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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산동성 청도)

마음정원(寂光) 2005. 9. 30. 13:45
힘차게 달리고 있는 중국    

2004년 5월 22일(토요일) - 제 1일차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주최로 중국 산동성에 대한 해외 연수를 가게 되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에 중국여행이라서 들뜬 기분이다. 5월 22일 아침에 산동성 여행을 위한 행장을 꾸린 후 학교에 출근해서 오전 업무를 마치고 교장 선생님과 많은 선생님들의 환송을 받으며 중국으로 향했다. 아내가 제2 인천 국제항까지 픽업해 주었다. 33명의 인천시 소재 초중고 교감선생님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들뜬 마음으로 중국 여행에 대한 주의 사항을 들으며 나는 이번 여행을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번 중국 여행이 처음이 아니지만 항상 여행이란 어느정도 긴장과 기대심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우리 일행은 위동 페리에 승선했다. 'New Golden Briege 5'라고 하는 이 배는 국내 최대의 배로서 3만 톤급의 대형 유람선으로서 길이가 186m 가 넘고, 승객을 656명이나 태울 수 있다.

 선실에는 각종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데, 노래방, 면세점, 레스토랑, 목욕탕, 카지노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16시간 이상을 타고 가야 하는 먼 길이기에 나는 멀미 예방을 위하여 멀미 팩을 귀 밑에 붙였다.  조금 가슴이 울먹이는 것을 느꼈다.

 선상에서 저녁으로 꼬리곰탕을 맛있게 먹었다.  저녁 후에 간단한 개영식을 끝낸후 도림고  장순봉 교감과 함께 이번 여행을 위한 자축의 맥주를 함께한 후 멀미를 이기기 위하여 영화를 보았다. '블랙호크 다운' 이라는 영화를 1천원씩 내고 보았다.  영화가 끝난 후 11시 경에 침대칸에서 잠을 잤다. 비교적 편안한 잠자리였다.


선상에서 본 아름다운 낙조

  우리가 여행할 산동성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다.

 

  위치는 북위 34도-38도 사이로서 인천과 동일한 위도 상에 위치하고 있고, 북으로 하북성, 서로 하남성, 남으로 안휘성 및 강소성과 인접해 있다.  면적은 15.7만㎢ (중국 전체면적의 1.6%)으로서 한국(북한 제외)의 1.5배 크기를 자랑한다.  1998년 통계에 의한 인구는 8,838만 명(중국 총인구의 7.2%, 하남성에 이어 2위)이다.


배 위에서 찍은 청도항구 모습

 그러나, 중국 당국도 중국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고 한다.  "1人1兒法" 때문에 남아선호 사상이 심한 중국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그 딸들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는 일이 아주 많아서, 유령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모른다고 한다.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한다.

 
체질화된 중국인들의 기공체조하는 모습들

 산동성은 평원 55%, 산지 및 구릉지 28.7%, 하천 및 호수 8.5% 기타 7.8% 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끝없이 펼쳐지는 대 평원 지대이다.  밀을 주로 경작하고 있고, 우리가 중국을 방문한 5월은 한창 밀을 거두는 시기이다. 밀을 거둔 다음에는 옥수수릃 재배하는 2모작을 한다. 산동성은 토질 때문에 벼 농사는 안되고 밀 농사와 과수원 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밀 밭의 고속도로 주변에는 미루나무를 심도록 당국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도 가도 끝없는 미루나무 숲이다. 우리나라는 미루나무를 심지 않아야겠다.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이니까....

 
2층버스                              작은 북을 이용한 군무 경연대회 모습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도에서 14도(한국과 유사하나 혹한과 혹서가 비교적 없는 편이며 강우량은 한국의 3분의 2정도임)로서 우리나라에 비해 비가 적고, 온난한 기후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4개 시, 33개 현급시, 3개 지구(44개 구, 62개 현, 2,383개 향진)으로 제남(省都), 청도, 치박, 유방, 연대, 위해, 제녕, 임기, 덕주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엄청나게 큰 배 안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생각보다는 멀미도 없고 편안한 잠자리였다.

 5월 23일(일요일) - 제 2일차

  NGB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을 때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16시간의 장거리 승선치고는 괜찮은 밤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침은 된장국으로 속을 달랜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산동성에 있는 청도에 도착했다. 


청도항 모습

오늘은 주일이라서 그런지  입국 수속이 무척 느렸다. '만만디'가 중국 첫날부터 우리를 애타게 했다. 우리들을 무려 한 시간 이상이나 기다리게 하는 그들의 만만디 행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입국을 한 우리는 기다리고 있던 고속버스에 올라타고 조선족 처녀 가이드인 박영옥씨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잔교로 이동했다.  잔교는 1891년 청나라때 이홍장 대신이 청도에 와서 순찰한 적이 있는데, 그 배가 대형 선박이라서 큰 배를 정박시키려고 임시로 지은 항구가 지금까지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잔교의 원형이다.  

당시에는 화물 선착장이었으나 독일 조차지때 소항, 대항과 더불어 점차 유람지로 변모한 곳으로 현재의 잔교는 1931년 국민당정부에 의해 복원되었다. 시정부가 잔교 남쪽 끝을 보수한 이후 '비가회란'이라 불리며 '칭다오 10경'으로 꼽히고 있다.

