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만들어 내는 마음씀
사무량심(四無量心)=자비희사(慈悲喜捨)
- 해강스님
♣ 내 행복 요리사는 바로 나 자신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에 따라 바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겠죠. 그렇지만 이 바람이 향하는 것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한 마디로 행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절대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에 따라 바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겠죠. 그렇지만 이 바람이 향하는 것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한 마디로 행복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절대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누가 만들고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요?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나 자신이 ‘내 행복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재료를 넣어 정성껏 만들어야죠. 또 사람에 따라 똑같은 재료로도 각각 천차만별의 음식맛을 내기도 해요. 어떤 사람이 만들면 음식이 아주 맛좋고, 어떤 사람이 만들면 덜 맛있고, 어떤 사람이 만들면 아주 맛이 없지요. 그게 솜씨겠죠. 그런데 이 솜씨라는 게 타고나는 것도 있겠지만 많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요. 나 자신이 ‘내 행복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재료를 넣어 정성껏 만들어야죠. 또 사람에 따라 똑같은 재료로도 각각 천차만별의 음식맛을 내기도 해요. 어떤 사람이 만들면 음식이 아주 맛좋고, 어떤 사람이 만들면 덜 맛있고, 어떤 사람이 만들면 아주 맛이 없지요. 그게 솜씨겠죠. 그런데 이 솜씨라는 게 타고나는 것도 있겠지만 많이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행복요리의 핵심재료는 ‘자신의 행동’
이렇듯 행복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필요합니다. 이 재료를 외부적인 재료와 내부적인 재료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돈·재산·명예·사회적 지위·폭넓은 대인관계 같은 것은 외부재료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하든지 만고진리로 필요한 노력·사랑·지식 등은 내부재료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외부적 재료나 내부적 재료나 나 스스로가 가꾸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나의 노력과 행동에 의해서 가꾸어낸 것이죠. 편의상 내부재료니 외부재료니 하는 것으로 나눠보긴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행동’이라는 재료가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것은 ‘행복’이라는 요리를 만들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재료죠.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재료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행동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합니다. 삼업(三業 ; 身口意), 즉 말과 몸과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행동은 여러 가지로 보이지만, 결국은 이 3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 가장 중요한 재료, 마음씀
그런데 이 말과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말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행동을 바꾸어가고 몸으로 하는 행동이 말과 마음을 바꾸어갑니다. 서로 영향을 주며 바뀌어가는데 그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면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마음씀입니다. 사람은 결국 마음쓰는 대로 말하고 마음쓰는 대로 행동하니까요.
물론 반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서 마음씀도 바뀌어가기도 하죠. 말을 거칠게 쓰면 마음도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말을 부드럽게 쓰고 좋은 말 깨끗한 말을 쓰면 마음도 그렇게 변해갑니다.
그러나 영향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말이 몸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보다 마음씀이 말에 영향을 주고 몸으로 하는 행동에 끼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러니 행복이라는 요리를 만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는 ‘마음잘씀’이 되겠지요.
♣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마음이라는 것이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생각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생각이고 불교의 사상인데요.
화엄경에 이런 게송이 나옵니다.
화엄경에 이런 게송이 나옵니다.
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應觀法界性一切唯心造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應觀法界性一切唯心造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
마음은 요술쟁이와 같아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들어낸다, 마음은 화가처럼 하얀 종이 위에 무엇이든 다 그려낸다는 말이죠. 결국 마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결국 행복을 위한 게 아닌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왕자라는 지위와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서 출가자의 길을 가셨을까요? 왕자라는 지위와 물질적 풍요가 주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 거죠. 정말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일까, 부처님은 그것을 찾아 출가하셨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이 바로 부처님께서 내놓으신 진정한 행복인 거죠.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고통에서 벗어난 진정한 행복은 열반이라는 게 그분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왕자라는 지위와 풍요로운 삶을 버리고서 출가자의 길을 가셨을까요? 왕자라는 지위와 물질적 풍요가 주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신 거죠. 정말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무엇일까, 부처님은 그것을 찾아 출가하셨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이 바로 부처님께서 내놓으신 진정한 행복인 거죠.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고통에서 벗어난 진정한 행복은 열반이라는 게 그분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면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수행법이죠. 팔정도와 육바라밀이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 열반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된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육바라밀이든 팔정도든 수행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결국 말쓰고 몸쓰고 마음쓰는 것을 뜻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말쓰고 몸쓰고 마음쓰는 것이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쓰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것은 도를 닦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가자나 재가자나 마찬가지예요. 도(道)는 바로 길이요, 도를 닦는다는 것은 진정한 행복의 길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 행복을 만들어 내는 마음씀 - 사무량심(四無量心)
그렇다면 마음을 언제 어떻게 써야 할까요?
