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상 편암, 높이 83㎝ 시크리 출토 2~4세기 라호르박물관 |
|
(본 전시의 출품작은 카라치국립박물관 소장의 석고 복제품임) 석가모니는 출가 후 처음에는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진리를 찾기로 결심하고,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하듯이 고행(苦行)의 길로 들어섰다. 그 중에는 단식 고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철저한 단식 고행으로 그의 몸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졌다. 뼈와 가죽만이 남아 힘줄이 드러나고, 뱃가죽은 등에 닿았다. 그의 고행은 같이 수행하던 사람들도 경탄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러한 맹목적인 고행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올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수자타라는 소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먹고 고행을 풀었다. 그렇게 해서 기운을 차린 그는 조용히 명상에 들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고행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세속적, 육체적 향락을 버리고 집을 떠난 태자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거친 하나의 과정으로서 고행은 석가모니의 마지막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간다라의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고행상을 즐겨 만들었고, 지금도 여러 점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라호르박물관에 소장된 고행상은 가장 잘 알려진 예이며, 흔히 간다라 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상이다. 이 상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의 석가모니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몸은 여 윌 대로 여위어 갈비뼈가 앙상하게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해부학적으로 매우 정확한 재현이라고 한다. 조각가는 당시에 이와 같이 단식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의 모습을 매우 자세히 관찰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상은 어떤 면에서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허기지고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이른 단식 고행자의 모습이라고 보기에, 이 상은 자세가 너무 꼿꼿하고 눈의 광채도 예리하게 살아 있다. 가죽 위에 드러난 힘줄 하나 하나에도 긴장감이 흐르는 듯하다. 이 상에 표현된 석가모니는 육체와 감각의 구속에 맞서 싸우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거의 영웅적인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와 같은 석가모니 고행상은 인도 본토에서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고, 간다라 미술 특유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충실한 재현을 강조한 서방 고전미술의 이상이 육신을 부정한 초기 불교의 이상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탄생한, 불교미술사에서 손꼽힐 만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상은 석고로 제작된 복제품으로 원래의 상에 매우 근사(近似)한 모습을 전해 주고 있다. |
마왕의 공격 편암, 높이 38.7㎝ 스와트 출토 1~2세기 페샤와박물관 2765 |
|
육체를 괴롭히는 극단적인 고행이 해탈에 이르는 방법이 아님을 깨달은 석가모니는 고행을 중단하고, 보드가야의 나이란자나강에서 목욕을 하여 몸을 정갈히 한 후 보리수 아래로 가서 결가부좌를 하고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이때 마왕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이 위축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번에 걸쳐 갖은 방법으로 붓다의 깨달음을 막으려 하였다. 회유해 보기도 하고, 딸들을 보내서 유혹해 보기도 했으나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침내 마왕은 군대를 이끌고 붓다를 공격해 왔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지신(地神)을 불렀다. 