  잔교의 전체 모양을 멀리서 보면 중국어'介(개)'자와 같다. 이는 외국 침입에 대한 방어의 상징인 '창'모양을 의미한다. 폭 8m, 길이 433.85m의 철근 콘크리트 교각에는 24개 붉은색 기둥 위의 회색 기와가 둘러진 2층 팔각정 회란각이 있다. 내부에는 칭다오 백년사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회란각 앞에는 모터보트 선착장이 있으며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소청도가 보인다. 북쪽으로 중산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잔교를 구경하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 왔다. 우리들은 잔교를 구경하기보다는 중국 사람들을 마음껏 구경했다. 잔교 주변에는 많은 청도의 해수욕장이 있다. 특히 청도의 겨울 날씨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조금 덥다. 여름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많다. 청도의 제1 해수욕장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 중의 하나로 하루에 35만 명이 동시에 수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도 사람들은 수영을 '세해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해수욕을 한다는 말과 동시에 '만두 끓이기' 라는 의미도 있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잔교를 뒤로 하고 버스를 타고 독일 총독 관저로 향했다.  

 이곳의 교통질서는 엉망진창이다. 중국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운전을 하는 것 같다. 중앙선은 우리들의 생명선과 마찬가지 인데  이곳은 중앙선을 무색하게 한다. 수시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달리는 자동차, 오토바이, 사람들, 마차들이 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서로 먼저 가겠다고 머리만 들이 밀며 대드는 통에 아찔하지만 사고가 없이 그런대로 소통되는 것이 신통방통할 뿐이다. 만약 사고가 나더라도 조용히 앉아서 서로 담배를 주고받아 피우며 경찰이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고 한다.  이것이 대국정신 = 만만디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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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게 우리들의 버스는 독일 총독부(悤督府)관저에 도착했다. 독일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건축한 웅장하고 화려한 총독 관저를 구경하면서 식민지였던 중국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독일 총독 관저 서쪽의 덕현로(德縣路)에는 붉은색의 큰 십자가를 높이 세운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유명한 청도 천주교당이다. 천주교당은 1930년대에 건설되었는데 청도에서 제일 큰 고대식의 건축물인 동시에 기독교 건축예술의 걸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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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는 5.4광장을 구경했다. 5.4광장은 시정부 남, 향항중로(香港中路)와 동해서로(東海西路)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조각, 분수가 건설되어 있고 사계절 꽃과 나무들이 재배되어 있어 동부의 새로운 유람중심이다.

  이 운동은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제1 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동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文學革命:1917)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 5·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항하였는데 텐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不買)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우리나라의 3·1운동에 크게 고무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어 그 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5.4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잘 꾸며진 무대에서는 여자들의 군무 경연 대회(우리나라의 농악과  비슷)가 벌어지고 있었고, 잔디밭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5.4광장 한 복판에는 붉은 색의 5.4운동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청도를 구경한 우리 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서 치박시로 이동했다. 치박시는 역사가 유구하며 관광문화자원이 풍부하다. 동부의 임치는 춘추 5패의 으뜸으로 뽑히는 제나라의 수도였고 18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제문화의 발원지이다.

  여기는 문물고적이 많아 지하박물관의 칭호를 가지고 있다. 동주순마갱, 고차박물관, 강태공사, 관중묘, 안영묘 등이 유명하다. 중부이치천은 〈요재지의〉에서 나오는 포송령의 고향으로서 포송령 옛집, 요재원 등이 있다. 도자기, 유리, 실크는 치박의 특산물이다.


우리나라의 장기와  똑같다.  

 치박시를 흐르는 치구하(淄區河)에 인접해 있는 임치구의 동주 순마갱에 갔다. 이곳에는 순장된 말이 600필이나 된다. 이는 서안 진시황 병마용보다 100여년이나 더 오래되었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약 84m를 발굴했는데, 양쪽으로 늘어서서 매장된 228필의 순장된 말을 발견했다. 이 터의 길이와 깊이 등을 따져 계산해 볼 때, 약 600필의 말들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순장된 말들의 유골 모습                       순장된 말과 마차들

 <<좌전·노양공이십오년>>이라는 기록에 의거해 볼 때, 이곳은 춘추시대의 최씨라는 왕의 묘지 터로 추정되는데 순마갱의 규모를 통해 당시 세력의 규모와 동시에 제국국력의 강성을 알 수가 있다.  똑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말들의 유골을 보면서 거대한 중국의 힘을 보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말들을 묻으면 그 모습들이 각양각색일 터인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똑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최아무개라는 왕은 생전에 너무나 말과 마차 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극락(?)에 가서도 말과 마차를 타려고 했나보다.  순마갱을 경탄의 눈으로 관람한 후 밖으로 나오니 중국 사람들이 여유롭게 장기며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순마갱 바로 옆은 광활한 밭들이 있었는데 비닐 하우스들이 많았다. 특이하게도 이곳의 비닐 하우스는 북쪽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나라는 비닐하우스를 철근으로 만드는데, 좀 특이했다.
비닐 하우스 옆의 곡식은 밀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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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일행은 'Qibu Century Plaza'(齊都大酒店) 호텔에 투숙한 후 맛있는 중국식 음식을 먹었다. 주로 돼지고기를 이용한 진한 향요리에 놀란 입맛을 독한 배갈로 달랬다.  내 룸 메이트는 부일중 양회용 교감선생님이다. 신사도가 물씬 풍기는 풍모를 가지신 멋쟁이 교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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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4일(월) - 제 3일차