절에 오는 날만 행복에 이르는 마음을 씁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항상 마음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사업을 쓴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늘 쓰는 그 마음을 올바로 잘 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절에 오는 날만 행복에 이르는 마음을 씁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항상 마음을 쓰면서 살아갑니다. 사업을 쓴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늘 쓰는 그 마음을 올바로 잘 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의 마음을 어떻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많이 말씀하셨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이고 바탕이 되는 것이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씀, 한량없는 마음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행복으로 이끄는 마음쓰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고결한 마음씀’, ‘훌륭한고 청정한 마음씀’, ‘나를 극락세계로 이끄는 마음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많이 말씀하셨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이고 바탕이 되는 것이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네 가지의 무량한 마음씀, 한량없는 마음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행복으로 이끄는 마음쓰는 방법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고결한 마음씀’, ‘훌륭한고 청정한 마음씀’, ‘나를 극락세계로 이끄는 마음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말합니다.
자(慈)란 더불어서 함께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
비(悲)란 더불어 함께 슬퍼하는 마음,
희(喜)란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마음,
사(捨)란 모든 존재와 더불어 평등한 마음, 모든 존재를 차별두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자(慈)란 더불어서 함께 사랑하며 아끼는 마음,
비(悲)란 더불어 함께 슬퍼하는 마음,
희(喜)란 더불어 함께 기뻐하는 마음,
사(捨)란 모든 존재와 더불어 평등한 마음, 모든 존재를 차별두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사무량심은 이렇게 마음을 썼을 때 나의 마음도 비로소 평온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무량심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자비(慈悲)와 희사(喜捨)입니다.
그리고 이 사무량심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자비(慈悲)와 희사(喜捨)입니다.
♣ 자비와 사랑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비와 무엇이 다른 것이냐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자비와 사랑은 같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좀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은
그것 자체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곧 나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 자체가 절대적으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렇게 여기는 나의 자아관념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생각, 내가 있어 이것이 내 것이고 사랑스럽고 소중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사랑인데, 이런 사랑은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 속에 자기애가 끼어있고, 자기 편견이 들어잇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자기애를 에로스, 종교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구분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로운 사랑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자(慈)란 본래 우정·친구란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기쁨을 주는 것, 이것을 자(慈)라고 합니다. 비(悲)란 슬퍼하다·동정하다·연민을 느끼다, 더 나아가 괴로움을 없애주다란 뜻입니다.
자(慈)란 본래 우정·친구란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되어 기쁨을 주는 것, 이것을 자(慈)라고 합니다. 비(悲)란 슬퍼하다·동정하다·연민을 느끼다, 더 나아가 괴로움을 없애주다란 뜻입니다.
한자에서는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고 해요. 발고(拔苦)는 괴로움을 뽑아낸다는 뜻이고, 여락(與樂)은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죠. 여기서 여락이 자(慈)요, 발고가 비(悲)에 해당하겠죠. 다른 존재에게 기쁨을 주는 것, 다른 존재에게서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 자비라는 것입니다.
옛부터 스님들은 ‘자(慈)’를 아버지의 사랑에, 괴로움을 없애주는 ‘비(悲)’를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해 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비유한다고 해서 감성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말하고자 한 거예요. 자비란 어떤 조건에 의한 것이거나 차별에 따라 일으키는 것이 아니란 거죠.
그래서 자비를 말할 때는 삼연자비(三緣慈悲), 즉 세 가지 연에 대한 자비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중생연(衆生緣)으로, 누구도 빠짐없이 모든 중생에게 골고루 베푸는 자비입니다. 보살은 모든 중생을 골고루 사랑합니다. 부처님의 사랑을 햇빛에 비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법연(法緣)으로, 조건 없이 차별 없이 모든 존재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무연(無緣)으로, 인연 없는 곳, 인연 없는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일어나는 자비입니다.
두 번째는 법연(法緣)으로, 조건 없이 차별 없이 모든 존재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무연(無緣)으로, 인연 없는 곳, 인연 없는 존재에 대해서까지도 일어나는 자비입니다.
이와 같이 자비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고 무차별적인 사랑입니다. 모든 인간뿐 아니고 모든 존재에게 베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사랑은 조건적이거나 제한적이지만 자비는 무조건 무제한입니다.
물론 자비든 사랑이든 노력에 따라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건적인 사랑 도는 지나친 감성적 사랑의 경우 잘못된 노력을 기울일 때 미움과 의심, 더 나아가 폭력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비와 사랑이 다른 부분입니다. 만약 사랑이 모든 대상에게 차별 없이 나누고 구별하지 않고 베풀어진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비인 것입니다.
