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스크랩] 망상을 멈추어 보자

마음정원(寂光) 2013. 11. 4. 10:51

망상을 멈추어 보자

-아짠 진용 빤야와로


 

수행에서 1차적인 목표는 침묵입니다.

왜 침묵을 목표로 하는가 하면 머릿속에서 말하고 있는 망상이라는 것을

계속하게 되면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힘이 없어져서→몸이 약해지고→뇌가 약해지면→정신적으로 심한 병이 듭니다.

정말로 소중한 일을 하면 마음에서 수다 떠는 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건강하고 바쁜 사람은 수다 떨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자기 파괴적인 것입니다.

제멋대로 생각하면 실재 지금 접하는 정보에 대해 감각 기관을 열어 두지 않기에 현실과는 거리가 먼 망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환각까지 일으켜서 뇌가 망가져 갑니다.

머리로 말하고 있는 동안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리로 말하기 바빠서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몸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리 굴리는 망상의 쇠사슬에 걸려 에고라는 기둥에 용접되어 있는 상태가 됩니다.

망상은 나라는 에고를 중심으로 해서 회전합니다.

그것만 고치면 금방 행복하게 될 겁니다.


인도 말에 무니(Muni)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자라는 의미인데, 침묵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무니의 행(침묵행)은 3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침묵, 말의 침묵, 마음의 침묵입니다.

①몸의 침묵:살생 하지 않는 것, 도둑질은 하지 않는 것, (출가자의 경우)성행위로부터 멀어지는 것, (재가자의 경우)불륜을 하지 않는 것.

②말의 침묵: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것, 조잡한 말를 사용하지 않는 것, 잡담을 하지 않는 것.

③마음의 침묵 : 해탈에 이르는 것.

마음의 침묵은 어렵겠지만, 몸의 침묵, 말의 침묵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모였을 때는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든지, 진리를 말하든지 2가지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 침묵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입다무는 것은 불교적인 침묵이 아닙니다.

성스러운 침묵이라는 것은 제2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2선정에 이르면 말이 멈춥니다.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사유가 멈추면 몸이 매우 맑고 가벼워지게 되고, 마음은 통일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성스러운 침묵에 대해서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반복하여 성스러운 침묵으로 마음을 통일하라. 성스러운 침묵의 선정에 들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선정에 들 줄 알면 반복해서 들어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제2선정에 들면 누구든지 사유함없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분 혹은 30분이 지나면 다시 사유하려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성스러운 침묵에 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완전한 성스러운 침묵은 엄밀하게 말하면 해탈인 것입니다. 선정만으로는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제2선정에 이르면, 사유하는 망상의 흐름이 멈추게 됩니다.

이것을 「언어의 멈춤」이라고 말합니다.

말을 하기 전에, 마음에 개념, 지각, 구별하여 아는 것(saññ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라고 하는 개념을 붙여 둡니다.

말은 나중에 옵니다.

그러니까 개념의 정지로 모든 것이 정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2선정으로 망상은 끝나지만, 개념은 회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날조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데이터를 날조합니다.

그래서 날조하는 기능을 또한 산냐라고 말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말을 사용해 사유하는 것을 정지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날조하는 기능을 정지시키면, 진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번뇌가 사라져서 해탈에 이릅니다.

개념의 정지가 진짜 마음의 정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사유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무리라서, 상식의 범위에서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아름다운, 선한, 쓸데없는 것을 피한 말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으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말의 그림을 잘 그리려면, 망상이나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먼저 ①감정 제어 : 감정이 일어나면 알아차려 순간에 정지한다.

자비의 명상 : 할 일이 없을 때는 자비의 명상을 한다.

무상·고·무아의 견해로 대상을 관찰한다.

실천성이 부족한 관념을 피한다-논리적, 이성적, 구체성을 지니도록 한다.

⑤유익한 조건을 수반하지 않는 생각은 유해한 망상이라고 확인한다.

⑥정사유, 정어를 실천한다.

말하는 경우는 최소한으로 하고 좋은 말을 선택해서 말한다.

⑧명상 실천으로 망상을 정지하는 훈련을 한다.


이제 망상이 에고와 결합하는 과정에 대해 먼저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①색, 성, 향, 미, 촉, 법의 6개의 정보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감각 기관에 접한다.

②느낌(웨다나)이 생긴다.-느낌은 고(괴롭다), 락(즐겁다), 불고불락(시시하다)의 3종류로, 이 중의 어떤 것 하나를 항상 느끼게 된다.

③그 느낌을 「기억하고 구별하여」이름을 붙인다(산냐).

이 느낌을 기억하고 구별하여 결정하고 판단한다(상카라).-이 판단이 인간의 행위나 인생을 결정해 간다.