  한국과의 시차가 한 시간이라서 너무 일찍 일어났나보다. 새벽 4시 40분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치박시의 풍경을 15층의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서 찍고 있을 때 갑자기 축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시민들의 단잠을 깨웠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아침 일찍 결혼식을 올린 곳에서 터뜨린 축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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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음식값 - 3,900원                    오른쪽 음식값 - 2,400원

  룸메이트와 함께 호텔 옆에 있는 공원에 산책을 했다. 한창 공사 중인 공원 한 쪽에는 할머니들이 칼춤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남편들인 듯한 할아버지들이 기공 체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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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이용한 기공 모습              맨 손으로 하는 기공 모습

  호텔에서 뷔페식의 중국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우리들은 강태공 묘를 찾아갔다.  강태공은 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보통 "강태공"이라고 불리는 태공망 "여상"은 서백 창에 의해 등용되어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었다. 여상은 젊어서는 공부에만 힘쓰고 집안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늘 그런 상태이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이런 남편을 바라보고 살다가 마침내 지쳐 달아나고 말았다.  한편 인재를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서백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위해 점을 쳐 보았다. 점괘는 대길이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교룡도, 범도 아니다. 얻는 것은 왕을 보좌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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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백은 내심 기뻐하며 이리저리 달리며 사냥을 했다. 그러나 이날 따라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수레는 어느새 위수 가에 다다라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한 노인이 홀로 앉아서 낚싯줄을 던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노인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못 본 척하고 낚시질만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서백은 그 노인이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그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곁에 가서 말을 걸어보니 놀랍게도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 노인은 바로 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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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조부인 고공단보께서는 세상을 뜨기 전에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 나를 도와 주나라를 번창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다.

 마침내 서백은 여상을 스승으로 받들었고, 여상은 서백을 도와 주나라를 위해 일하여 마침내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여상은 주 문왕의 조부(고공단보)가 기다리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이라고 불려 졌으며, 그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후세 민간에서는 모두 그를 "강태공"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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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좌상                                     손자병법의 손무 입상

  주나라가 세워진 후 은 왕조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이 컸던 태공망은 "제"땅에 봉해져 제후가 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제"는 특히 태공망의 고향이었으므로 금의환향하는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착잡함이 엇갈리고 있었다. 지난날의 수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자신을 돌보다가 견디지 못해 달아난 부인에 대한 감정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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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공망이 부임하니 주위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길을 내주었다. 그런데 초라한 늙은 여인의 모습이 태공망의 눈에 띄었다.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바로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부인이었던 것이다. 태공망 여상은 시종을 시켜 그 여인을 수레 앞에 대령시켰다.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모르는 여인에게 태공망은 말했다.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시오." 그 여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후로 부임된 휘황찬란한 남편의 모습을 보고 여인은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아내로 맞아 달라고 애원했다.

 태공망은 시종을 시켜 물을 한 그릇 가져오게 한 후 땅바닥에 그릇의 물을 쏟고는 말하였다. "한번 엎질러진 물이 다시 그릇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가 없는 법이오."

 태공망 여상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고, 여인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길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있는 강태공의 묘를 관람 한 후 우리들은 다시 태안시를 향해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3시간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도중에 2층 버스를 보았다. 무려 14시간 이상씩 운행을 하기 때문에 모든 좌석이 침대칸으로 되어 있었고 운전수도 2명이 교대로 운전을 한다고 한다.

  중국의 군인들은 우리나라와 같은 국민 개병제가 아니다. 오로지 희망자만 군대를 간다. 군대를 지원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진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대 후의 취직을 목적으로 간다고 한다. 군에서 제대를 하면, 경찰이나 공무원으로 취직하기가 쉽단다.

 산동성의 고속도로는 대우건설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들 눈에 낯익은 이정표 등이 보였다. 그런데, 중국을 잘 몰랐던 대우 건설은 고속도로를 건설한 후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계약을 체결한 후 중장비를 들여와서 건설하려고 했더니 중국당국은 건설장비의 반입을 금지시키면서 모든 공정을 사람 손으로 하라고 했단다. 그렇게 되어 엄청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그때의 손해를 감안해서 큰 프로젝트를 대우건설 측에 주었다나 뭐라나.