그러자 땅이 여러 방향으로 흔들리면서 지신이 땅에서 솟아 올라 붓다의 뜻을 증명했고, 마왕의 군대는 패퇴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통 불전 미술에서는 이 항마(降魔)의 장면이 붓다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 부조에 표현된 것은 바로 이 항마성도의 장면이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우슈니샤가 크고 높게 솟아 있고,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며, 수염이 분명히 표시되어 있는 것은 간다라의 초기 불교미술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특징이다. 붓다는 오른손으로 땅을 짚어 자신을 부르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마왕이 칼을 뽑아 붓다를 해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도해한 다른 부조들에서는 마왕과 함께 많은 마군(魔軍)의 병졸들을 표현한 경우가 있으나, 여기서는 마왕과 그 뒤의 종자(從者)만이 표현되어 있다. 붓다가 땅을 짚어 지신을 부르자 마군은 패퇴하여 붓다의 대좌 앞에 고꾸라져 있다. 다른 부조들에서는 실제로 지신이 출현하는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화면의 오른쪽에서는 패퇴한 마왕과 그 수하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
첫 설법 천매암, 높이 48㎝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출토 2세기 탁실라박물관 Dh. 13-69 |
|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몇 주 동안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즐겼다. 그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의 내용이 너무 심오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였지만, 범천의 간청으로 법을 설할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이전에 함께 고행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바라나시 교외의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향하였다. 녹야원에 도착하여 붓다는 다섯 사람의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초전법륜이라고도 한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돌렸다는 의미이다. 이 부조에서 붓다의 첫 설법은 문자 그대로 붓다가 수레바퀴를 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오른쪽에 붓다가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 수레바퀴는 기둥 위에 올려져 있는데, 수레바퀴 아래에 삼보(三寶)를 위미하는 세 개의 갈고리가 달린 상징이 있고, 그 아래에 연꽃과 낮게 깔린 형상의 인도.코린트식 기둥이 있다. 이 법륜의 기둥 양쪽에는 사슴이 한 마리씩 앉아 있어 이 장소가 사르나트의 녹야원임을 알려준다. 붓다의 왼쪽에는 첫 제자인 다섯 사람의 비구 가운데 두 사람이 앉아서 붓다의 설법을 경청하고 있다. 반대편에 나머지 세 사람의 비구가 있었을 것이나 그 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두 사람의 비구 위쪽에는 바즈라파니와 범천이 있다. 바즈라파니는 오른손에 차우리(vauri, 拂子)를 , 왼손에 긴 바즈라를 들고 있다. |
독룡이 든 발우를 보이는 붓다 편암, 31*39cm 탁실라 출토 2~4세기 카라치국립박물관 G25 |
|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한 붓다는 다시 마가다국을 방문하였다. 마가다국의 우루벨라 마을에는 불을 섬기는 가섭 삼형제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존경을 받고 있었다. 붓다는 우루벨라 가섭을 찾아가 사당에서 하룻밤 자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가섭은 사당에 불을 지키는 무서운 독룡<코브라>이 살고 있다며 거절하였다. 여러 번의 간청 끝에 허락을 받고 사당에 들어간 붓다는 신통력으로 독룡을 항복시키고, 다음 날 독룡을 발우에 담아 가섭에게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많은 신통력을 보임으로써 붓다는 가섭 형제들과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을 감화하여 삼보에 귀의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를 표현한 이 부조에서 왼쪽에 붓다가 왼손에 발우를 들고 서 있다. 발우에서는 붓다에게 조복된 독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 옆에 몸을 구부리고 서 있는 두 인물이 가섭과 그의 형제이다. 고행을 해서 수염이 길고 몸이 마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세 형제 중 나머지 한 명은 파손된 왼쪽 부분에 조각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붓다의 왼쪽에는 금강저를 든 바즈라파니가 시위(侍衛)하고 있다. 뒤에 서 있는 여러 인물들은 가섭의 제자들로 보인다. |
