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윤회와 인과법/최봉수(동국대교수) 업과 윤회란 무엇인가 1. 업과 윤회에 대하여 오늘 주제로 삼은 업(業)과 윤회(輪廻)를 원시불교라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불교시대의 자료를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원시경전 중에는 팔리어(Pali, 巴利語)라는 인도(印度) 고대 사투리로 된 경전이 상당수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경전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아항 빅카웨 상체타니카낭 카마낭 카타낭 우파지타낭 아파티상웨디트와 비얀티바왕 와다미, 탕 처 코 딧테워 담메 우파파장 와 아파레 와 파리야예.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또 쌓아두었다면 그 과보를 받지 않은 채 그 업이 근본적으로 끝난다라고 나는 결코 설하지 않는다. 그 업의 과보는 현생에 받든지 아니면 반드시 내세에라도 받고야 만다. 바로 업과 윤회에 관련된 내용으로 고타마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베푼 가르침입니다. 이 경문을 보면 업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업은 반드시 결과를 불러들인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또 그 결과를 불러들이는 데 있어서는 이생에서 과보를 받지 못하면 내세에라도 결과를 반드시 불러들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생 또는 내생, 전생이라고 하는 다소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개념이 그 경문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생 또는 전생, 내생이라는 말 혹은 현세, 숙세, 내세 하는 말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사이에 개입되어야 합니다. 전생과 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고, 현생과 내생을 가르는 것도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다고 할 때 현생, 전생, 내생 모두 그 가운데 죽음 없이는 연결이 안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전생에서 현생, 또는 현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할 때 불교에서는 윤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제가 외워 드렸던 위의 경문, 그것은 업과 윤회에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으로써 가장 최초의 말씀이자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그런 진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제 역시 위의 경문을 해석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2. 업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우선 업(業)이라는 주제부터 여러분들과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함께 얘기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정도의 오해가 업이라는 가르침을 감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람들이 업을 말하면서 갖는 느낌 혹은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고 어둡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대단히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입장에서 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평소 생활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릴 때는 업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어쩐지 안 풀리고 실패를 겪었다든지 모진 고난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말합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업을 지었길래…" 또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냐"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그 속에 들어 있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뽑아보면 한국 사람들은 업이라는 것을 아주 무거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 검고 죄스러운 것 등 죄업과 관련된 입장에서 업을 이야기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길래…라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업이라는 말을 상당히 과거 예속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부처님 경전 속에서 업이라는 것을 공부해 보면 결코 업의 가르침은 무겁고 어두움을 던져주는 것도 아니고 과거 예속적인 죄업의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제가 볼 때 부처님은 가볍고 하얀 업을 이야기하셨고, 과거 예속적이기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업을 이야기하셨으며, 또 죄업(罪業)보다는 복업(福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의 본래 뜻이었는데 불교가 세계적으로 전해지고 우리에게 이르는 과정에서 다소 변화를 겪었다고나 할까요. 업의 본래 의미인 밝고 가볍고 미래지향적이고 복업으로서의 가르침이 무겁고 어둡고 과거 예속적이고 죄업으로서의 분위기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정반대의 느낌이나 분위기로 업의 의미가 회전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업에 대한 분위기나 관점이 오해에 가깝다는 사실을 입증해 줄 만한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한때 사위성에 머물고 있을때의 이야기입니다. 사위성은 오늘날 인도의 슈라바스티지역, 우타르푸라데슈라는 주에 있는 곳입니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라는 나라의 수도였지요. 여러분들도 경전에서 사위성이라는 말을 종종 보셨을 거예요. 그곳에 부처님께서 계실때인데 하루는 아침 일찍 젊은 청년이 얼굴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부처님께서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느냐" 하고 물으셨죠. 젊은 청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참 안됐구나" 하면서 부처님께서 위로를 하셨죠. 그런데 이 젊은 청년은 부처님께 예상외의 부탁을 올립니다. "부처님,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 것은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가 이왕이면 다음생에 좋은곳에 태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기에 이렇게 부처님을 찾아왔습니다. 모쪼록 부처님께서 힘을 써주셔서 저희 부친께서 내생에 좋은곳에 태어날 수 있도록 애써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젊은이의 말인즉 요즘으로 말하면 영가천도를 해주십시오, 이런 이야기일 수 있어요. 