택시에 운전자 보호용 장치가 설치됨                         한가한 도로

 중국의 고속도로는 현재 3만km나 되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연결하면 미국까지 연결될 정도이다. 그런데, 앞으로 2만km를 더 건설해서 총 5만km 까지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이곳 고속도로의 최고 속도는 110km이나 운전자 대부분은 100km정도의 정속 주행을 한다.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 정신이 교통사고를 예방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장거리 주행을 예사로 해야하는 이곳 고속도로에서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조금 넓은 고속도로 갓길에는 시골 사람들이 3륜 오토바이에 물을 가득 싣고 와서 고객들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화물차의 바퀴들이 열을 받아서 화재가 날 우려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달린 다음에는 타이어를 물로 식혀 주어야 한단다.  실제로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화물차 뒷바퀴에서 화재가 나서 운전자 둘이서 어쩔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속도로에서 만나는 차들은 대부분이 엄청난 짐을 싣고 달리는 대형 트럭들이다.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나는 두려움과 부러움을 느끼며 줄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달리는 트럭들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건설 붐에 전 세계의 고철들을 모조리 사 버린 중국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도 전 국민이 고철 수집 운동을 벌리고 있지 않는가?

  중국은 지금 모든 것이 자본주의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오직 땅 덩어리만 정부의 소유이고 나머지는 개인이 사고 팔 수 있는 '반 사회주의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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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하되 내 발 아래 뫼이로다.

 따라서 뒤늦게 자본주의를 알아가는 중국 사람들은 특유의 근검절약 정신과 상술로 세계의 경제를 쥐고 흔들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1위안은 우리나라의 150원 정도의 화폐가치에 중국의 물건들은 비교적 세련되지 못하고 싼 물건들이지만 앞으로 3, 4년 뒤에는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 관광객들의 인기 상품중 하나인 짝퉁시계는 10% 정도만 1년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머지는 사자말자 하루에 두 번 정도만 시간이 맞는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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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오래전부터 '1人 1兒法'을 시행하면서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지만, 지금은 솔선해서 아이들을 낳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것이 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한 명의 자녀만 양육한다고 해도 허리가 휠 지경이고, 대학교를 나와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다. 또한 소수민족 보호정책에 따라서 소수민족들은 산아제한법에서 제외시켰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요즈음 중국에 이혼붐이 일어나서 사회적인 큰 문제화하고 있다고 하니, 어느 지구상에 가더라도 문제가 없는 곳은 없는가 보다. 구약 성경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소리 높여 부르짖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2-4)

 잠을 자는 둥, 밖의 미루나무 숲을 보는 둥 하다보니 어느덧 태안시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점심은 중국 특유의 향을 뺀 담백한 음식을 특별히 주문했기 때문에 먹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특히 고추장과 김치가 우리들의 입맛을 살려 주었다.


고속도로 주변의 밀밭에 있는 미루나무 숲                  공안원과 함께

 점심 후에 조선시대 양사언(楊士彦 ; 1517∼1584)의 <병와가곡집>에 있는 유명한 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의 태산을 관광하기 위해 조그마한 미니버스에 분승해서 구비구비 구절양장 같은 길을 고물 버스는 기를 쓰고 가까스로 올라갔다.

   태산은 1,545m의 조금 높은 산이지만, 우리나라의 지리산이나 설악산 보다 낮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태산은 바위투성이의 악산이었다. 경치도 볼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산이다. 우리나라의 설악산의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몰골이다.

이러한 태산을 구경하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지리산이나, 설악산, 금강산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놀라서 뒤로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괜한 걱정인가?

 태산은 중국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산이다.  중국 5대 명산 가운데 으뜸인 태산이 유명해진 것은 고대의 제왕이 이곳에서 봉선(封禪)이라는 의식을 거행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는 하늘의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황제가 지상에 실현된 태평함을 보고하는 의식으로 평범한 황제에게는 허락하지 않으며 후덕한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준엄한 의식이었다.

 산세가 험하고 기암절벽이 많은 태산을 오르려면 6,293개의 층계를 밟아야만 오를 수 있으나 케이블카가 정상까지 운행되고 있다.

4월부터 11월이 이곳을 여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산이기 때문에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에는 피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 비가 온 후에는 상 정상에서 운해를 쉽게 볼 수가 있는데, 그 모습이 또한 장관이다.

 

 태산의 등산 코스는 4가지가 있는데, 전통적이면서 일반적인 코스는 홍문로(紅門路)를 이용하는 두 번째 코스로서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이 홍문은 태산의 입구가 되는 곳으로 옛날에는 도교의 신상을 모셨던 곳이기도 하다.

내 뒤의 소원이 기록된 열쇄들의 무리들을 보라                                                            

  이곳에서 측백나무로 뒤덮인 울창한 숲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중턱의 中天門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중천문은 천외촌(天外村)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올 수 있는 곳으로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버스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또 이곳에는 식당과 상점이 많이 있으므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정상에는 엄청난 양의 향을 피우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 주변에는 소원을 비는 문구를 새긴 열쇄들이 수없이 얽혀 있었다. 우리 인간사는  이렇게 빌어야 할 소원들이 많은 것인가?


                                                                   내 뒤에 있는 것들이 모두 다 열쇄들이다.

  하산 후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더 달려서 곡부로 이동했다. 이곳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다. B.C. 500년경에 살았던 공자의 혈통이 계속 이어져서 직계자손이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공자의 일대기 (무언극)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전날 밤 대만으로 건너간 공덕성(孔德成)씨는 제 77대 자손이다. 현재 곡부의 인구 50만 명 중에 10만 명이 공씨 성을 지닌 것에서 중국 역사의 유구함이 느껴진다.


