이웃하고 있으므로 대불사라고도 불리는 능운사는 능운산에 위치하고 있다. 능선을 따라 만들어 놓은 붉은 빛을 띠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낙산 출신인 곽말약이 쓴 낙산대불(樂山大佛)이라고 약간의 흘려 쓴 현판이 보인다. '불(佛)'자를 '낙산대(樂山大)' 석 자와는 달리 크게 써놓았다. 이곳에 대불이 있음을 강조하려는 그의 뜻을 읽을 수 있다.

능운사는 여느 절과 별 다름이 없다. 하지만 절 주위의 경치가 아름답고 중국을 느낄 수 있어 주위를 둘러본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가 책을 읽었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는 동파루에서 세 강이 합류하는 물 흐름을 보며 대불 조성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능운사의 뒤편에는 높이 35m의 13층 석탑인 영보탑(靈寶塔)이 있다. 영보탑은 중앙은 비어있고, 매 층마다 구멍이 뚫려 있어 안에서 사방을 바라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탑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그 경치가 일품이라 하지만 직접 들어가 볼 수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기고 발길을 옮긴다.

주위에는 불국천당(佛國天堂)이라는 근래에 신축한 사찰을 비롯하여, 소동파가 그렸다고 하는 벽화 그리고 산기슭에는 중국을 느낄 수 있는 건물들이 많아 이국적인 느낌을 받는다. 또한 절 주위에 놓인 휴지통의 모습에도 눈길이 갔다. 휴지통 하나에도 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 놓은 점이 인상 깊다.

대불을 보면서 중국인들은 거대함을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지만 그보다 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핍박받고 있는 시점에서도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한 대불을 세웠던 점에서 그 따스함이 와 닿는다. 그 따스함이 있기에 낙산대불이 1994년 유네스코에서 아미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닐까.


 

다음 신지식에서 소래미님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