우리 역시 가족이 죽음을 맞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49재도 지내고 영가천도를 위한 각종 법식을 벌이지 않습니까? 그처럼 젊은이도 부처님께 그런 부탁을 한 셈이죠. 그때 부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를 쓰면 너희 아버지가 다음 생에 좋은 곳에 몸을 받아 재생할 수 있다고 믿느냐?" 이렇게 질문을 해요. 젊은이는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라고 답을 하죠.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너는 어떤 근거로 내가 너의 아버지를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권능이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 고 물으셨죠. 그러자 젊은이는 "부처님께서는 이미 불사(不死)의 법에 정통하셨다고 저희에게 가르치신 바 있고, 또 욕계의 천신세계, 색계의 천신세계, 무색계의 천신세계 등 온갖 천신세계에 자유자재로 드나드실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왕이면 저희 아버지가 나쁜곳에 떨어지기보다는 좀더 좋은 천신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힘을 써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젊은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면서 "좋다,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사바티(시내)로 내려가서 내가 준비해 오라는 것을 가져오너라" 하십니다. 젊은이는 "무슨 준비를 할까요?"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항아리 두 개와 자갈을 한 되 사오고 버터를 한 되 사오너라. 그리고 긴 막대기를 하나 구해 갖고 오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시키는 일이니까 젊은이는 급히 시장에 내려가 항아리 두 개와 자갈 한 되, 버터 한 되 그리고 긴 막대기를 구해서 돌아옵니다. "부처님, 준비가 다 됐습니다." 젊은이가 도착하자 부처님께서는 "좋다. 그러면 나와 같이 뒤뜰 호숫가로 가자" 하십니다. 뒤뜰로 가니 잔잔한 호수가 부처님 정사(精舍) 뒤에 펼쳐져 있었어요. 한 1미터 수심을 가진 호수였는데 흐름이 잔잔하고 물밑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호수였죠. 부처님께서는 "우선 항아리 하나에 자갈을 집어넣어라. 그리고 물에 띄워라" 하십니다. 젊은이는 항아리 안에 자갈을 한 대 부어넣고 호수에 띄웠습니다. 항아리에 자갈이 들어갔어도 물의 부력 때문에 항아리가 뜨겠죠. 항아리는 호숫가에서 둥둥 떠서 물의 중심부로 향했습니다. 항아리가 어느 정도 호수 중심부로 들어가 막대기가 닿을 만한 거리가 되자 부처님께서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막대기로 항아리를 부셔버려라." 젊은이는 부처님 말씀대로 항아리를 부셨습니다. 그러자 항아리가 쪼개지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자갈이 바닥에 내려앉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잘 봤느냐고 묻습니다. 젊은이는 잘 봤다고 답합니다. "그러면 다시 나머지 항아리에 버터를 넣고 호수에 띄워라" 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는 부처님께서 시키는 대로 버터를 넣은 항아리를 호수에 띄웁니다. 물 위에 뜬 항아리가 막대기가 닿을 만한 거리가 되자 부처님께서는 항아리를 부수라고 말씀하십니다. 항아리를 부수자 버터가 물 위로 흩어지겠죠. 젊은이는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대단히 기쁘고 희열에 차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는 삼세의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께서 자기 선친의 영가를 위해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고대로부터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합니다. 화장할 때 나무를 쌓고 향료를 뿌리고 그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하는데, 인도사람들은 시신이 타기 전에 중간쯤 타면 장자나 상주가 화장대 위로 올라가서 아직 타고 있는 시신의 두개골을 으깨는 전통의식이 있습니다. 두개골을 깨면 골수가 쏟아지겠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 궁금하실 겁니다. 인도 사람에게는 시신이 타고 있을 때 두개골을 깨주면 영혼이 좋은 곳에 올라간다고 믿는 속신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항아리에 자갈을 넣고 깨라고 한 것이나 또 버터를 넣고 항아리를 깨라고 한 것은 당시 인도의 전통의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즉, 젊은이는 부처님 방식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좋은 곳에 보내기 위한 의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흡족해하는 젊은이에게 다시 묻습니다. "잘 봤느냐." 젊은이는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처음 항아리가 깨어지면서 자갈이 가라앉은 것이 저 밑에 보이지? 만약 인도 대륙에 있는 모든 종교인들, 예를 들어 신통력 있는 종교인들을 이 호숫가에 불러 모으고 저기 있는 자갈이 물 위로 떠오를 수 있게 부탁을 해보자. 그 사람들이 와서 주문을 외우고 신통력을 부리는 등 별짓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통방통한 사문 바라문들이 이 호숫가에 모여서 자갈아 떠올라라… 하고 외쳐 부른다고 했을 때 저 자갈이 떠오르겠느냐?" 젊은이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물보다 무거운 자갈이 어떻게 떠오르겠습니까?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버터를 두고 이야기해 보자. 버터는 물보다 가벼우니까 떠오른 것이다. 그러면 종교인들에게 똑같이 부탁을 한다고 했을 때, 저 버터를 보고 가라앉으라고 주문을 외우면 버터가 가라앉겠느냐?" 그러자 젊은이는 답합니다. "물보다 가벼운 버터가 어떻게 가라앉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이다. 너의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업이 저 자갈처럼 무겁고 어두운 업이라면 내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반대로 너의 아버지가 생전에 지은 업이 가볍고 밝은 것이라면 천하없는 사람이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도 천신의 세계로 승천할 수밖에 없는데 난들 어떻게 하느냐" 하면서 돌아섭니다. 그제서야 젊은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제가 부처님께 괜한 부탁을 드려서 석가 세존을 성가시게 해드렸습니다. 저는 마을에 내려가서 버터처럼 희고 밝은 업을 지어서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도 준비하는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업에 대한 가르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화 중에 하나라서 소개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업의 가르침 속에는 자갈처럼 무겁고 어두운 업을 지어서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업을 설하시는 근본 목적은 무엇입니까? 