 공자의 일대기 (무언극)

 공자의 탄생지이자 2,400여년의 긴 역사에 걸맞게 옛 정취를 풍기는 건물이 많은 노나라의 고도 중국 3대 건축물의 하나인 대성전과 함께 공자의 묘를 보면서 공자의 위대함을 직접 느껴 볼 수 있다.

   곡부는 문물과 고적이 많아 역사문화박물관으로 불린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소동파는 "곡부는 지금도 옛날 기풍이 남아있어 10만에 이르는 집들이 모두 책을 읽는다." 라고도 했다.  고색창연한 Que Li Hotel에 투숙하여 깊은 잠을 잤다.

5월 25일(화) - 제 4일차

 이른 새벽에 아름다운 새 소리에 잠을 깼다.  룸메이트인 양 교감선생님도 벌써부터 새소리에 취해 있었나 보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주변은 공자 사당이 있는 공묘 주변이라서 숲이 우거지고 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새소리라서 나는 새소리를 녹음하기도 했다. 아마도 밤에 우는 나이팅게일이 아닐까 한다.

  어떤 새가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하는지 열심히 찾아보기도 했지만 찾지를 못했다. 양교감과 나는 새소리에 끌려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 관광할 공묘 등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많은 인파를 맞이하려고 이른 아침부터 노점을 꾸미는 사람, 마차를 손질하는 사람들로 바쁜 모습이었다.  아침을 호텔에서 먹었다. 중국 호텔의 음식들은 메뉴가 모두가 비슷하다. 모두 다 부페식이다.

 돌아가는 식탁에 커다란 접시에 음식들을 순서대로 가져다 놓으면, 빙 둘러 앉은 우리들은 자기 식성에 따라 음식을 개인 접시에 덜어다 먹는 식이다.  한 끼에 대체적으로 11가지에서 13가지의 음식이 나왔다.

 향이 진한 야채를 기름에 살짝 볶은 음식이 주로 나왔고 토마토를 물에 삶아 내 오기도 했다. 고기는 닭고기와 돼지고기가 주로 나오고, 삶은 달걀도 있었고 오리 알도 있었다. 우리들이 먹는 음식은 진한 향을 빼라는 특별 주문을 한 음식이라지만 그래도 먹기가 거북한 향이 나는 음식이 나오기도 했다.

  아침을 먹고 공묘를 향해 걸어갔다. 호텔 뒤에 울창한 숲속을 따라 걸으니 새벽에 울던 아름다운 새 소리가 또 다시 들려 왔다.

 공묘 입구에는 많은 처녀 가이드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질서 있게 손님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공자는 주 영왕 20년(B.C 552)에 주의 제후국 중 하나인 노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 곡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나라의 대부인 숙량흘이며 어머니는 안징재이다. 둘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지 아니하고 공자를 낳았다.공자의 아버지는 그 때 나이가 60세였다고 한다. 안징재는 이구산(泥丘山)에서 기도를 하고 공자를 낳았으므로, 자를 중니(仲尼). 이름을 구(丘)라고 하였다.

 공자(孔子)라는 명칭에서 자(子)는 스승에 대한 존칭의 의미이다. 공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자라서 계자가의 창고지기와 소와 양을 치는 비천한 일을 하였으나 창고지기를 할 때에는 요량을 공평하게 하고 소와 양을 칠 때에는 소와 양을 번성시켰다고 한다. 공자는 무사였던 아버지 숙량흘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했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으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달리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에 힘을 쏟았다.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한 것은 그가 문화적 전승자로서의 길을 내디뎠음을 후일에 밝힌 것이다. 특히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禮)를 중시했고 예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다. 공자가 누구에서 가르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공자의 태생이 노나라였으며, 노나라는 일찍이 주나라 건국 공신이자, 주나라 문화의 창설자인 주공 단의 후손이 세운 나라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주의 문화를 정통으로 삼고 이를 이어받아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서주의 문화와 도덕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공자는 6예(六藝) - 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 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의 시대에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에는 삼환이라 불리는 세도가(孟孫氏, 叔孫氏, 季孫氏)가 왕실을 누르고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노나라의 군주인 소공이 이들을 몰아내려 하다가 실패하고 제나라로 망명을 하고 1년 후 제나라에서 객사를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향한다. 공자가 43세가 되던 해 노나라에 정공이 즉위하자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이때 자로와 민자건등의 제자들의 그의 문하에 모여들고 공자는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공자는 52세(B.C 501)에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결코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 53세 때에 협곡에서 제나라와 노나라의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군주가 폭력으로 노나라 군주를 협박하려 들었다. 이에 노나라 군주를 수행하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공에 의해 공자는 54세 때에 대사구(大司寇)라고 하는 최고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해 공자는 삼환씨의 세력을 꺾고 정치적 개혁을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나이 56세에 모국인 노를 떠나 약 14년간을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즉 위, 조, 송, 정, 진을 찾았고 다시 위와 진을 거쳐 채와 초로 갔다. 그간에 세 차례 노에 돌아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방랑의 여정은 초라하고 불행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갖은 수난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참된 군주를 만나 정치적 이상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끝내 그의 정치적 포부는 달성되지 못하였고 현실 개혁의 의도는 늘 좌절되어야만 했다.