브라흐만들 편암, 36.5×51㎝ 말라칸트 출토 2~3세기 스와트박물관 MK18 |
|
머리를 묶고 물병을 든 네 명의 브라흐만 수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놀라움, 혹은 번민에 찬 듯한 자세로 오른쪽으로 향해 서 있다. 이들은 붓다가 우루벨라 가섭을 교화하던 당시 가섭 형제들과 그의 무리들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
난다의 출가(?) 녹색 편암, 14×25㎝ 스와트의 니모그람 출토 2~4세기 스와트박물관 NG414 |
|
성도 후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던 붓다는 석가족의 간청을 받아들여 고향인 카필라성을 방문하였다. 그 때 아들인 라훌라, 사촌인 아난다와 아니룻다, 데바닷타, 이복동생 난다 등 석가족의 많은 지체 높은 젊은이들이 붓다를 따라 출가하였다. 그 중에 ss다가 출가한 것은 그의 결혼 날이었다고 한다. 그날 석가모니는 궁성으로 들어와 혼례 준비를 하고 있던 난다에게 발우를 주고 그 자리를떠났다. 당시에는 붓다나 제자들로부터 발우를 받으면, 거기에 음식을 채워서 돌려 드리는 것이 법도였다. 그래서 난다는 어쩌지 못하고 발우를 들고 석가모니를 따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거처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난다도 머리를 깎고 출가하도록 하였다. 궁전에 두고 나온 아름다운 아내를 생각하며 번민하던 난다는 몇 번이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결국은 마음을 잡고 수도 생활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이 부조에는 가운데에 붓다가 서 있고 그 왼쪽에 붓다를 향하여 발우를 들고 있는 ㅅ람이 있다. 그 왼쪽에는 붓다를 향하여 문앞에 한 사람이 비탄에 젖은 듯한 자세로 앉아서 뒤에 있는 사람의 위로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조가 정확히 난다의 출가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명확히 난다의 출가의 도해임을 알아 볼 수 있는 부조들에는 흔히 발우를 든 인물, 비탄에 젖어 머리를 깎는 인물 등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이 머리를 깎고 있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의문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난다의 출가로 이 장면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고 세부도 많이 손상되었지만, 깊게 새긴 조각 수법과 세장한 인체표현 등은 니모그람의 사원지에서 출토된 유물들 특유의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우디야나왕의 첫 불상 편암, 30.5×42.5㎝ 사흐리바흐롤 출토 3~4세기 페샤와박물관 2818 |
|
붓다가 어머니께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도利天)에 머무르고 있을 때,카우샴비국의 우디야나왕(Udyana, 優塡王)은 붓다를 그리워하여 전단향목으로 불상을 만들고, 뒤에 도리천에서 돌아온 붓다에게 이 불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불상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전설이다. 이 전설을 도해한 것이 이 부조이다. 중앙에 사각 대좌 위에 편단우견 복장의 붓다가 앉아 있다. 그 왼쪽에 선정인을 취한 작은불상을 들고 있는 사람이 우디야나왕이다. 그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자루 속의 꽃을 꺼내거나, 꽃을 던지며 이 사건을 경축하고 있다. 가운데의 붓다는 설법인을 취하여 마치 첫 불상의 조립(造立)을 승인하고 있는 듯하다. 동심원상의 무늬처럼 표현된 머리카락, 두 줄의 선으로 된 옷주름 등이 이 부조가 시대가 내려감을 알려준다. |
술 취한 코끼리의 조복 편암, 15.3×38.7㎝ 출토지 미상 2~4세기 다르박물관 204 |
|
석가모니 붓다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진리를 펴 나갔지만, 그를 위해(危害)하려는 시도 또한 없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일찍부터 붓다를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의 사촌 데바닷타는 붓다를 없애기 위해 자객을 보내기도 하고, 산 위에서 바위를 굴리는 등 갖은 계책을 썼다. 붓다가 완사성에 머무르던 때, 그곳에는 날라기리(Nalagiri)라는 사나운 코끼리가 있었다. 데바닷타는 그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탁발하는 붓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코끼리는 성안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고 집어 던지며 날뛰었다. 그러나 코끼리는 붓다가 다가가자 갑자기 얌전해 지면서 붓다를 향해 무릎을 꿇고 경베를 올렸다. 그리하여 붓다를 해치려던 데바닷타의 기도는 또 한번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부조의 좌측면에 이 이야기가 표현되어 있다. 왼쪽에 성문을 통해 코끼리가 나오고 있고, 붓다는 왼손을 들어 코끼리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붓다의 뒤에는 바즈라파니가 서 있다. 우측면에는 중앙에 붓다가 발우를 들고 서 있고, 그 우측에 어린아이 두 면이 합장 자세로 붓다에게 경배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아쇼카왕이 전생에 흙을 보시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