버터처럼 희고 가볍고 경쾌하고 착한 업을 지어서 미래에 다시 말해 이생이나 다음 생에서 업을 지은 이후의 시간 속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가르침으로서 부처님은 업을 설하셨던 것입니다. 악업을 경계하고 선업을 선양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업에다 초점을 두고 업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비판을 해도 괜찮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업에 대한 가르침을 설할 때는 분명 가볍고 밝은 업을 지어서 미래지향적인 복된 삶을 추구하라는 뜻에서 업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 점을 공감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업을 떠올릴 때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생각은 업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업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운명이란 말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 혼자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정해진 원리라고 할까요.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란 말 속에 담아서 사용합니다. 그것처럼 '업' 하면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 즉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무겁고 정해진 운명 같은 분위기와 무게를 업이라는 말에 부여합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업이라는 말을 공부하다 보면 업은 전혀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인식하게 되고 또 인지해야 합니다. 3. 업의 다섯 가지 측면 저는 여러분과 업을 다섯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면서 업이 아주 친숙하고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공감하고 싶습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래서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처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업이라는 것이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어서 내 손 안에 넣었다가 던졌다가 할 수 있는 업의 느낌을 가지고 나누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본래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업을 공부할 때 부처님은 다섯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 업이라는 말뜻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둘째 업의 주체(主體)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업의 전제 조건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업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업의 방향이라는 다섯 가지 측면을 살펴야 합니다. 우선 업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사실 부처님은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아니 부처님께서 업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고 의아해 하실 겁니다. 그러나 정작 업이라는 말은 중국말입니다. 부처님은 인도사람입니다. 인도사람인 부처님이 중국어인 업이라는 말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업이라는 말 속에는 중국적인 사유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므로 원시불교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고타마 붓다의 마음이 많이 흐려져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도말로는 업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카르마(karma)'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을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이 업의 원어입니다. 그런데 이 카르마를 팔리어로 하면 캄마(厘磨)입니다. 그렇다면 캄마는 무슨 뜻입니까? '행위', '움직임'이란 뜻을 갖고 있는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거부할 수 없는 원리, 운명적인 어떤 실체 등의 뜻은 카르마라는 말에는 본래 없었던 거예요. 이 카르마라는 말에 안타를 붙이면 '카르만타'가 되는데 직업이란 뜻입니다. 둘째, 우리가 업이라는 말을 살필 때 주체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업은 아니기 때문에 주체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나 움직임이 카르마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바람은 움직이는 것이죠. 바람이 불어서 빨래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나 그 움직임을 두고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움직임을 보고 업이라고 하느냐? 전통적인 불교 교학에 들어가면 육근(六根)의 움직임만을 업이라고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은 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업의 주체를 '나'라고 하지 않고 왜 부처님께서는 육근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말을 아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의 목적이 참나를 찾는 데 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짜 '나'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나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금기시하십니다. 대신 부처님께서는 "너희 스스로의 눈으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대상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스스로를 육근이라고 불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뜻)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육근의 움직임. 이 육근의 움직임이나 육근의 행위만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이라고 하는 개념을 점점 축소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근이 일으키는 모든 행위를 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가령 우리는 밤에 자면서 많이 움직입니다. 