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봉은사 초청법문)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지옥에 있는 생명들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 없을 터인데도 죽음 이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서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혜가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은 뒤에 불선업의 과보로 인해 사악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서 선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선을 가져오는 행위가 바로 수행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네 가지의 물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 수, 화, 풍입니다. 몸에서 볼 때 지대는 땅의 요소로서 단단하고 부드러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수대는 물의 요소로서 몸의 혈액과 수분 등의 요소를 말합니다. 화대는 뜨겁고 차가움의 요소입니다. 풍대는 바람의 요소로 호흡이나 진동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죽었다면 이는 네 가지 요소인 4대의 변화가 온 것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4대의 성품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죽으면 몸은 부드럽다 딱딱해 지고, 수분이 증발하고, 따뜻하다 차가워지고, 움직이다 움직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이미 즉시 다른 곳에서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이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모두 원인과 결과에 의해 연속적인 과정을 밟고 있을 뿐입니다. 선업은 선업의 과보를 받아 이미 결정이 되었을 것이고 불선업은 불선업의 과보를 받아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때 뿌린 대로 거두는 오직 각자의 엄연한 삶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어떤 다른 힘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생명을 순환하고 있습니다. 이 순환의 싸이클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고 하면 이것은 아라한이 되었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번뇌를 해결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갈애로 인하여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영원히 생명의 순환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항상 낳고 죽는 괴로움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낳고 죽는 것이 진정한 괴로움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높은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수행을 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수행을 했다고 해도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요구가 절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것을 알았다 해도 생각으로 안 것과 수행을 통해서 지혜로 안 것은 다릅니다. 지혜로 알았을 때만이 완전한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과연 살아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선하게 사는 것이며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탐진치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일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 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을 누구나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남의 죽음은 보이는 데 자신의 죽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은 두려움이고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괴로움을 피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피한다는 것입니다. 피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선업에 속합니다. 죽음을 좋아해서 죽는 것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나 사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낳고 죽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분들이 역대의 부처님들이십니다. 부처님만 불사의 문을 열어줍니다. 그 누구도 생명의 연기를 끊는 법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상에 간다고 해서 영원히 그곳에 살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어느 곳에서인가 다시 몸을 만들게 됩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낳고 죽는 번뇌를 근본적으로 해결합니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서는 업에 따라 수명이 주어지고 천상인 색계, 무색계에서는 그 세계의 수명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다 명이 다하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선심은 선과보를 만들고 불선심은 불선의 과보를 만들어서 그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가 다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선과보에 의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선의 과보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적인 괴로움이 아니고 불선의 과보로 인한 심각한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아예 태어나지 않는 선과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변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알고, 이런 변화에 나라는 것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조건과 원인과 결과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인간의 집착이 무지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면 도과를 성취하여 윤회를 끊는 흐름에 들게 됩니다.
수행을 하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법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이미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죽어야 하고 다만 시기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그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부모님이나 가족이 죽어서 슬플 때 자신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나라고 하는 유신견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싫어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고, 나는 항상 하고,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거나 아니면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과 이별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준비된 자에게는 준비한 만큼의 보상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언제든지 삶과 이별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진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허무나 염세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도 언젠가 죽는 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준비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고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마음은 선한 마음이고, 그런 준비를 하는 사람은 그에 따른 합당한 과보가 따를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네 가지가 있는데 모두 다음과 같은 예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첫째, 등잔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진 경우가 있습니다.
둘째, 등잔에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꺼진 경우가 있습니다.
셋째, 등잔에 심지와 기름이 다해서 불이 꺼진 경우가 있습니다.
넷째, 등잔에 바람이 불어서 꺼진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번, 예의 경우는 등잔불에 기름이 떨어진 경우는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을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둘째 번, 예의 경우는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꺼진 경우는 몸에 병이 나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번, 예의 경우는 심지와 기름이 다해서 불이 꺼진 것은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번, 예의 경우는 바람이 불어서 꺼진 것은 불의의 사고나 자연재해로 인해 죽는 경우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지 이상의 네 가지 유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먼저 가는가, 늦게 가는가 하는 문제의 차이만 있습니다. 죽음은 조건입니다. 그리고 업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죽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다음 생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생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죽기 전의 마음인 사몰심(死沒心)이 다음 생의 마음으로 바로 나타나는데 결생심(結生心)이라고 합니다. 결생심을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고도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순간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원인과 결과는 자신이 행한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의 적용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에 의해 다음 마음이 생길 때 탄생 최초로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으로 오온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온의 성별과 모양 성격 지능 등등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상당부분 일생의 밑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결정된다고 해서 일생을 꼭 그렇게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잉태된 모태에서부터 외적 조건과 맞닥트리게 됩니다. 결생심과 상관없이 어머니의 잘못으로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인간의 삶은 최초 예정된 대로 살지 않고 다시 내적 외적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탄생된 것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직 인간만 예정된 삶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았는데 어찌 선업을 쌓아 새로운 삶으로 반전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선 등잔불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 의해 또는 업의 과보에 의해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비참하게 죽고 그렇지 않게 죽고의 문제는 반드시 다음 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죽을 때의 마음이 문제이지 죽는 상황은 별개입니다. 아라한도 소에 치어 죽기도 합니다. 다만 업의 과보를 벗어날 수 없어서 그 과보를 받고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신통제일의 목련존자께서는 심하게 구타를 당해 맞아 죽었습니다.