결정하고 판단한 것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사유)하게 된다(상캅빠).-이 사유가 인생이나 행위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올바른 상캅빠를 만드는 것이 인간에게는 중요하다.

그런 후에 「내가 행한다」 「내가 본다」 「나에게 보이고 있다」라는 「나」가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④거기서 성냄, 욕구,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일어나 마음이 더러워진다.

⑤존재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다.

이것이 망상이 나라는 에고와 결합하는 과정인데, 쉽게 풀어서 말해보겠습니다.


불교는 「진리를 깨달아라.」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과학적이지만, 인간의 오감으로 보고 아는 것이 반드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식하지만, 자신의 범위 안에서만 인식합니다.

과학도 인간을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발견하지만, 「실제의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식을 얻으면 인간이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 분노, 허세 등의 번뇌가 일어나 그 사람을 타락하게도 합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들의 고뇌, 괴로움은 그대로이고, 다툼, 경쟁, 전쟁, 차별 등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우리의 인식 그 자체가 날조된 것이다」


잡초 다발은 인간이 보면 단순한 쓰레기이지만, 소나 양이 보면 「맛있는 음식이다! 먹을 것이다!」라고 인식합니다.

죽은 쥐를 까마귀가 보면 「맛있는 음식이다!」라고 하지만, 인간이 보면 「기분 나쁘다, 불결하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죽은 물고기나 돼지고기는 시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맛있을 것 같다고 인간은 인식합니다.

우리의 인식은 문자 그대로 날조된 것입니다.

날조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데이터가 없는 곳에서는 날조할 수 없습니다.

날조는 자신의 입장이나 형편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지식을 쌓는 것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사유가 아니라 망상으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날조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망상은 뭐든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해체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실천하면, 집중력은 높아지고, 정신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고, 마음은 온화하게 되어 가고, 지혜가 개발되어서 종국에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성취자,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학적입니다.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은 있는 그대로를 생중계하는 일·확인하는 일·관찰하는 일이라고 권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는데도, 우리들은 이 방법으로 실천해보아도 망상이 잘 멈추어지질 않고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부딪힙니다.

다만 관찰할 뿐인데도 망상은 자꾸자꾸 일어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사유라고 생각하며 망상하는 것이 많습니다.

「망상하겠다.」라고 생각해서 사유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사유하게 되면 많은 망상이 섞입니다.

망상이 섞이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생각할 때는 시간이 경과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생각하면 시간이 걸립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청소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라고 물리적인 일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은 망상으로 인해 걸립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서 「일주일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해도, 실제로는 일주일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망상하고 있기 때문에 일주일간 걸리는 것입니다. 망상이 없으면 순식간에 할 수 있습니다.

사유를 빠르게 하려면 망상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움직이지 않고 책을 읽거나, 공부할 때는 빠릅니다. 못을 박듯이 집중하기 때문에 망상이 잘 비집고 들어가지질 않습니다. 그런데 1분간 사유를 하면 59초의 망상이 섞입니다.

망상은 논리성, 이성, 구체성, 현실성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기에, 아무런 근거도 없고, 올바른 결론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병이 들고 자기 파괴가 될 때까지 망상을 지속하게 됩니다.

한편 사유는 논리적이기에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결론에 이르러도 복수의 선택사항이 생기면 더욱 망상하거나 고민하거나 합니다.

그것은 번뇌(감정)가 망상을 끌어당겨 일어나게 하고, 망상하는 것으로 더욱더 번뇌(감정)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무지·욕구·분노라고 하는 번뇌(감정)로 망상이 일어납니다.

맑고 깨끗한 사유가 있을 때조차도 번뇌는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번뇌가 돌연히 일어납니다.

우리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망상을 시작하고, 망상에 의해 더욱더 번뇌가 일어나는 줄 알지만, 이것을 멈추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노력해도 또 망상의 함정에 빠져버립니다.


윤회하는 생명은 번뇌라는 감정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번뇌가 있기에 둑카(괴로움)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 있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번뇌가 있으면 어리석게도 「사는 것이 괴로움이다」라는 사실을 소홀히 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기다려진다.」라고 착각해서 윤회하며 사는 것을 고집합니다.

산다는 것이 씁쓸한 것이기에, 그것을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욕구·분노·질투·미움·오만 등의 번뇌라는 감정이 있으면, 사는 것에 도전할 수 있게 되어, 망상은 불가결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며, 괴로움이 확대되는 결과가 됩니다.

「사유」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얻는 수단인 것입니다

뱀에는 선천적으로 독이 있고, 새에는 날개와 주둥이가 있기 때문에 사유하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같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있는 「무기·도구」는 지식·사유입니다.