가만히 누워서 꼼짝 않고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밤에 자면서 움직이는 것을 업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세번째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육근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전제가 충족되었을 때 업이라고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전제냐, 그것은 의지적(意志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만을 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말일지 모르지만 분석해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도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 제가 팔리어 경문 속에서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쌓아두었다면…" 이라고 했던 것처럼 업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업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논쟁거리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때 개미를 죽인 것이 악업이냐는 물음입니다. 이때 바로 업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의식적으로 개미가 있음을 상기했고 의도적으로 그 개미를 죽였다면 그것은 엄연한 살생입니다. 나쁜 업이죠. 그런데 자신이 개미를 죽이는지 의식도 못했고 개미가 죽었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는 업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개미가 어찌되었든 죽었는데 그것을 업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개미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을 따지는 법문이 있습니다. 수행부분에서 그것을 따지게 됩니다. 수행에서는 의식하지 않고도 잘못한 것을 문제삼습니다. 수행은 무의식적인 것까지도 문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업은 의식적인 것, 일단 의도적인 것만을 문제삼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라는 것을 자신이 의식하면서 한 행위에 대해서만 업이라는 말을 쓰게 되고, 선한 업이니 악한 업이니 하는 말을 붙입니다. 경전에 보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 중에 첫째가 망언,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알면서도 거짓말하는 것, 거짓말인 줄 '알면서' 하는 거짓말, 이것이 악업을 구성하는 요건입니다. 모르고 한 일, 실수로 하는 일은 일단 업의 차원에서는 제외시키는 것이죠. 우선 내가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만 생각하면 됩니다. 즉 육근의 행위 중에서도 의지적인 행위,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위가 존재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업을 일으키는 것인가? 업은 행위라고 했습니다. 행동이며 움직임이라고 했지요. 움직임은 돈도 들고 힘도 들고 에너지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움직이고 행동했거든요. 업을 지었거든요. 그렇다면 왜 행동했을까요? 가령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부처님 이야기를 저와 나누는 것도 여러분들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로서의 업이 왜 일어났느냐,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의 목적을 "편함을 추구하여 업을 짓는다"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굳이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밥을 먹기 위해 움직이고, 밥을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죠. 이렇게 움직이고 업을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죠. 이 편안함이라는 말을 좀더 교학적으로 분석하면 "아집의 존속을 위하여 업을 일으킨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행복을 추구하여 업을 일으킨다" 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업이라는 것을 규정할 때 '육근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편안함을 추구하는 행동', 또는 '편안함을 추구하여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업의 근본적인 이해를 풀어가다 보니 본래 가졌던 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셨을 줄 압니다. 즉 업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나고 부정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인된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식별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초월적인 원리나 권능의 뉘앙스 속에서 업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그것을 업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결국 이것이 고타마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입니다. 4. 내(內)행동과 외(外)행동 부처님 당시에 공존했던 유신론적인 종교인 브라마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고, 운명론적인 종교인 자이니즘에서도 업을 이야기했습니다. 브라마니즘과 자이니즘에서는 업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몰라도 불교, 즉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은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업입니다. 카르마죠. 그런 정도예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편안함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면 그게 다 업인 것입니다. 업이라는 말 별거 아니죠. 간단하죠. 다시 한번 업이라는 말을 정리해 볼까요.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 그렇다면 업을 이해하는 마지막 측면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편하고자 일으키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몸 옆에 뜨거운 불이 떨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불편해지겠죠. 불편해지면 편안하고자 하는 행위, 소위 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내 옆에서 뜨거운 불이 타고 있을 때 편하고자 내가 일으킬 수 있는 행위의 방향에는 두 가지의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첫째, 내 옆에서 불이 활활 타는 것을 느끼면 우선 스스로 몸을 움츠립니다. 내 몸이 긴장하게 됩니다. 위험이 다가왔다든지 자신의 행복이나 편안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다가오면 사람은 긴장을 하죠. 그런 뒤 불을 끄기 위해 물을 갖고 온다든지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위험이 다가왔을 때 우선 자신을 움츠리거나 긴장하는 이런 행위, 이것 역시 자신이 행복하고자 하는 행위이고 육근이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는 그 방향이 바깥을 향하지 않고 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일으키는 행동의 방향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행위를 내행동이라고 합니다. 