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등명법등명 [自燈明法燈明]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의지하듯 진리를 의지하는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해서 욕망의 번뇌가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바른 지혜를 닦아야 한다.
<열반경(涅槃經)>에는 <대승열반경>과 <소승열반경>이 있다. <대승열반경>은 주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부처님의 몸이 항상 이 세계에 머문다는 것,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열반의 네 가지 덕 등 주로 열반의 교리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반면에 <소승열반경>은 부처님이 발병하시고,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고,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고, 화장을 하고, 사리를 여덟 나라에 분배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적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이 한문 이름으로 확연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소승 두 가지에 공통적으로 <대반열반경>이나 <반니원경>이라는 제목이 쓰여지기 때문이다. <대승열반경>과 <소승열반경>이 다 같이 <대반열반경>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번역 원본·번역자·권수 그리고 내용으로 구분해야 한다. <소승열반경>의 한문번역본에는 <불반니원경> 2권, <대반열반경> 3권, <불유교경> 1권, 장아함부 경전 중의 2번째인 <유행경>등이 있다.
여러 곳을 다니시며 교화하던 부처님은 우기의 안거, 즉 비가오는 시기의 수행기간 동안에 병을 얻으셨다. 병이나 통증의 종류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심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아서 중병인 듯 싶다. 그러나 정진의 힘으로 병을 극복한다. 이때에 부처님은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유훈을 내린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다음에는 자기를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해서 살라는 뜻이다. 자기를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는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잘 관찰해서 욕망의 번뇌가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바른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소승열반경>에서 교리적인 의미는 이 유훈의 말씀이 핵심을 이룬다. '자기를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라.'는 말씀 중에서 진리를 의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하기 쉽다. 진리를 의지하기가 쉽다는 뜻은 진리를 알기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의지하라는 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불교에서는 지금의 나를 업덩어리의 '나'라고 하고 실체가 있는 '나'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자신을 의지하라는 말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물론 실체가 있는 '나'가 아니라 일반적·상식적 의미에 있어서의 '나'는 불교에서도 인정하고 있지만 업을 이끄는 주체, 또는 윤회의 주체로서의 상식적인 '나'자신은 번뇌망상에 뒤덮힌 거짓의 '나', 임시의 '나'인데 부처님이 그 '나'를 의지해서 살라고 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에는 작은 '나'와 큰 '나'가 있다. 한문으로 작은 '나'를 소아라고 부르고 큰 '나'를 대아라고 부른다. 작은 '나'는 현재 우리가 '나'라고 하고 있는 이 개인적인 '나'를 말하고 큰 '나'는 개인적인 '나'를 지워 버리고, '나'와 우주가 하나가 된 그러한 '나'이다. 이것은 우주아 또는 전체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이 큰 '나'는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개인을 지운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경지인지 확실하게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이 큰 '나'를 무아의 '나'로 생각해 보자. '나'를 여실히 관찰하면 '나'라고 하는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욕망이라는 아편에 질질 끌려 다니는 욕망아편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나 다 얻으려고 하니 그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죽자 사자 정신없이 오욕락(五慾樂)의 아편을 쫓아간다. '얻고 싶은 것을 다 얻으면 그 너머에 대단한 무엇이 있겠지.'하고 기대한다. 작은 '나'를 지운 이는 인간의 그와 같은 실상을 여실히 관찰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본능적으로 솟아오르는 욕구를 다 채우기 전에 지치고 말 것이며 설사 원하는 대로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별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알게 된다. 역사의 현실이라는 무대를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멋있는 연극을 하는 무대일뿐이므로 맡은 배역을 충실히 이행하는데 의미가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연극 중에 내가 맡은 배역이 왕자냐 거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내가 무엇을 이루는 사람이 되느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확실히 알 때, 나의 윤회의 업을 향한 욕망과 그것의 성취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확연히 깨닫는다. 개인적인 '나'가 지워지고 우주 전체가 '나'로 떠오를 때 그곳에 큰 '나'가 나타난다. 큰 '나'는 우주의 크기만큼 크다는 뜻이 아니고, 작은 '나'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있는 모습을 여실히 체득하고 가장 참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향해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부처님이 "자신을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지 말며 진리를 의지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문구 안에 그 '자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자기란 뒤에 나오는 진리이다. 부처님은 자기라는 말을 먼저 쓰고 그 자기를 확실히 밝히기 위해서 진리라는 말을 다시 쓴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기를 의지하고 다른 이를 의지하지 않으며 진리를 의지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방법을 자신의 여실한 관찰과 욕망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나'는 바로 진리인데 그 진리는 이 문제 덩어리의 '나'를 여실히 관찰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작은 '나'를 여실히 보는 수행과 지혜를 진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큰 '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에서 큰 '나'와 작은 '나'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나'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진리로서의 '나'와, 지워야 할 망령된 집착으로서의 '나'가 혼동된다. 부처님이 탄생하자마자 외쳤다고 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할 때의 '나'는 우리가 의지해야 할 진리의 '나'고, 우리가 지금 '나'라고 여기는 '나'는 가짜의 '나'다.[석지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