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서원의 의미와 방법 - 실상사 주지 해강스님

마음정원(寂光) 2011. 4. 21. 17:54
서원의 의미와 방법
 
- 법문 : 주지 해강스님
 


인사말씀 -생략-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익히고 닦는 이유, 목적은 무엇일까요?
(신도님들) 사람답게 살려고요. 나를 정화 시키려구요.
대부분은 잘 살고자 행복하고자 그리고 부처되고자,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다음 생에 죽어서 극락가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부처가 되려고 한다든지 극락세계에 가려고 한다는 말은 불교를 제대로 보면 사실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극락은 가는게 아니고 부처는 되는 게 아닙니다. 실상사에서 저나 회주스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드려서 아시겠지만 극락은 만들어 가는 것이고 부처는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설령 ‘극락을 간다’ 하고 부처는 ‘되는 것이다’ 하면 그러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국 잘 살고자하는 바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극락세계에 가고 싶다 부처가 되고 싶다’는 것은 미래시제, 먼 훗날 이야기 입니다. 내일이 될지 내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엄밀히 말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살순 없습니다. 흘러간 과거 역시 살 수 없습니다. 실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극락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미래의 삶 역시도 극락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를 극락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를 극락으로 살지 못합니다. 결국 현재의 삶은 과거의 삶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고 미래의 삶은 현재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이런 인과관계가 있겠지요. 다음 생에 극락가려고, 미래에 부처님이 되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배우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은 잘 살려고 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지 못하면 다음 순간을 잘 살수 없다는 것으로 지금 부처로 살지 않으면 다음 순간, 내일을, 다음 생을 부처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부처로 살고, 잘살고 극락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순간을 잘 살 수 있을까요?
살아가고 있는 순간을 잘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순간을 늘 깨어있고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자 마음 먹지만 잘 안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는 방법 중 하나가 현재의 순간보다는 잘 잡을 수 있는 과거와 미래시간을 챙기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왔던 과거를 잘 챙기고 내가 살아갈 미래를 잘 다듬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내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보다 더 잘 살아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수행자들도 이 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과거를 잘 챙기고 미래를 다듬었습니다.
 
수행이란 한마디로 성찰입니다. 살피는 것이지요. 수행에서 살핀다는 것은 밖을 살피고 안을 살피는 것입니다. 밖을 살핀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모든 존재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밖을 살핌’의 자세는 ‘사무량심, 자비희사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이타(利他라고 합니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이롭게 하는 살핌 수행입니다. 안을 살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살핀다는 것인데 이를 자리自利, 자신을 이롭게 함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그래서 자리이타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신, 즉 안을 살필 때 어떻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과거의 자신을 살피는 것, △현재의 자신을 살피는 것, △미래의 자신을 살피는 것 - 이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살아온 자신의 삶을 곰곰히 되짚어봐서 반성하고 참회하여 다음에는 그러한 잘못과 오류를 벗어나서 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과거의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다면서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수행이 아닐 것입니다. 수행에서 참회가 아주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잘 살피지 못하는 이가 미래의 자신을 잘 만들어 가겠습니까? 참회하지 않는 자는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참회하기 위해서는 반성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돌이켜(反)살펴야 한다(省)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하지 않는 자는 미래를 행복을 준비하지 않는 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행복한 현재와 미래의 삶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삶을 잘 다듬는 다는 것은 바로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발원(發願)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원하는 것을 세우는 것을 발원이라 하고 그렇게 세운 발원을 부처님께 고하고 스스로와 부처님에게 약속하고 맹세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출재가를 막론하고 수행자들은 자신의 발원이나 서원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이산혜원선사 발원문 이라든지 명지대사 발원 같은 큰스님들의 발원이 있습니다. 발원문 중에 귀감이 될 만한 것들은 여전히 수백 년 수 천년동안 후대에 전해져서 읽히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한다는 것은 잘살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 그 일에 대한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그에 대한 자기 다짐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이렇듯 자신의 삶을 다듬어가고 진정 행복하게 살고자 삶을 만들어가는 일에는 반드시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해서 과거를 챙기는 사람과 서원을 세워 미래를 다듬는 사람은, 현재 순간순간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순간을 깨어있어라'
순간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쓰는 것에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고 이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말하는 동시에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상대에게 기쁨을 줄지 아픔을 줄지 파악할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고, 말하고 난 뒤 마음이 가볍고 행복한 것이지요. 그런데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을 합니다. 말을 마구잡이로 하게 되어 실수를 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지요. 행동할 때, 마음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말하거나 움직이거나 마음 쓸 때 늘 순간순간 깨어있기는 어렵습니다. 잘 안됩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
마음만 먹으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최소한 우리가 마음을 낸다면 하루라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보낸 시간은 우리가 얼마든지 잡아낼 수 있습니다. 늘 제가 강조하는 것이 저녁시간에 잠깐, 단 5분이라도 좋으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시라 권합니다. 아침 명상도 중요하지만 저녁 잠자리 들기 직전 명상하시면서 멍하니 마음을 텅 비우고 있지 말고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열심히 노력해서 기억해내시라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어떤 말을 누구에게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확실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새기고 반성하고 잘 한 것은 무엇인지를 되짚어 일기장에 써 보세요. 내가 오늘 하루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얘기하면서 어떤 거친 말을 써서 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했고 어떤 날카로운 소리를 해서 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어떤 부드러운 말로 그 사람을 기쁘게 했는지 생각나는 대로 써보시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됩니다. 수많은 말과 행동과 가지가지 마음을 쓰고 살았음에도 기억하려 하면 몇 가지 잡히질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한 달 정도 하시다 보면 점점 하루를 돌아봄이 정밀해집니다. 기억되는 것이 더 많아지고 또렷해집니다. 이것이 곧 수행하여 얻는 법력입니다. 법력이라는 것, 수행력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계속 반복해서 하다보면 생겨나는 힘입니다. 하면 할수록 하루가 마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듯 놓치지 않고 볼 수 있게 되는 힘이 생깁니다. 누구나 그런 힘이 생깁니다.
 