사랑은 노력한 만큼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가족은 사랑한 만큼 화합이 이루어집니다. 가족의 화합이 깊어지면 그만큼 가족의 행복도 커집니다. 그리고 화합을 위한 이런 노력도 결국 얼마만큼 깊은 사랑이 동반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도 결국 마음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족간에 어떻게 마음을 써야 사랑이 이루어질까요?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기쁨을 줄줄 알아야 합니다. 기쁨을 주고자 노력하고 함께 슬퍼해야 되며, 차별없이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은 바로 그러한 마음씀을 말합니다.
가족만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잘 하고 못하고가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정도, 그 사람의 삶에서 행복의 질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서로간의 갈등으로 고통이 왔을 때,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까요? 바로 사무량심을 써야 하는 겁니다.
가족만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를 잘 하고 못하고가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정도, 그 사람의 삶에서 행복의 질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서로간의 갈등으로 고통이 왔을 때,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할까요? 바로 사무량심을 써야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사섭법(四攝法)입니다. 첫째는 보시(布施)로 나누는 일이요, 둘째는 애어(愛語)로 부드럽고 따뜻한 말을 하는 것, 셋째는 이행(利行)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동, 넷째는 동사(同事)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초하루날 신중기도를 하면서 거듭거듭 부처님이나 신중은 특별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내게 부처이기도 하고 나를 장애하는 마왕 파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지점은 내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내가 그 존재와 더불어 마음을 잘 쓰면,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내 삶을 보호하는 화엄성중, 신중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잘못 쓰면 나를 해코지하는 마왕 파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달이 시작되는 초하루에 우리 조상들이 삼일 동안 신중기도를 한 것은 아주 지혜로운 일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이 달을 어떤 마음가짐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자기 다짐과 자기살핌입니다. 새달을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보호하는 신중이 되게 하리라’ 하는 바람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남을 보호하는 신중이 되리라’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이나 다짐은 바로 우리가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는 ‘삼업씀’을 통해 성취된다는 거죠. 삼업 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쓸 것인가.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바로 ‘사무량심’인 것이죠.
♣ 신도님 질문 : 자(慈)와 희(喜)는 비슷한 의미인 거 같은데 어떻게 다른가요?
자(慈)는 능동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에게 내가 능히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무량심’수행입니다.
자(慈)는 능동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에게 내가 능히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무량심’수행입니다.
희(喜)는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것 -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옆의 누군가 잘 되면 축하해주긴 하면서도 솔직히 한편으로는 질투를 느끼지 않습니까. 이러한 질투심은 잘 다스려 쓰면 자기를 분발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자칫 이 마음을 잘못 다스리면 질투심이 점점 커져서 자기를 갉아먹기도 합니다. 희무량심, 즉 한량없는 희의 마음을 쓴다는 것은, 질투심을 갖지 않고 다른 이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비무량심(悲無量心)은 다른 이의 슬픔을 내 슬픔처럼 여기고, 더 나아가 그 슬픔을 없애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 아시죠? 이 지장보살님은 지옥문 앞에 서계신데, 어떤 모습으로 계십니까? 지옥문 앞에서 펑펑 울고 계시죠? 왜 울고 계실까요? 지옥중생의 고통을 생각해서 우는 것입니다. 불쌍해서 우실까요? 흔히들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는 당신이 아파서 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장보살의 보살대비심은 중생의 아픔이 그 중생만의 아픔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아파서 참 안 됐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아파하는 만큼 자신도 아픈 거예요. 자식이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잠 못 이루는 부모의 마음처럼. 그 마음은 여기 계신 신도님들도 경험해보셨죠? 지장보살의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장보살에게는 지옥중생의 고통이 단지 그 중생의 고통이 아니라 지장보살의 실제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아프니까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심이고 대비심입니다. 세상의 어떤 존재가 아파하고 있을 때, 마음 착한 사람들은 참, 안 됐다’ 하고 생각하고, 그 존재들의 아픔을 덜어주고자 보시하고 봉사합니다. 참 좋은 일이죠. 그런데 보살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세상에 10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 가운데 1명이 아프다고 합시다. 그때 아프지 않은 9명이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저 사람이 아프거나 말거나 뭐,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하고 살아간다면 그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또는 9명 가운데 한두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나누려고 노력한다면 그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또는 나머지 9명 사람 모두가 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고 아픔을 나누려고 노력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어떻겠습니까. 이 가운데 어떤 세상이 더 아름답고 훌륭한 세상이겠습니까. 결국 내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가 이 세상을 만드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자(慈)·비(悲)·희(喜)·사(捨) - 이 사무량심(四無量心),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씀이 우리 삶을 진정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말씀을 깊이 믿으시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걸음 물러나서 인생을 바라보시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신중기도를 하시면서 참회하고 발원하신 마음,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신 사무량심을 마음에 잘 새기셔서 여러분의 삶이 진정 행복하고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 화엄도량 지리산 실상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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