  이에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 지식인들의 양성, 그리고 저술에 뜻을 두고 그의 나이 69세 때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비록 현실 참여와 정치 참여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교육과 학문에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그의 제자는 3천명에 이르렀으며, 6예에 통달한 제자만 하여도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노나라도 돌아온 뒤 5년이 지나 74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그가 이룩한 사상에 비하여 그의 일생은 너무나 보잘 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뛰어날 수 있었고, 또한 말년에 그의 교육적 성과가 있었기에 유교가 지금처럼 집대성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보아진다.

c

   중국의 3대 궁전건축의 하나인 공묘는 남북으로 1km, 총면적 2㏊, 전체 건물의 방의 수는 466개나 되는 장대한 규모이다.  공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기원전 478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그 후 역대왕조가 그 규모를 확장, 개축한 것이다.  

공묘의 건축물은 그 규모가 20만㎡에 이르러 궁궐을 방불케 한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중국 제 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 24.9m에 이르며 가운데 정면의 10개 기둥에 등비늘을 번쩍이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용조각이 감탄을 자아낸다.

  공묘는 8개의 문을 지나야 비로소 규문각을 볼 수 있고, 3층 목조 건물의 규문각에는 역대 황제가 내린 서적이나 묵적이 소장되어 있다. 십삼어비정은 금, 원, 청대에 세운 것으로 청의 강희제가 북경의 서산에서 운반해 온 65m의 최대 비석을 비롯하여 53개의 비석이 들어 있다. 대성전 앞의 행단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던 곳이다.

  뒤쪽의 침전은 공자 부인 왕궁씨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대성전, 규문각과 함께 공묘의 3대 건축의 하나이다. 성적전은 공자의 일생을 석각화 하여 120매로 소개하고 있다. 공묘의 규모가 대국이라는 느낌을 절로 느끼게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한참을 다리 아프게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의가 대만과 홍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중국 본토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 대만에서 모처럼 찾아 온 공씨 가문의 후손들이 많았다. 자기들의 뿌리를 찾아 온 것이다.

   공부(孔府)는 공자의 후손들을 위해 지어진 관서(官署)이자 사택을 말한다. 공묘의 동쪽에 있으며 16만㎡에 이르며 463개의 방과 후원 등으로 큰 규모이며 공씨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한대 이후 역대 황제들은 모두 공자를 존경하여 공자의 자손은 제후와 동등한 지위를 받았다.   대문을 지나면 첫 번째 중정(中庭)이 보이는데 동서쪽의 건물은 일사노상최(一四路常催)라는 연공을 징수하는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중정을 지나면 두 번째 문인 중광문이 나온다.

 비석에 지붕을 씌운 듯한 이상한 모양의 문으로 칙사를 맞이한다든가 공자를 기리는 중요한 의식 때에만 열리고 작위가 있는 제후만 통행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공묘를 관람한 후 버스에 올라 공림으로 이동했다.  공림은 공자와 그 역대의 자손이 묻힌 묘소로서 면적이 20㏊에 달한다. 곡부현성(曲阜縣城)에서 북쪽으로 2km가면 공림의 지성림방(至聖林坊)이 있으며 잣나무로 된 가로수를 지나면 이림문(二林門)에 도착한다.

 공자의 묘는 명의 正統 8년(1444년)에 건립되었는데 돌비석에 금이 간 것은 문화혁명 중에 깨진 것을 접합시킨 흔적이다.

  묘의 왼쪽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집은 제자인 자공(子貢)이 스승의 사후 6년간 묘를 지키면서 살았던 곳이다. 묘의 동쪽에 있는 3개의 작은 정자는 송의 진종(眞宗, 988~1007년 재위), 청의 강희제(1662~1722년 재위), 건륭제(1736~1795년 재위)가 공자의 묘를 참배할 때 쉬던 곳이다. 그 외에 공림에는 청대의 고전극의 작자인 공상임(孔尙任,1648~1718년)과 건륭제의 딸 우씨의 묘 등이 있다.

 

  공자의 묘는 그 규모가 크고 웅장했으나, 벌초를 하지 않아서 볼품이 없었다. 벌초를 하지 않는 이유는 위대한 성현의 무덤 위를 어찌 감히 올라가서 밟을 수 있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잡초가 우거진 공자의 무덤                           공자무 모습                                      

  효 사상이 투철한 우리나라의 관광객들은 가끔씩 공자의 무덤을 보고 나서 안타까움에 자진해서 벌초하겠다고 나서다 공안 당국에 혼쭐이 나기도 한단다.

 공자의 무덤 주변에는 많은 무덤들이 있었는데, 이곳의 장묘 문화는 죽은 사람은 공씨 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다 화장을 한 다음, 납골당에 3년간 안치시켜 놓고 딱 3년간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3년이 지나면 제사도 더 이상 지내지 않고, 뼛가루도 강가에 흩어 버린다고 한다. 살아있는 사람들도 살기 어려운데 죽은 사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황금이라는 엄청난 힘이 중국 사람들의 효(孝)를 퇴색하게 하는가 보다.