하루를 이렇게 분명하게 놓치지 않는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 단위로 반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익숙해진 사람은 10분 단위로 자신의 삶을 반성해서 살필 수가 있게 되고 1분 단위로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순간순간 말하고 행동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하는 자신을 타자화시키고 객관화시켜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바라보고 동시에 평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고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력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법력이 깊다, 도가 깊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고 하늘을 붕붕 난다든지 척보고 사람의 마음을 읽어 낸다든지, 과거 전생에 무엇이었으며 미래 내생에 무엇이 될 것인가 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잘 살피고 통제하는 것이 법력이고 수행력입니다. 자신을 잘 살피고 제어하는 사람은 타인과 세상을 잘 살피고 살펴 본 대로 더불어 하나 되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요, 도인이요, 부처입니다.
 
이렇게 길러진 수행력을 통해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바르게 통제할 수 있는 삶이 되며 그렇게 살게 된다면 그 순간 잘못으로 부터 벗어나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의 때를 벗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깨끗해지는 삶의 연속을 우리는 행복하고 깨끗한 삶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같은 초보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는 일인데, 현재 살아가는 순간순간 하지 못하고, 게을러서 하루단위로도 못한다면 최소한 한 달 단위로라도 해보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실상사에서 매월 첫째 주는 서원을 세우고 마지막 주에는 참회를 합니다. 이렇게 최소한 우리가 한 달의 삶만이라도 돌아보고 반성하고 제대로 계획을 세워 약속하고 살아가도록 노력해 보자는 것입니다.

 
서원을 어떻게 세울까.
 
그러면 서원을 어떻게 세울까요?
수행자들이 서원을 세울 때 반드시 그 속에 챙겨 넣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원을 세우는 목적이 잘 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 인생을 잘 살려면 '잘 사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삶을 잘 살고 있다’라고 평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마음 쓰는 것을 보고 판단합니다. 결국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쓰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쓰는 것 이외에 삶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말을 잘 쓰고 몸을 잘 쓰고 마음을 잘 쓰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그것이 잘 사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구체적 대상이 말과 행동과 마음 씀입니다.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의 말 쓰고 행동하고 마음 씀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여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을 할 때 욕설을 섞어 쓰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최소한 이번 달에는 내가 말을 하며 욕설을 섞어 쓰지 않는 습관, 고운 말 쓰는 업을 익히리라’는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삼업 씀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인지, 잘못인지를 반성해서 그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원에 들어가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기 바람입니다.
법에 맞는 바른 소망은 삶을 활기차게 하는 힘입니다.
 
또 하나는 보시회향입니다.
내가 수행하고 닦은 그 공덕을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나누겠다는 회향의 발원이 들어가야 됩니다.
정리해보면 서원에 꼭 들어가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기반성과 성찰, 삼업을 고쳐나가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다듬는 것
둘째, 자신의 바램과 희망
셋째, 이런 삶으로 얻어진 공덕을 모든 다른 존재들과 나누겠다는 보시회향의 발원.
 
이 세 가지가 들어가야 불제자의 발원이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 고하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뭔가를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별것 아닌 듯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 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글로 써서 남기고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고하고 나서 살아가는 하루와 그렇지 아니하고 사는 시간은 분명 삶의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절에 다니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도 실제로 내 삶에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면 다 헛수고입니다. 실제 내 삶에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부터 챙겨서 자기 것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이고 불교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대중이 함께 모여(혼자서는 잘 못하고 금방 포기하니까) 최소 한 달에 한번 서원을 세우고 세웠던 것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참회하는 것, 이렇게 신행생활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신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이 조금씩조금씩 깨끗해지고 향기로워 지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정초나 매월 초하루날 기도했던 이유도 자신의 한 해 또는 한 달 서원을 잘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조상들이 늘 그렇게 살아오셨듯 우리도 서원을 세우고 참회하는 그런 신행생활과 구체적 노력들로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잘 살아지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신중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보호하는 분들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 신중으로 - 계시든 계시지 않든, 여러분이 믿든 믿지 않든 - 우리 주위에서 여러분을 보호하는 신이고, 또 하나는 나를 보호하고 옹호해주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나의 화엄신중이라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태양과 같아서 늘 햇빛을 쏟아주시는데, 방문을 열어놓은 자만이 그 햇빛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방문을 열어 놓아야 햇빛이 들어오듯 부처님의 자비광명도 나를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준비해둬야 한다는 말입니다. 화엄신중의 가피와 보살핌도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참회하고 서원을 세우고 나 자신을 다듬어 가다보면,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보호하는 화엄신중이 되는 것입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지들, 내 친구와 내 동료가 나를 보호하는 화엄신중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화엄신중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삼업을 잘 가꾸어가지 못한다면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해코지하는 마구니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삶이 행복하고 아름답고 잘 살게 되는 길은 내가 내 삶을 잘 다듬어가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화엄신중이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화엄신중이 될 것이냐, 마구니가 될 것이냐 역시 준비하기 나름입니다.
 
자신을 다듬고 가꿔가는 일을,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이렇게만은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한 달을 시작하면서 서원을 세워서 약속하고, 한 달을 마무리하면서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
그러면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여러분을 비추고, 내 주변의 모든 존재가 나를 보호하는 화엄신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노력한다면 삶이 안락하고 평온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이 시간 이후부터 그렇게 사셔서 여러분의 삶들이 늘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출처 : 화엄도량 지리산 실상사 혼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