둘째,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가져온다든지 또는 타오르는 불과 자신의 거리를 띄워놓는다든지 하는 행동은 자기 바깥을 향하는 행동이겠죠. 이런 행동은 외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업은 외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내행동을 업이라고 할까요?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내행동까지 업이라고는 안합니다. 내 속으로 행위가 들어가고 있는 부분은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깥을 향하는 것, 외행동일 경우만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는 내행동, 육근이 편하고자 일으키는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내행동은 뭐라고 부를까요?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있어야겠죠. 수행은 내행동과 외행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인데 목적이 업하고 다릅니다. 5. 업(業)과 행(行)과 수행의 차이 업은 아집의 유지를 위하여 일으키는 행동이 업이죠. 그에 비하여 수행은 아집을 없애기 위하여 일으키는 행동이 수행이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내가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행동 중에서 바깥을 향하여 일으킨 외행동, 그것을 업이라고 한다면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행동 중에서 내행동은 불교경전에서는 그냥 행(行)이라고 부릅니다. 색수상행식, 이런 말 들어보셨죠? 행이라는 말은 이때의 행이라고 합니다. '상스카라(samskar?)'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바로 내행동을 뜻하는 말예요. 또 우리가 십이연기(十二緣起)에 가면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때 행이라는 말은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행동 중에서 내행동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았던 업을 정리해 보면 편하고자 일으킨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외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업이라는 말의 정의가 딱 떨어집니다. 고타마 부처님께서 살아서 이곳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가르치신 업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말뜻으로 하자면 행동, 움직임이요, 주체로 하자면 육근이요, 전제로 하자면 의지적이요, 목적으로 하자면 편하고자 일으키는 행동이요, 끝으로 방향으로 하자면 외행동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편하고자 일으키는 육근의 의지적인 행동 중에서도 외행동을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 보세요. 저는 자신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분명 "선재 선재라, 맞다, 훌륭하다." 그렇게 인가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에 우리가 업이라고 생각했던 거부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랄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딱딱한 실체랄지 그런 것하고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셨을 줄 압니다. 업은 외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안(內)이라고 본다면 내 바깥(外)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말 대신 육근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육근 밖에 존재하는 것을 뭐라고 이름했을까요? 내 바깥에 있는 것은 무조건 육경(六境)이라고 부릅니다. 육경이라는 말은 우리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울 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는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하는 것은 육근과 육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근은 단수이고 육경은 복수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존재하는 것, 즉 보면서 존재하고 들으면서 존재하는 것은 자기뿐이라는 거죠. 그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나머지는 어떻습니까? 나에게 보이면서 존재하는 것은 색, 들리면서 존재하는 것은 소리, 냄새 맡아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향, 맛으로 보여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맛, 느껴지면서 존재하는 것은 촉감, 그들이 종합되어서 존재되는 것은 법이겠죠.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육경이고, 나는 육근입니다. 부처님은 나와 남으로 나누지 않고 육근과 육경으로 재편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이 일으킨 행위가 업이고, 그 육근이 행동을 일으킨 방향이 바깥, 즉 육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육근이 바깥에 있는 육경한테 업을 일으키면서 그 업은 어디를 향하여 날아가겠습니까? 육경을 향하여 날아가겠죠. 그러면 그 업을 받은 육경은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안보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기 아름다운 꽃이 꽃병에 있다고 할 때 "꽃이 참 예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꽃은 육경이고 제 입장에서 보면 육근이 행동을 한 것이죠. 만약 제가 이 꽃병을 밀면 꽃병은 밀리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욕을 하면 여러분도 맞받아 욕을 하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이렇게 육근이 업을 짓게 되면 육경은 반드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육경이 보이는 반응을 불교에서는 보(報)라고 부릅니다. 육근이 일으킨 활동이나 행동은 업, 그것을 받은 육경이 보이는 반응은 보.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보!(業報)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을 할 때도 자와 비가 합쳐서 이뤄진 말로 이해했던 것처럼 업보 역시 업이라는 말과 보라는 의미를 떼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업이라는 말 따로 보라는 말을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즉 육근이 일으킨 의지적 행동은 업이고 그것에 대하여 육경이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업과 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업보라는 말을 공부한 셈입니다. 6. 