정면에서 보면 선간(宣干) 으로 보이나 실은 선왕(宣王)이라고 눈 속임함

 매장은 오로지 공씨 성을 가진 사람만 이곳 공림에 매장할 수 있다고 하니 죽은 공자의 힘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미치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점심도 마찬가지로 중국식 뷔페로 먹은 후 우리일행은 제남시로 이동을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속도로를 무려 3시간이나 달렸다.

  황하의 남쪽 기슭, 봉산의 북서쪽에 위치한 산동성(山東省)의 성도 제남시는 인구 약 320만 명의 공업도시이다. 용산문화의 발상지로서 춘추시대에는 제국의 도시로서 번영했다. 발해만으로 나가는 제수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한대부터 제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904년 청도와 함께 독일의 조계지로서 서구 문화가 유입되어 시내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또 이 도시는 산동출병으로 인한 일본군과 중국혁명군의 시가전이었던 제남사변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 중에 가장 깍쟁이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제남시라고 한다. 또한 물이 많아서 절대로 지하철을 건설할 수 없는 특이한 지형의 도시이기도 하단다.  조금만 땅을 파도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특이한 지형이다.

 제남시에 있는 산동성 박물관을 견학했다. 산동성 박물관은 산동성에서 출토된 역사적인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이곳에는 커다란 공룡의 뼈가 전시되어 있었고 황하에서 출토된 것인지 황해 바다에서 출토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큰 나무배가 박물관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도자기 무역선이 연상된다.  이 박물관의 하일라이트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아들 무덤에서 출토된 미니 병마용(兵馬俑)이다.  병마용이라면 진시황의 병마용을 연상하면 된다.  단지 그 크기가 작고 색깔도 진한 회색이 아닌 하얀색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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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진시황 병마용처럼 각기 다르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 크기들은 대략 50cm 정도 된다.  원래 주원장은 세자가 일찍 죽었는지 세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손은 우리나라 단종처럼 황제의 자리에는 올랐으나 북경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삼촌에게 옥좌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수도는 북경으로 천도되었고 결국 명나라의 수도는 건국당시의 수도 남경(南京,난징)에서 북경으로 바뀌어 남경에는 주원장의 무덤 밖에 없다고 한다.  

 산동성 박물관을 견학한 우리는 버스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려서 유방시에 여장을 풀었다.

  유방시는 국제 연날리기 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국제도시이다. 따라서 유방시의 곳곳에는 연 모양의 가로등이 인상적이었다. 세계 모든 연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 유방시라고 한다. 국제 도시답게 도로도 깨끗하고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유방시의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혔다. 일행 중에는 2만원씩 하는 발 마사지를 받기 위해 행장을 꾸리기도 했다. 이곳 유방시의 발마사지 기술이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의 발 마사지 기술이 더 좋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받지 않고 잤다. 집에 가면 내 아내가 정성스럽게 내 발을 마사지 해 줄 터이니까......(아내는 발 마사지 자격증이 있음)

 5월 26일(수요일) - 제 5일차

  오늘은 석가 탄일이라서 본국에서는 휴일이지만 이곳 중국은 주 5일제라서 휴일이 5일 정도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도 휴일이 아니다.

 호텔식의 뷔페를 먹은 후 황하강을 견학했다. 황화강을 관람하는데 관람요금을 받는다. 우리 일행은 중국 사람들의 상술에 혀를 내 두르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이 한강을 구경오면 우리도 요금을 받자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억울함을 풀었다.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 전체 길이가 5,464㎞이고, 유역면적은 75.24만㎢로서 전국 총면적의 7.8%를 차지한다.  황하는 청해성 바얀하르산(巴顔喀喇山) 북쪽 기슭의 카르취( 日曲)에서 발원하여 청해·사천·감숙·영하·내몽고· 산서·섬서·하남·산동 등의 9개 성·자치구를 거쳐 마지막에 발해로 유입된다. 황하유역은 땅이 광활하고 지형의 차이가 극심하다.

  서에서 동으로 청장고원·내몽고고원·내몽고고원·황토고원·황준해평원(黃準海平原)이 가로 놓여 있다. 황하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이 적고 토사가 많으며, 물과 토사의 근원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원지는 주로 난주(蘭州) 이상과 진령(秦嶺) 북쪽 기슭에 있지만, 토사의 근원지는 주로 하구진(河口鎭)에서 용문(龍門)까지의 구간과 경하(涇河)·북락하(北洛河)·위하(渭河) 상류지구에 있다. 황하의 연평균 경류량은 580억㎥로 전국 하천 경류 량의 2%에 불과하다.

 
바람에 날리는 고운 입자의 황사들             황하강가의  대만 관광객들

황하유역은 중국 지형의 현저한 특징인 서고동저의 영향으로 서부 발원지역은 평균 해발 4000m 이상의 고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년설과 빙하로 뒤덮여 있다. 중부지역은 해발 1000m~2000m 사이에 있으며, 황토지형이고, 수토 유실이 심하다. 동부지역은 주로 황하 충적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로가 지면보다 높아 홍수의 위험이 크다. 예로부터 황하유역의 토지는 비옥하고 목장이 많으며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로써 중화민족의 요람으로 불린다

황하강을 바라 본 우리 일행 중 한 분은 황화강물을 플라스틱 병에 담아서 한국에 가져가겠다고 열심히 담기도 했다. 누런 황토색의 황하강가에는 모래가 아닌 아주 고운 입자의 황토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황사 현상을 일으키는 주범인 것이다.