인간에게 지식은 지니지 않으면 안 되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는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 왜 불교는 「사유를 그만두시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유는 해탈하는데 장애가 되고, 지혜가 필요할 때에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올바르지 않는 사유를 정지시켜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라.」가 아니라, 괴로움을 넘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은 날조된 것으로 주관적이기에 진리,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 소리 그 자체를 인식하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 지혜가 일어나 마음의 더러움을 없애고, 완전인 혜안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르지 않은」사유·망상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사유·망상을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망상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알아도, 망상을 정리하는 수행에 힘써도, 망상의 소용돌이에 떨어져 버립니다.

비유하여 말하면 「호흡을 멈추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매우 어렵습니다.

강렬한 집중력·평온함·이성·있는 그대로에 관찰할 수 있는 능력·진리와 인과 법칙의 발견·지혜의 개발 등이 갖추어지면 망상이 정지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서서히 진행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팔정성도의 두 번째가 정사유(sammā saṅkappa)입니다.

사유·망상이 제어 불가능하여 마음대로 내달리고 있기에, 우리에게 「사유의 자유」는 없습니다. 항상 악한 사유가 흐르고 있으므로, 그것이 선한 사유가 되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악한 사유를 멈추고, 선한 사유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사유를 정리하고 관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유의 정리 1

kāma saṅkappa : 다섯 가지 욕구와 관련된 사유

즐기고 싶고, 돈을 벌고 싶고, 사치하고 싶고, 여행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등의 사유로 이런 악한 사유를 생각할 때는 마음이 더러워지고, 불행하게 되고, 병이 들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선, 욕구에 관한 망상을 멈추어야 합니다.

nekkhamma saṅkappa : 다섯 가지 욕구로부터 멀어진 사유

비록 망상일지라도 욕구로부터 탈출할 방향으로 사유하는 것으로 이런 것은 선한 사유입니다. 오감에 속박되어 노예로서 일하는 마음의 자유·해방을 생각합니다.

뭐든지 가지려고,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방에 여러 가지 물건이 증가하면, 편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유의 정리 2

byāpāda saṅkappa : 격렬한 분노, 미움에 속하는 사유·망상

오만함과 자기비하는 자아의 착각의 앞과 뒤입니다. 분노의 원인입니다

악한 사유로 사유할 때에 죄를 범합니다.

분노의 망상·사유가 일어나면 제어하고,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abyāpāda saṅkappa : 자애로 분노가 사라지게 하는 사유

천한 사유인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자애의 사유로 옮겨놓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로 대하고, 사물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평온함(사)을 지닙니다.


사유의 정리 3

vihiṁsā saṅkappa :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사유·망상, 해코지하려는 사유, 폭력적인 사유, 괴롭히려는 기분

「 나에게 이런 망상은 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은 결국 약자를 괴롭히고 죽이는 일입니다.

이런 악한 사유로 망상할 때에 죄를 범합니다.

avihiṁsā saṅkappa : 비폭력적인 사유, 불쌍히 여기는(비) 사유,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느끼고 행복을 바라는 사유·수념(隨念)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karuṇā(悲), 사물에 대해서는 「자연을 지키고 보전한다.」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까다롭게 이해하려고 하면 사유는 더욱 혼란스럽게 되고, 실천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완전하게 설명하신 분」이므로,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없습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사유·망상의 폭류가 일어나지만, 무지 그 자체의 관리는 할 수 없습니다.

무지의 망상을 하면, 망상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의 3가지 사유를 바르게 관리하는 것으로, 이성과 지혜가 일어나 무지가 자동적으로 없어집니다.


욕구의 사유, 격렬한 분노의 사유, 해코지하려는 사유 등의 악한 사유에는 아래와 같은 속성이 있기에 바른 사유를 일으켜야 합니다(MN19 Dvedhāvitakka sutta).

attabyābādhāya : 자신이 파멸하고 불행하게 되어 버린다.

parabyābādhāya : 다른 사람이 파멸하고 불행하게 되어 버린다.

ubhayabyābādhāya : 양쪽 모두가 파멸하고 불행하게 되어 버린다.

paññānirodhiko : 지혜가 멸하고 무지하게 된다.

vighātapakkhiko : 고민·괴로움의 동료가 된다.

anibbānasaṁvattaniko:안온·열반에 인도되지 못한다.

이 가운데 하나의 속성만 생각해도 악한 사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선한 사유의 속성은 이것의 반대이고, 선한 사유를 밤낮 계속해도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사유·망상하는 것으로 성격이 바뀝니다.

선한 사유로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한층 더 수승한 해탈·열반의 경지를 목표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한 사유도 제어해야 합니다.

선한 사유는 안전하지만, 밤낮 계속하면 신체는 지칩니다(kāyo kilameyya).

그래서 선한 사유도 멈추어야 합니다.

신체가 지치면 마음은 흐트러지고 오염됩니다(Kāye kilante cittaṁ ūhaññeyya).