업보(業報)는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관계 육근이 일으킨 것은 작용, 육경이 보이는 반응은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업보라는 말이 성립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교학 속에서의 삼단계 범주를 적용해야 합니다. 즉 존재와 사건, 관계의 범주라는 삼단계를 적용하는 것이죠. 존재라는 것은 그야말로 있는 겁니다. 사건은 존재가 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새가 날아간다고 합시다. 여기서 새는 존재이고 날아가는 것은 사건입니다. 세상은 존재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어 속에서 명사로 표현되는 것은 존재일 확률이 크고 동사나 서술어로 표현되는 것은 사건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근과 육경은 존재의 범주에 들어가고, 업과 보는 사건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존재든 사건이든 둘 이상일 경우,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존재나 사건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물어보라고 하십니다. 불교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업이라는 사건과 보라는 사건 속에는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습니다. 인과라는 말은 관계를 규정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업과 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은 좀더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인과는 의미심장한 말이고 불교에서 인과만큼 중요한 말도 드물기 때문이죠. 인과는 선행하는 사건과 뒤따르는 사건 사이에 필연적인 상응성(相應性)이 성립할 때 두 사건의 앞부분은 원인이라 부르고 뒤에 있는 사건은 결과라고 부릅니다. 대개 통속적으로 그렇게 부릅니다. '업'이 먼저 있고 '보'는 나중에 따르는 거예요. 이 업과 보 사이에 필연적인 상응성이 있습니다. 1리터의 기름을 넣어서 10킬로미터를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면 2리터의 기름으로는 20킬로미터를 가겠죠.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것이 인과요, 상응성입니다. 작은 원인에는 작은 결과가 나타나고 큰 원인에는 큰 결과가 나타나듯이, 좋은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나쁜 원인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콩에는 콩, 팥에는 팥으로 상응한다는 거죠. 이렇게 업과 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은 업이라는 사건과 보라는 사건 사이에 상응성이 성립함을 부처님께서 통찰하셨기 때문에 인과라는 말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말이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말입니다. 흔히 인과응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실제 경전에서는 업인과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업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서 보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넉 자로 이루어진 업인과보의 뜻을 원시불교 즉 근본불교적인 입장에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불교를 이해해 나가는 데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7. 업인과보는 진리 그런데 부처님께서 업인과보를 '법칙이다'라고 말씀하신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업인과보의 법칙. 왜 법칙을 붙인 것이 중요할까요? 법칙(法則, 다르마타)이라는 말의 의미는 불교교리에서 진리를 뜻합니다. 즉 업인과보는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통 다양한 논의를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흔히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진리를 뜻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혹자는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는 진리라고 번역하지 않고 사실(사띠아)이라고 번역됩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할 때 이것은 사실이지 진리라고 하기는 어렵죠. 이렇듯 사실과 진리는 거리가 먼 말입니다. 불교 안에서 진리라는 말을 찾아보면 다르마타 즉 법칙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인연소생, 상의상관, 연기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만 최초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표현은 업인과보인 것입니다. 즉 육근이 의지적인 행동으로 일으킨 업이야말로 유일한 원인이고 그 나머지 사건들은 모두 그것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업인과보의 법칙. 또는 내가 선하게 하면 반드시 선한 결과가 돌아오고 내가 악하게 하면 반! 드시 악한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은 진리라는 거죠. 이렇게 업이라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윤회(輪廻)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건 중에서 최소한 보편타당성이라는 요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들어맞는데 저기서는 들어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합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리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편리한 환상이나 억지된 강요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진리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빠짐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타당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범우주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업인과보가 진리라는 말 속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업인과보라는 틀에 속속들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업인과보가 들어맞지 않는 점도 있다는 겁니다. 가령 아무리 열심히 살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사람도 끝내는 궁핍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약고 탁한 사람인데도 호의호식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죽하면 부조리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흔히 사회의 부조리라는 말을 쓰잖습니까? 업인과보를 사회 윤리적인 입장에서 표현을 바꾸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바뀌죠. 