아라한이나 부처가 아니고서는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합니다. 죽은 자와 다시 태어난 자는 같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개이고 어쨌거나 죽어서 바로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색계, 무색계 중에서 어느 곳에서인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죽어서 어디를 가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는 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죽어서 가지고 가는 재산은 계율을 가지고 갑니다. 계율을 지켰으면 선업을 쌓은 것으로 업의 과보를 받아서 그 결과대로 태어납니다. 죽으면 시간이 머물지 않듯이 마음도 머물지 않고 바로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을 죽음이 아니고 불선업의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오늘 이 자리에서 알아차림으로 새로운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죽을 때 자살을 하는 경우는 매우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불교는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계율입니다.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다른 생명의 죽음도 인위적으로 끊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생이 불선업이고 그 과보가 크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윤회를 하기 때문에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을 해서 영원히 생명을 끊을 수만 있으면 애써 수행을 안 해도 됩니다.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 고통스럽게 죽으면 다음생에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의외로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께서나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하나 같이 지옥이 있는 것을 주장합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을 리가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을 선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두려움 때문에 애써 지옥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을 해보면 원인과 결과가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경전에 있는 말들이 모두 사실에 입각한 것임을 스스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됩니다.
자살에 대해서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아라한의 경우는 이미 윤회가 끝나서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예외적으로 자살을 허용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아라한이지만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경우에만 허용된 것입니다. 아라한은 이미 탐진치가 불타버려서 집착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살아야 할 욕망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두려움이나 괴롭게 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라한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아픔까지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악성 피부병이나 기타 불치의 병으로 고생을 하거나 대중들에게 옮기기까지 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상좌불교에서 비구계를 받을 때 여러 가지 질문 중에 악성 피부병이나 옴이 있는지 묻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면 비구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도 병으로 인해 상가가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상좌불교에서는 개미나 모기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안락사를 허용하겠습니까? 살아있는 생명을 때려죽이거나 뜨거운 물에 집어넣고 끓여서 먹는 다던가, 살아있는 낙지를 입에 넣고 그냥 씹어 먹는 행위는 살생의 과보를 받습니다. 살생을 하는 순간에 죽는 대상이나 자신에게도 나쁜 파장이 생길 것입니다.
살생의 과보는 수명이 짧다던가, 병으로 인해 고생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과보를 받습니다. 이 세계는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무엇이나 행한 대로 받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악이 승리하는 세계가 될 것입니다. 사실은 행한 대로 받지 않는 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각자가 한 일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어 다시 그대로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마음에 종자가 있어서 다음 마음에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생에는 과보가 따르는 것이 있고 따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살생의 과보가 성립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입니다.
첫째, 살아있는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살아있는 존재라고 알아야 합니다.
셋째, 살아있는 존재를 살생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져야 합니다.
넷째, 살아있는 존재를 살생하려고 시도합니다.
다섯째, 살아있는 존재가 결과적으로 죽습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 합당한 불선업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런 악한 행위를 했을 때 상대에 따라 과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살생의 대상이 선한가, 선하지 못한가에 따라 과보가 다르며 큰 짐승과 작은 짐승에 따라 과보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행인의 따귀를 때렸을 때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따귀를 때렸을 때의 벌이 다를 것입니다. 또한 지나가는 행인을 죽였을 때의 과보와 부처님이나 성자를 죽였을 때의 과보가 다를 것입니다.
누구나 훌륭한 죽음을 위해서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하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선하다는 것은 첫째로 관용입니다.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러한 관용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보시가 뒤따릅니다. 둘째로 지계입니다. 재가자는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계율은 막아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율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선한 출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수행입니다. 실천적인 수행을 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했을 때라야 비로소 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무엇을 하거나 할 때 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 몸만 아파야지 마음이 아파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괴롭다면 공연히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것은 불필요한 반응을 한 것입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 것처럼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조용히 아픈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선하게 살면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행하면 출세간의 지혜가 나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좋은 곳에 태어나지 않고 윤회가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열반을 얻기 위해서 살아야 하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묘원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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