경전에 관해 의논하는 승려들 편암, 41.4×32.3㎝ 스와트 출토(스와트의 왈리 舊藏) 1~3세기 스와트박물관 WS171 |
|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한 사람의 승려가 서서 경전을 들고 있다. 그 앞에는 다른 승려가 한 사람 앉아 있는데, 서 있는 승려가 앉아 있는 승려에게 경전을 바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 경전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명의 승려 외에 세 명의 승려가 앉거나 서 있고, 세 사람의 재가자, 혹은 천인이 그 둘레에 서 있다. 오른쪽 위에는 보리수로 보이는 나뭇가지들이 우거져 있는데, 이 나무는 오른쪽으로 더 전개되고 있었던 듯하다. 그 아래에 원래 붓다가 앉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부조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승려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다라의 불전 미술에서 손꼽힐 만한 매우 특이한 장면이다. |
붓다와 브라흐만들 편암, 37.2×60.7㎝ 스와트 출토(스와트의 왈리 舊藏) 1~3세기 스와트박물관 WS217 |
|
중앙에 붓다가 왼쪽을 향하여 서 있고, 오른쪽에 바즈라파니와 승려들이 붓다를 따르고 있다. 왼쪽에서 붓다를 대면하고 있는 것은 머리를 묶고 편단우견의 차림새를 한 브라흐만들이다. 이 가운데 맨 앞의 브라흐만은 물병과 장대를 들고 있었고, 그 다음의 브라흐만에서도 물병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오른손을 앞으로 들어 붓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거나 청하고 있는 것 같은 자세이다. 붓다와 첫브라흐만 사이에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은 꽃을 뿌리려는 모습이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인물들의 표정이 매우 특색 있다. |
브라흐만 천매암, 높이 23㎝ 스와트의 붓카라 제1유적 출토 1~3세기 스와트박물관 3122 |
|
병을 든 브라흐만 수행자의 모습이다. 원래 대형 불전 부조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
대열반 편암, 27×33㎝ 출토지 미상 2~4세기 페샤와르박물관 2826 |
|
성도 후 40여 년 동안 여러 도시를 돌며 가르침을 전하던 석가모니 붓다는 80세 되던 해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娑羅雙樹) 밑에서 제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명반에 들었다. 이 부조는 둘레의 여러 부분과 표면에 많은 손상이 있지만, 스승을 잃은 제자들의 비통함을 잘 보여준다. 붓다는 침상 위에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다. 침상에 덮여 있는 천의 무늬와 침상의 다리가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침상의 왼쪽에는 붓다를 그림자 같이 따라다니며 시위(侍衛)하던 바즈라파니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서 있다. 침상의 아래쪽에는 승려 세 사람이 깊은 슬픔에 접은 채 앉아 있다. 붓다의 뒤쪽에는 세 사람의 재가신도들이 붓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손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모습은 근심 또는 비탄을 상징하는 자세이다. 손상이 심하지만, 인물들의 표정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부조의 위쪽 좌우에는 각각 나무가 한 그루씩 있으나 파손이 심하다. 좌측의 나무 안쪽으로 여인의 상반신이 보이는데, 나무의 여신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
붓다의 관과 슬퍼하는 제자들 편암, 18×31㎝ 출토지 미상 2~4세기 가라치국립박물관 1968-683 |
|
네 사람의 승려가 붓다의 관을 둘러 싸고 붓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왼쪽의 승려는 오른손을 머리에 대고 비탄에 젖어 있고, 오른쪽의 승려는 관을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듯 하다. 관 뒤쪽에 있는 속인 복장의 두 인물은 두 팔을 들고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화장 편암, 20×30㎝ 말라칸드 출토 3~4세기 가라치국립박물관 1901 |
