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북한의 사찰 - 속명사(續命寺, 황해북도 서흥군)

마음정원(寂光) 2011. 3. 16. 21:38

2010년 02월 09일 (화) | 제공_대한불교진흥원 http://www.kbpf.org
소재지-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시 대-고려시대 창건

속 명사(續命寺)는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오운산(五雲山)에 자리한다. 한 때 흥사(興寺), 흥풍사(興風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528년 4월에 아도화상이 처음 세운 절을 흥사, 혹은 흥풍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때는 이미 아도화상이 입적한 뒤였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북한이 발행한 『조선의 절 안내』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창건 후 오랫동안 페사로 변했다가 조선 초기에 조반(1341~1401) 스님이 중창하여 지금처럼 속명사라고 했다는 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이후 이 절은 다시 폐사되었으나 1884년 왕실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1930년에 약사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속명사에는 현재 금당인 약사전과 요사가 남아 있고, 창건 당시의 유물들인 수조(水槽)와 5층 석탑이 있다.

『황 해도지』(1970년)에는 조반이 속명사를 중창할 때의 설화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반을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명 황실은 조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오히려 조반을 없애려 하였다. 그의 머리를 세 번이나 쳤지만 베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 황제는 이를 천명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인정했다고 한다.

조반은 귀국 도중 황해도 서흥에서 숙박했는데, 꿈에 3인의 승려가 나타나서 “우리는 오운산의 석불이다. 이번 명나라 황제가 그대의 머리를 베려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그대의 목을 대신하여 베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오운산 바위 밑에 있으니 떨어진 머리를 붙이고 절을 지어 달라.”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조반이 꿈에서 깨어나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으므로, 왕에게 이를 알려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목숨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도 속명사라 했다고 한다.
소재지-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시 대-고려시대 창건

속 명사(續命寺)는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오운산(五雲山)에 자리한다. 한 때 흥사(興寺), 흥풍사(興風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528년 4월에 아도화상이 처음 세운 절을 흥사, 혹은 흥풍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때는 이미 아도화상이 입적한 뒤였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북한이 발행한 『조선의 절 안내』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창건 후 오랫동안 페사로 변했다가 조선 초기에 조반(1341~1401) 스님이 중창하여 지금처럼 속명사라고 했다는 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이후 이 절은 다시 폐사되었으나 1884년 왕실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1930년에 약사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속명사에는 현재 금당인 약사전과 요사가 남아 있고, 창건 당시의 유물들인 수조(水槽)와 5층 석탑이 있다.

『황 해도지』(1970년)에는 조반이 속명사를 중창할 때의 설화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반을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명 황실은 조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오히려 조반을 없애려 하였다. 그의 머리를 세 번이나 쳤지만 베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 황제는 이를 천명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인정했다고 한다.

조반은 귀국 도중 황해도 서흥에서 숙박했는데, 꿈에 3인의 승려가 나타나서 “우리는 오운산의 석불이다. 이번 명나라 황제가 그대의 머리를 베려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그대의 목을 대신하여 베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오운산 바위 밑에 있으니 떨어진 머리를 붙이고 절을 지어 달라.”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조반이 꿈에서 깨어나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으므로, 왕에게 이를 알려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목숨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도 속명사라 했다고 한다.
소재지-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 시 대-고려시대 창건 속명사(續命寺)는 황해북도 서흥군 고성리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오운산(五雲山)에 자리한다. 한 때 흥사(興寺), 흥풍사(興風寺)라고도 불렸다 한다. 528년 4월에 아도화상이 처음 세운 절을 흥사, 혹은 흥풍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때는 이미 아도화상이 입적한 뒤였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북한이 발행한 『조선의 절 안내』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창건 후 오랫동안 페사로 변했다가 조선 초기에 조반(1341~1401) 스님이 중창하여 지금처럼 속명사라고 했다는 설이 정설로 여겨진다. 이후 이 절은 다시 폐사되었으나 1884년 왕실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1930년에 약사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속명사에는 현재 금당인 약사전과 요사가 남아 있고, 창건 당시의 유물들인 수조(水槽)와 5층 석탑이 있다. 『황해도지』(1970년)에는 조반이 속명사를 중창할 때의 설화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기 위해 조반을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명 황실은 조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오히려 조반을 없애려 하였다. 그의 머리를 세 번이나 쳤지만 베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 황제는 이를 천명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인정했다고 한다. 조반은 귀국 도중 황해도 서흥에서 숙박했는데, 꿈에 3인의 승려가 나타나서 “우리는 오운산의 석불이다. 이번 명나라 황제가 그대의 머리를 베려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그대의 목을 대신하여 베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오운산 바위 밑에 있으니 떨어진 머리를 붙이고 절을 지어 달라.”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조반이 꿈에서 깨어나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으므로, 왕에게 이를 알려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목숨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도 속명사라 했다고 한다. 속명사 약사전 내부
불교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