마음이 흐트러지면 마음은 통일되지 않고 삼매로부터 멀어집니다(Ūhate citte ārā  cittaṁ  samādhimhāti).

그래서 선한 사유도 멈추고 집중력을 길러야 합니다.


경전에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에 높은 낭떠러지가 있는데,

악한 사람이 안전한 길을 모두 닫고 위험한 길을 열어 두어 낭떠러지로 몰고 가면 동물들은 파멸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위험한 길을 완전하게 닫고 안전한 길을 열어 두기에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은 위험한 악한 사유를 닫게 하고, 선한 사유를 하도록 하며, 그 선한 사유도 이윽고 닫아버려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좋아하면 벼랑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선한 사유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한 사유를 하는 본궤도에 올라서면 선한 사유도 신체를 지치게 하므로 사유를 모두 멈추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유의 제어와 관리에 힘써서 안전을 확보해야 합니다(MN20 Vitakkasaṇṭhāna sutta).


사유의 관리 1

욕구·분노·무지라는 번뇌의 감정으로 사유하게 됩니다.

그 때는 사유의 대상을 바꾸어 다른 일(부정함, 무상, 자애, 현재의 대상 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유가 사라져 선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 사유도 억눌러 집중력에 힘씁니다.

굵은 못으로 떼기 어려운 못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사유의 관리 2

1의 방법으로 실패했다면, 악한 사유의 결점·위험성을 명확하게 관찰하여야 합니다.

「이 악한 사유는 죄이며 불행이나 괴로움을 부른다.」라고 구체적으로 위험성을 생각하면 망상하는 자체가 기분 나빠져 없어집니다.

멋 부리길 좋아하는 젊은이가 개·뱀·고양이의 시체를 자신 목에 붙이면 혐오스럽고 오싹해져서 떨쳐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유의 관리 3

2의 방법도 실패했다면, 그 사유를 단순하게 무시하고, 마음을 두지 않아 멈추어야 합니다(asatiamanasikāro āpajjitabbo).

망상에 탑승하지 않고 유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눈앞에 있는 경우는 눈을 감는 것과 같습니다.


사유의 관리 4

3의 방법도 실패했다면, 망상을 일으킨 충동·감정·원인을 관찰하여 진정시킵니다(vitakkasaṅkhā rasaṇṭhānaṁmanasikātabbaṁ).

수행의 목적과 반대로 하고 있는 상황을 알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관찰하여 멈춥니다.

달리고 있는 사람이 「왜 급히 달리지? 좀 더 침착하자」라고 생각하면 천천히 걷게 되고, 걷고 있을 때 「왜 걷고 있지? 좀 더 침착하자」라고 생각하면 멈춰 서게 되고, 멈춰 서있을 때 「왜 서 있지? 좀 더 침착하자」라고 생각하면 앉아 있게 되고, 앉아 있을 때 「왜 앉아 있지? 좀 더 침착하자」라고 생각하면 침착하게 눕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똑같이 악한 사고가 생겼을 때 그 충동을 진정시킵니다. 성냄이 일어나면 「성냄이 일어났구나.」라고 성냄의 충동을 관찰하고, 「 왜 화나 있는 것이지?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성내면 내가 먼저 그 성냄의 영향을 받는구나!」 라고 관찰해서, 성냄을 진정시킵니다.

즐겁게 산보 나온 사람은 빨리 걷거나 천천히 걷거나 멈추거나 쉬거나 자유롭게 조절합니다. 즉 악한 사유, 불건전한 생각을 고요하게 할 때 제거되고 사라집니다. 그들의 제거에 의해 마음은 내부적으로 꿋꿋이 서고, 자리잡고, 하나로 되고, 그리고 집중됩니다.


사유의 관리 5

4의 방법도 실패했다면, 중증의 망상이 되어 있기에, 이를 악물고 입천장에 혀를 붙이고, 강하고 선한 마음으로 탐·진·치와 연결된 사악한 마음을 비난하고, 억누르고, 제지하고, 공격합니다(cittaṁ abhiniggaṇhitabbaṁ abhinippīḷetabbaṁ abhisantāpetabbaṁ).

고행은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도 망상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자세를 바로잡고 몸을 강제로 조절하는 것을 이와 같이 용인합니다. 망상을 얕잡아 보지 않아야 합니다.

힘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잡아 괴롭히고 누르고 혼내주듯이, 강한 사유로 악한 사유·망상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면 오직 사유하기를 원한 생각을 사유할 것이고,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은 생각을 사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면

1. 사유·망상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침묵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2. 악한 사유·망상을 선한 사유로 옮겨놓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이 목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3. 이것이 몸에 베여지면 선한 사유도 멈추고,

   알아차림의 실천으로 집중력을 높여 사유·망상의 완전한 정지를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망상의 정지로 해탈에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출처 : 쉐우민 숲속
글쓴이 : 두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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