|
붓다가 열반에 든 후 그의 시신은 당시의 장법(葬法)에 따라 화장되얶다. 이 부조의 오른쪽 정면은 그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항아리가 달린 장대를 들고 기름을 불길에 붓고 있다. 왼쪽 장면에는 수습된 사리를 항아리에 담고 천으로 덮어, 지키고 있다. |
사리의 운반 천매암, 29.2×29.2㎝ 출토지 미상 1~3세기 이슬라마바드박물관 |
|
사리를 나누어 받아 가지고 자신의 나라로 향하는 모습이다. 코끼리를 탄 앞사람이 정성스레 두 손으로 사리기를 들고 있다. 그 앞뒤에서 속인 복장의 사람들이 입으로 휘파람을 불며 기뻐하고 있다. 코끼리도 코를 올리고, 발을 경쾌하게 옮기면서 기쁨을 표시한다. |
불탑의 숭배 편암, 24×53.5㎝ 말라칸드 출토 2~4세기 스와트박물관 MK13 |
|
여덟 나라로 옮겨진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각각 스투파가 만들어졌다. 이 부조의 오른쪽에는 사리를 운반해 오는 장면이 있었으나 거의 깨어졌다. 왼쪽에는 불탑의 건립을 기념하는 있다. 불탑의 좌우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는데, 불탑의 사방에 세워졌던 기둥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불탑의 좌우에는 각각 두 명씩의 승려가 있다. 불탑 우측의 승려는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사리기 혹은 무슨 용기 같이 보인다. |
불전이 조각된 하르미카 편암, 24×24×13㎝ 스와트의 붓카라 제1유적 출토 2~3세기 스와트박물관 6447 |
|
인도 스투파에는 복발부의 정상에 기둥(yasti)이 꽂히고 그 위에 산개(傘蓋, chattra)가 올려졌으며, 그 기둥 둘레에 울타리가 둘러졌다. 이것을 하르미카(harmika)라고 하는데, 간다라의 스투파에서는 하르미카가 종종 불전 장면들로 장식되었다. 이 하르미카에는 사방에 각각 탄생, 출성, 범천의 설법 권청(勸請), 첫설법이 시계방향으로 새겨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첫 설법 장면에 붓다 대신 세 개의 법륜이 달린 기둥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둥의 둘레에는 다섯 명의 비구가 경배하고 있다. 이 것은 무불상 표현이라기 보다 붓다가 설한 법(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양식적으로 사이두 스투파에서 출토된 부조(도판 80)와 매우 흡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
아치 아래의 두 남자 편암, 19×19㎝ 출토지 미상 2~4세기 카라치국립박물관 1349 |
|
차이티야형의 아치 아래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왼쪽의 인물은 왼쪽을 향하여 오른손을 펴 들고 오른쪽의 인물에게 무엇인가 권하거나 지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인물은 손을 앞에서 모아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꽃처럼 보인다. 두 인물의 복장은 보살상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가자의 복장이다. 특히 왼쪽 인물의 머리 모양이나 의복은 싯다르타 보살상이나 미륵보살상의 복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머리 뒤에 두광(頭光)이 없는 점은 이 상이 그러한 보살을 나타낸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한다. 보살이 아니라 천인일 나타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조는 원래 좌우로 이어진 이보다 훨씬 큰 부조의 일부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연결되는 부분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장면의 주제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
꽃을 던지는 사람들 편암, 17×16㎝ 출토지 미상 2~4세기 카라치국립박물관 1347 |
|
앞의 부조와 거의 동일한 차이티야형의 아치 아래에 두 남자가 서 있다. 여기서 왼쪽의 인물은 오른손을 들어 왼쪽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는 자세이다.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자루 안에 꽃을 담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인물은 왼쪽에 있는 누군가에게 꽃을 던지며 공양하고 있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
'불교의 이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선법(1) - 禪의 의의 (0) | 2006.07.11 |
---|---|
무심 [無心] (0) | 2006.07.11 |
간다라미술을 통해 본 부처님 생애(1) (0) | 2006.06.29 |
공(空) 이란..? (0) | 2006.06.12 |
"초기불교수행, 팔정도 실천하는 삶" (붓다뉴스) (0) | 2006.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