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분명한 앎(知)
지난 번 ‘현재에 머물기-명상수행에세이', 란 주제와 관련하여 좋은 질문과 논의가 있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분명한 앎(知, sampajaa)’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것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 우선적으로 ‘삼빠잔냐’를 주의 깊은 관찰로서 일단은 ‘형상이나 모양을 안다는 개념이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이것은 필자와 조금 다른 견해이다. 삼빠잔냐가 ‘주의 깊은 관찰’과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형상이나 모양에 대한 앎이 없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가 없다. 이것을 확인을 위해서는 호흡명상을 기술하는 아래의 『염처경』의 사례를 다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는 아란냐로 가고, 또는 나무 아래로 가고, 또는 텅 빈 장소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아서, 면전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는 알아차림하면서(sato) 숨을 들이마시고, 알아차림하면서 숨을 내쉰다. 길게 숨을 마실 때는 ‘길게 숨을 들이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며(sampajanati), 길게 숨을 내쉴 때는 ‘길게 내신다’고 분명하게 안다. 짧게 숨을 마실 때는 ‘짧게 숨을 들이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며, 짧게 숨을 내쉴 때는 ‘짧게 내신다’고 분명하게 안다.
여기서 사용하는 ‘분명하게 알다(sampajanati)’는 명상형인 ‘분명한 앎(sampajaa)’의 동사형으로서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행위에는 ‘형상과 모양이 존재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위의 인용문을 보면 분명하여 진다고 본다. <숨이 길면 길다고 분명하게 알고, 숨이 짧으면 짧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 문장에서 분명하게 아는 행위로서 삼빠잔냐에는 분명하게 형상과 모양이 존재한다. 숨이 들어오고, 혹은 나감은 분명한 형상이고, 모양이 존재한다. 또한 숨의 길고 혹은 짧다는 인식에도 역시 모양과 형상이 존재한다.
들어옴과 나감, 혹은 길고 짧음이란 개념이 없으면,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동물들도 호흡을 한다. 그러나 동물은 호흡의 들어옴과 나감, 길고 짧음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다. 또한 설사 인간이라고 해도 호흡명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역시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할 수가 없다. 이점을 비구들에게 호흡명상을 가르치는 붓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명상수행센터에서도 숨이 들어오면 ‘들어옴’이라 하고, 숨이 나가면 ‘나감’이라고 분명하게 알라고 가르치는 우리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먼저 호흡의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알아차리고(念, sati), 그럼 다음에 현재에서 그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숨이 긴지 짧은지 분명한 앎(知, sampajaa)이 뒤따른다. 알아차림에는 개념적인 요소가 없다. 단지 호흡에 주의를 둔 지각의 일종이다. 반면에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에 기반하여 대상의 표상, 모양에 대한 분명하게 앎을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정념(正念)정지(正知)의 순서로 반드시 함께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의 논의는 분별적 앎과 분별이 없는 앎의 구별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감, 숨의 길고 짧음은 분명하게 모양과 형상이 있는 분별적인 앎이다. 반대로 분별이 없는 앎을 보통 지혜, 반야(prajna)라고 한다. 삼빠잔나(sampajaa)의 경우에 접두어 ‘sam’은 ‘바른’ 혹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pajaa’는 지혜[智]를 의미하는 paa와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반드시 분별없는 지혜와 동의어는 아니다. 지혜로 다가가는 이전의 단계를 설명하는 술어정도가 된다.
그러면 반야, 곧 지혜를 어떻게 얻게 될까요? 이점에 대해서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온건하고 점진적인 길이다. 모양과 형상에 대한 분별적인 앎을 통해서 그것들의 무상과 실체 없음을 자각하여 가는 길이다. 이것은 알아차림, 분명한 앎, 그리고 위빠사나의 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에 대한 많은 관찰적 경험을 통해서 획득된다.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신에 굳건하다.
다른 하나의 급진적인 일종의 깨달음이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직관으로 뜻밖에 문득 찾아온다. 모양과 형상이 모두 조건 지어진 인연의 결과로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통찰이다. 직관은 사물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곧장 가로질러 뛰어 들어간다. 대상의 형상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문득 그 본질을 체득한다.
분별이 있는 앎은 <이것은 단지 이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분별없는 앎은 <이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때야 비로소 이것은 바로 이것이다.>고 말한다. 분별이 있는 앎은 현실적인 집착과 자기 동일시의 애착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반면에 분별없는 앎은 공허해지고 현실에서 유리되는 위험을 함께 가진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해야 하고, 보완적인 관계로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분별이 있는 앎과 분별이 없는 앎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분별이 있는 앎이 분별없는 앎을 불러 일으켜 세운다. 반대로 분별없는 앎은 분별이 있는 앎을 보다 깊게 경험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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