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뜨락

[스크랩] 슬기로운 시골 생활

마음정원(寂光) 2011. 9. 29. 11:38

 

시골에선 흔해 빠진 것이 호박인데 막상 모종을 만드려 하니 호박씨가 없다.

작년 장터에서 한 주먹에 천 원 했던 것 같은데 

호박씨 5 립에 1천원이란다. 

헐~

"무슨 호박 씨가 이렇게 비싸당가요?"

"맷돌 호박이라 그라요"

 

내게 필요한 건 그냥저냥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노란 호박이라

그냥 돌아왔다.

비싸서 그런 게 아니다. -.-

 

농협에 들러 공과금을 내려는데 오늘 따라 뇬네들이 많이 몰려

대기 시간이 길다.

귀도 어두운데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뇬네들에게 했던 말 또 하며 응대하는

창구 직원들이 무척 끈기 있고 착하다는 생각을 했다.

뇬네들은 의심도 많아 궁금한 것은 꼬치꼬치 또 캐묻는다.

대답은 또 다른 궁금증을 자극해 질문과 답이 지루하게 이어지는데

설명은 끝까지 듣는다.

금방 잊어 먹을 걸 왜 또 묻는지 모르겠다.

 

시골 은행에서 복잡한 상품을 취급하면 골치 아프겠다 생각하며

창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이 할머니가 아는 체를 한다.

나는 있는 돈 꺼내 쓰기 바쁜데 할머니는 정기예금을 들고 계셨다.

"워쩐 일이요?"

앗! 우리 마을 할머니다.

날마다 봐도 이런 데서 보면 좀 색다르게 반갑다.

눈썰미가 없어서 나이는 내가 더 젊은데 내가 먼저 알아보는 예가 거의 없다. 

더군다나 노인들은 제복 입은 군인처럼 그 사람이 그 사람 처럼 보인다.

"워쩐 일이긴요? 제가 다 봤는데 다 맞으니까 그만 하고 가시게요"

 

할머니는 얼마나 더 사실려고 돈을 맡겨 둘까. 있는대로 그냥 다 쓰지.

"들어갈 때 같이 가시게요. 태워 드릴게요. 그 대신 천 원만 주세요. ㅋㅋ" 

할머니가 진짜로 천 원짜리를 꺼낸다.

이럴 땐 아무리 마음을 비웠다 해도 고민된다.

받을까 말까......

 

"호박씨 있으면 좀 주세요"

"그런 거야 주지라이. 근디 같이 갈 친구가 또 있어라우"

"그믄 언능 오시라 하세요. 같이 가시게요"

병원 다녀 오시는 할머니를 보니 역시 우리 마을 할머니시다.

"근디 개 사료를 사 갖고 가야헌디...."

"긍께 언능 사서 가게요. 느려서 애 터져 죽것네이"

 

사료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한 포대가 15키로인데 이걸 어떻게 버스로 운반하려고 그랬는지

노인네들의 용기가 궁금했다.

"근데 저 안 만났으면 이걸 어떻게 갖고 가시려고 했어요?"

"가면 가지라우"

차암 나, 가면 가긴? 어떻게요?

웃음만 나왔다.

불쌍한 뇬네들....

 

날이 어둑해졌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대문이 없으니 누가 찾아오면 곧바로 현관문 소리가 나니 깜짝 놀란다.

집안 개들이 거의 동시에 소스라치게 짖어대니 놀람도 두 배가 된다.

사료 두 포대를 집 안 마루까지 옮겨 드렸던 그 할머니다.

"맛만 좀 보라고 갖고 왔응께 그냥 드시요"

딱 그말만 하고 건내는 비닐봉지를 보니 오가피주 한 병에 시금치가 한 다발이다.

공짜로 차를 얻어 타고 온 것도 미안한데

병원 다녀올 동안 기다렸다 무거운 사료까지 집안으로 운반해 준 게 고마웠던 모양이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이 "멀라구 가져 왔어요. 그냥 드시지" 지만

나는 그따구 말은 하지 않는다.

500미터도 넘는 여기까지 지팡이 짚고 오신 게 어딘데 멀라구 가져왔냐니?

그건 예의가 아니다.

그것 보다도 무거운데 조금만 갖고 오시지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오메 맛있게도 생겼네요.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하는 게 낫다.

