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참선법(1) - 禪의 의의

마음정원(寂光) 2006. 7. 11. 12:11
선(禪)을 선이라 하면 곧 선이 아니요, 도(道)를 도라하면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선(禪)과 도(道)는 언어문자와 일체명상(一切名相)이 끊어진 자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또 禪이 禪이 아님이 아니요, 道가 道 아님이 없다. 禪과 道는 취할 바도 못되고 버릴 바도 못되는 것이다. 禪이라고 하는 것을 여의고는 별로 禪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禪이면서 곧 禪이 아니요, 禪이 아니면서 곧 禪이 되는 것이 이른바 禪이다.

이와같이 禪의 오묘한 뜻을 범상한 말로 나타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禪은 범인이 알 수도 이를 수도 없는 그런 곳에 있는 초월적이며 초현실적인 것일까. 진정 禪이란 무엇이며, 또 禪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가) 의의

참선(參禪)이라 함은,

넓게는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아나파나삿티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생사를 해탈하기 위한 불교의 모든 수행법을 통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좁게는 인도의 명상수행법을 중국의 선종에서 발달시킨 조사선(祖師禪)의 수행법을 말합니다.

參禪은 참구(參究)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參)과 선(禪)이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참구(參究)는 논리와 사량분별을 떠나 체험과 직관에 의해 파악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禪이란 범어로 드야나(Dhyana)인데 이를 음사해서 한자로 선나(禪那), 다시 줄여서 선(禪)이라 합니다. 그 뜻을 해석하면 고요히 생각함(靜慮), 또는 생각하여 닦음(思惟修)입니다.

또한 참선은 "禪하는데 참여한다"는 뜻과 "참례선지식(參禮善知識)하여 문선(問禪)한다"하는 뜻을 포함하여 "參禪"이라고도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곧 선지식을 찾아 묻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고락(苦樂)의 양 극단을 피하고 중도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수행법을 중국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맞게 중국의 선종에서 발달시킨 조사선(祖師禪)의 수행법으로서 논리와 사량분별을 떠나 체험과 직관에 의해 마음을 닦는 수행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나) 기원


禪은 B.C. 3000년경, 인더스 문명(lndus civilization)의 유적지 모헨조다로(Mohen jodaro)에서 출토된 유물인 인장(印章)등에 새겨진 요가의 좌선상(坐禪像)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불교 이전에도 인도 수행자들 사이에서 요가(搖加, Yoga)란 이름으로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요가는 범신(梵神)의 본성과 일체화됨으로써 하늘에 태어나는 데 목적이 있는 데 반해, 禪은 산란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진리를 직관하여 지혜를 얻어 해탈, 대자유를 얻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 유래

선(禪)의 유래는 영산회상에서부터 비롯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백만억 대중에게 법을 설하실제 대범천왕(大梵天王)이 꽃비를 내려 공양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꽃을 하나 들어 보이시니 오직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으실 뿐 이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습니다. 이를 염화시중의 미소(靈山會上 擧拈化示衆)라고 합니다.

또 부처님께서 다자탑전에서 법문하고 계실 때 법석에 늦게 참여한 가섭존자를 불러 자리를 나누어 대중 앞에 앉으셨는데 이를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座)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입적하시자 대중교화를 마치고 늦게 돌아온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관을 세번 돌고 세번 절하매 관 밖으로 두발을 내 놓으셨는데 이를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라고 합니다.

이 세가지 사건을 선종에서는 삼처전심이라고 하여 선(禪)의 유래가 되었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敎)가 되었습니다. 곧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선(禪)과 교(敎)의 근원은 세존이시고, 선(禪)과 교(敎)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니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선(禪)이고, 말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교(敎)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