스카우트 기념사진 준비중                           황하강물을 팔겠다는 봉이 김선달 정원화 교감

  어떤 사람은 황하라고 써 있는 팻말을 황하강 기슭에 박아 놓고서 그 팻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게 하면서 모델료를 받으려고 해서 기겁을 하기도 했다.  양쯔강이나 황하강은 그 발원지가 같은 강인데, 양쯔 강은 해마다 홍수 피해가 심하나 황하강은 비교적 얌전한 강이라고 한다.

    황하강을 뒤로 하여 우리 일행은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서 우리가 맨 처음 배에서 내렸던 청도시로 되돌아 왔다.

 

 청도시는 화려한 도시이다. 1898년에 독일이 조계지로 삼았던 곳이라서 스테인드글라스의 교회와 독일풍의 서양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 도시는 독일과 일본의 점령에 의해 기초가 닦여진 도시이다. 그러나 현재의 청도시는 아름다운 해안선이 있는(반도임) 풍요로운 자연과 유럽풍의 시가지가 어우러져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매우 다른 개방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서, 지방 정부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도시 전체의 면적은 10,654 ㎢ 이며, 총 679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연평균 기온은 12도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776mm이다. 비교적 사계절이 뚜렷하며,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봄과 가을이다   

 청도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무척 많이 살고 있다. 청도시는 대구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로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기업체 수가 약 5,600여개나 된다. 그 중에는 포항제철이나  LG그룹, 제일제당 등 대기업도 많고 나이키 신발 등도 이곳에서 성업 중이다.  

  한류 열풍이 엄청나게 불고 있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안재욱과 김희선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지금은 옛날에 우리들에게 인기 있었던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이 되면 청도시 전체가 조용해진다고 한다. 모두 다 집에 가서 그 연속극을 보려고 말이다.

 또한 요즈음에는 한국에 유학 오려는 젊은이가 많고 대학에서는 한국어 강좌가 가장 인기 있는 학과라고 한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도 한국에 유학 오고 싶어 했다.  

 아침에는 비가 왔지만 우리가 청도시에 도착할 즈음에는 활짝 개었다.  버스를 달려서 우리는  청도에 있는 중국의 대기업체중 하나인 '헤이얼 과학관'을 견학한 우리는 조금 실망했다. 별로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볼품없는 전자 제품들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세계를 지배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 견학이었다.

 헤이얼 그룹을 뒤로 하고,  해안에 있는 조각 공원을 관람하러 갔다. 해안에는 수많은 별장들이 있었고, 조각품들이 널따란 해안을 따라서 설치되어 있었다.  나도 돈을 벌어서 이곳에 별장을 하나 가지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조각공원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별장들

 모처럼 한국 식당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중국과 수교하기 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아서 지금은 크게 성공한 경복궁이라는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내가 먹은 음식은 된장 찌개이다. 된장이 그렇게 맛이 있을줄이야....


청도시 번화가               한국관 경복궁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팔대관을 관람했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팔대관은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행객을 비롯하여 치료를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며,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이곳에 와서 휴식을 취하며 글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근처 거리에서 저명한 과학자나 예술가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팔대관의 또 다른 특징은 각 국가의 풍격높은 건축물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국 건축 박람회'라고도 칭해진다.    이곳에는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스페인, 일본식 등 모두 20여개 국가의 건축 양식이 있는데, 모든 건축물들은 자국의 건축 풍격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여행객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 중에 장개석 별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조각공원 입구                             장개석 별장

  팔대관 옆에는 해수욕장이 개설되어 있어서 몇 몇의 사람들이 이른 해수욕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팔대관을 끝으로 관광을 끝낸 우리들은 중국 전통상가에 가서 선물을 골랐다. 별로 살 만한 물건들이 없었다. 나는 두서너 개의 선물을 샀다. 나머지 선물은 한국에 돌아가서 사야겠다. 한국의 물건들이 최고이다.

  오후 3시경에 항구에 들어가서 쉽게 수속을 마치고 NGB에 승선했다. 선상에서 저녁을 먹는데 맛있는 아구탕이 나왔다. 모처럼 땀을 흘리며 배부르게 먹었다.  저녁 8시에 스카우트 해단식을 끝으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저녁 늦게까지 함께 했던 일행들과 회포를 푸는 술잔을 기울이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5월 27일(목요일) - 제 6일차

 무려 16시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달려 온 위동 페리호는 우리들을 인천으로 돌아오게 했다.

아침에 맛있게 식사를 한 후 행장을 꾸려서 하선할 준비를 한 후 갑판에 올라가서 인천항을 바라보면서 이번 중국 여행을 최종 정리했다.  갑문식 도크의 작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입국 수속이 늦어져서 조금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모든 일행이 무사히 인천에 돌아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중국에 사스가 발생했다고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들은 사스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 가져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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