그래야 다음에 또 가져다 주시더라.

 

마늘, 상추, 무,  가지 같은 채소는 대개 이런 식으로 얻어 먹는다.

가끔 오가는 길에 병원 다니시는 노인네들 태워 드리고,

가뭄 때는 지하수 가져다 쓰게 하고,

무거운 물건 어쩌다 한 번 들어 드리는 것으로 그 고마움을 떼운다.

죄다 몸으로 떼우는 거라 미안해질 때는 노인정에 많이 모여 계실 때

아이스크림 한 개씩 사드린다.

그야봐야 만 원 미만이다.

다만, 큰 돈(만원 이상)은 안 쓴다.

 

시골에 좀 살아본 경험으로 남들이 다 재배하는 것은

그래서 굳이 내가 또 심을 필요가 없다.

골고루 얻어 먹을 수 있게 할머니들도 집집마다 다른 채소를 심었으면 좋겠다.

한 집서는 브로클리, 한 집서는 치커리, 한 집은 당귀, 이런 식으로.

그러면 나의 농촌 생활이 훨씬 풍요로워질 텐데...

   

                   <이름이 늙어 보여서 그렇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묘한 멋이 있는 꽃, 할미꽃.>

 

몇 년간의 고민 끝에 좋은 마음가짐으로 귀농했다 적응하지 못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도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탓하며 좋게 돌아가지 않는다.

시골 인심이 더럽다느니 시골도 예전 시골이 아니라느니 하며

가만히 있는 시골 사람들을 영악한 사람으로 몰아세운다.

생활기반이 취약해 먹고 살기 힘들다더거나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생활을 할 수 없다든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건 국가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가 시골 살아봐서 아는데"

어쨌든 시골 사람은 도시 사람보다 순박하고 시골 인심이 훨씬 낫다.

시골 텃세를 경험했다면 그건 시골 사람 탓이 아니라 자기 탓이다.

시골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자신을 시골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러면 아무리 아닌 체 해도 티가 나는 법이다.

농촌으로 온 이상 농촌생활을 해야 하는데 몸만 농촌에 있고

생각과 마음은 농촌을 닮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테면, 마을 사람들이 죄다 뙤약볕에서 일하는데 지들끼리만

삼겹살에 소줏잔 기울이며 흥청거린다든가

도둑도 없는데 높은 담장에 감시카메라를 놓는다든가 하는 것들.

 

                                                             <지오도큐사> 

 

생긴 것은 결코 촌스럽지 않고 언능 봐선 촌티도 안 나는데 ㅋㅋ 

나는 시골에서 시골스럽게 입고 먹으며 아주 잘 산다.

일도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는데 마을 사람들로부터 쉬엄쉬엄 하란 말을 듣고

아부지는 내게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닌데 효자 소리 듣고,

그냥 지나치긴 뻘쭘해서 어디 가시냐며 약간 숙였을 뿐인데

인삿성 밝다는 소릴 들으며

이런 저런 푸성귀를 뻔뻔하게 잘도 얻어 먹으면서도 아주 잘 지낸다.

 

어떻게 살까 뭘 할까 생각할 것도 없이

마을이 고추 심는 분위기면 다음 장날 고추 모종 사 심고,

고구마 심는 분위기면 고구마를 심는다.

나도 좀 살아봐서 아는데 하루 이틀 늦게 심는다고, 한 두 달 늦게 한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나만 서둘러 갈 이유가 없다.

뒤쳐졌다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러다 남는 시간에 남는 힘 조금 이웃을 위해 쓰고,

남는 꽃 달라면 주면서

남는 채소 조금 얻어 먹으면서 지내면 된다.

인생이란 시간을 잿빛으로 스스로 채색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하우스 내에서 싹이 튼 오이 모종을 보면서 문득 내 생활에 의문이 든다.

오이는 어차피 한 판 다 심을 것도 아니라 나눠 드릴 테니 사지 말라고 했다치더라도

할머니가 호박 씨 갖다 주면서 당신네 것까지 모종 만들어 달랜다.

헐~ 이 할머니가 이제 나를 막 대하는 건 아닐까?

나를 다 파악해 버린 건 아닐까?

 

 

 

                Tango Flamenco - Armik

출처 : 하얀미소가 머무는 곳
글쓴이 : 한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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