이 세상 모든 것이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적용을 받고 내가 공들인 만큼 결과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곰곰이 반추해 보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전혀 엉뚱한 예상 밖의 결과를 만나면서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조리(不條理)하다고 말합니다. 때때로 사회부조리 현상에 부딪치고 내 뜻대로 안되는 일에 봉착하면 우리는 참 힘들어집니다. 부조리라는 말은 조리에 맞지 않다는 뜻이죠. 인과법에 맞으면 조리라고 하죠. 하지만 원인과 결과가 상응성이 없으면 부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조리현상은 세상에 존재합니다. 부조리가 존재하는 한 업인과보를 법칙이다, 혹은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뜻대로 안되는 세상살이,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불행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는가 하면 반대로 별로 잘한 일도 없는데 20억원짜리 복권이 당첨되는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업인과보로 설명이 안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운명 혹은 신의 뜻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가능할까요? 부처님 당시에도 삼종외도(三種外道)라 해서 유신론, 운명론, 유물론의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런 종교들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잘 설명해 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고, 운명이기 때문에, 또는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간단할 테니까요. 그래서 유신론적인 종교도 세상에 존재하고, 운명론적인 사고방식도 암암리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신을 중심으로 한 사유체계, 또는 유물론이나 운명론을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업인과보에 적용했던 보편타당성이라는 요건을 이 견해들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어야만 진리이기 때문이죠. 신을 중심으로 한 유신론적인 종교, 기독교 같은 경우가 해당되겠죠. 부처님 당시는 브라만교입니다. 그 종교들도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악에서 선이 나오고 선에서 악한 결과가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온통 어처구니없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는 선하게 산 사람이 행복한 결과를 맞는 경우도 있고 악하게 살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죄를 지었다면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현상을 지켜보면 신이나 운명론은 맞지 않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 네가 죄를 받고 네가 선하게 살았으니 네가 상을 받아라 한다면 그건 업인과보가 착착 들어맞는 세상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신이나 운명론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결정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도 신의 뜻으로 짓고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내 몸을 움직인 것에 죄가 있지만 신 역시 죄를 짓게 한 책임이 없다고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임은 피조물에게만 묻습니다. 영광은 신에게만 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앞뒤의 말이 맞지 않으면 진리가 아닙니다. 타당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8. 절충론과 제3의 진리론과 무진리론(無眞理論) 오늘 우리는 업과 윤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윤회가 불교의 근본교리라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윤회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는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윤회를 통해서 업인과보가 진리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이끌어내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100퍼센트 완벽하게 세상에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업인과보는 세상에 일어나는 현상을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에는 운명론이나 유신론을 적용해 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충안입니다. 진리는 절충이 아니죠. 특히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절충은 결코 아니죠. 그래서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업인과보도 50점, 다른 종교도 50점밖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는 제3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편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윤리론자들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다는 논리는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무진리론은 우연론을 한 축으로 하는 일종의 절충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3의 진리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업인과보는 내 안에서 모든 것의 원인을 찾습니다. 다른 종교인 유신론과 운명론은 내 밖에 있는 무언가가 나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업인과보는 진리를 내 안에서 찾았고, 다른 종교인 유신론과 운명론은 밖에서 진리를 찾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제3의 진리는 내 안도 아니고 내 밖도 아닌 곳에 진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제3의 장소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서 제3의 진리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진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3의 진리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절충도 안된다고 할 때 업인과보와 운명론, 유신론, 유물론 가운데서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논리는 우리를 밀어넣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업인과보를 택하든지 삼종외도, 즉 다른 종교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사상도 50점, 업인과보 즉 불교도 50점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진리로 택하시겠습니까?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근거를 가지고 선택에 임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유신론 등을 가설이고 업인과보는 사실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설과 사실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운명론이나 유신론, 유물론은 가설에 입각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신을 봤습니까? 못 봤지만 있다라는 전제하에 믿는 것입니다. 신이 있다고 가정할 때 세상의 모든 이치를 신의 뜻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못 본 것을 잠정적으로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설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서 업인과보는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느낀 것입니다. 자명한 사실로서 체험되고 경험된 것입니다. 업인과보가 50점이고 다른 종교사상이 똑같이 50점이라고 해도, 불교가 성취한 50점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고 다른 종교가 성취한 50점은 '가설'에 의한 50점입니다. 점수가 같다면 당연히 우리는 사실을 선택할 것입니다. 9. 윤회이야기 앞서 여러분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궁핍함을 면치 못하고 엉망으로 살아도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두고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생에 지은 업은 다음 생에 다가올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잘 본 것으로, 사실의 업인과보를 포기하지 않는한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업인과보의 50점을 선택하고 나머지 50점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윤회라는 관점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생, 내생이라는 윤회도 어쩌면 가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정해야 합니다. 전생을 기억할 수만 있어도 사실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은 현생뿐입니다. 전생과 내생 모두 가설일 뿐입니다. 신의 뜻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나 전생, 내생이라고 하는 것 모두 가설에 불과하겠죠. 그러나 불교는 업인과보라고 하는 사실에 가설이 더해진 것이고 반대로 다른 종교사상은 사실은 없고 가설만 존재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즉 사실을 중심으로 하는 가설로서 업인과보가 삼세윤회(三世輪廻)한다는 것은, 가설로만 이뤄진 다른 종교사상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물지 않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 가설의 50점, 즉 내생은 오지 않았는데 '있다'라고 하는 가정까지 부처님은 사실의 영역으로 끌어올립니다. 일단 업인과보는 사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명 안되는 부분을 윤회라고 하는 가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윤회라고 하는 가설을 사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섯 가지 측면에서 설명을 베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윤회의 '주체'에 관련된 문제랄지 윤회의 '원인', '과정', '관계', '기억'에 관련된 주제를 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전생이 있었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는 기억했다고 하고 누구는 안했다고 하고 논쟁이 심합니다만 당장 내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기억이 안나죠. 불교는 사실만을 말합니다. 사실이라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억과 관련된 부분을 부처님께서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통해 결국 해명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사실로써 공감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오늘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연기의 가르침에 입각해 수행하여 체험해 볼 때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에필로그 오늘의 제 강의를 요약하면 윤회를 함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논리적인 과정과 근거를 거쳐서 윤회한다는 관점에 이르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결과론이라기 보다는 동기론입니다. 사람들이 성공하고 싶어합니다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과정이 훌륭하면 성공은 결과로서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 과정이 충실하고 탄탄하고 철두철미하고 완벽할수록 결과는 자명한 것입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결론적인 관점입니다. 여기서 윤회라고 하는 결론적인 관점이 벌어지기 위한 과정, 논리적인 절차와 흐름, 이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분들 중에는 보살님도 많고 연세 드신 분도 많아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들으시고 딱딱하게 느끼실 수 있겠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직접적으로는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부처님의 경전을 추구해 볼 때 우리에게 전생이 있었고 내생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업을 짓습니다. 반응이 나타납니다. 상응하는 반응이 나타나는 것만 아니라 아주 어처구니없는 반응도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업인과보로는 절반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윤회한다는 대안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대안으로 우리는 업과 윤회에 관하여 고타마 부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베푼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업이 지어지고 윤회로 연결되는 그 과정상의 절차를 여러분들께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짓겠습니다. 나 아항 빅카웨 상체타니카낭 카마낭 카타낭 우파지타낭 아파티상웨디트와 비얀티바왕 와다미, 탕 처 코 딧테워 담메 우파파장 와 아파레 와 파리야예. 비구들이여, 의도적으로 업을 짓고 또 쌓아두었다면 그 과보를 받지 않은 채 그 업이 근본적으로 끝난다라고 나는 결코 설하지 않는다. 그 업의 과보는 현생에 받든지 아니면 반드시 내세에라도 받고야 만다. * 이 글은 대한불교진흥원이 실시하는 다보문화강좌의 강연내용을 녹취, 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