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의 향기

다도와 생활차

마음정원(寂光) 2007. 3. 24. 03:35
다도와 생활차

차(茶)가 곧 선(禪)이고 도(道)인 경지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어떠한 형태나 형식에 있지 않다.

여러 가지 다구(茶具)와 그릇들을 나열하고 화려한 차림새로 풍악에 맞춰 몸동작을 지어내며 다도시연이니 헌공다례니 하는 모습들은 상업성 이벤트이거나 상술적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며, 차생활이나 다도와는 꽤나 멀고 먼 풍물로 보인다

선대(先代)의 어른들께서는 가슴 속에 오거서(五車書 : 다섯 수레분의 經書)를 담고 생활 속에서는 오상(五常 : 仁, 義, 禮, 智, 信)을 실천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할까 부끄러워 성현(聖賢)을 흠모하며 서릿발 같은 차 한 잔으로 심신(心身)을 일깨우고 중정(中正 : '中'이란 감정과 욕망에 휩쓸리지 않음인데, 中이 바르지 못하면 중이 아니므로 中正이라 함)으로 추슬러서 새롭게 새롭게 발돋움 하셨다.

이렇게 간절한 자기 수양 속에서의 차 한 잔이 비로소 다도에 가까운 것이다.

불교의 다선일여(茶禪一如)는 이보다도 높고 높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정점(頂點)에서 솟아나는 차이다. 가고 오고 머물 때나 앉거나 눕거나[행주좌와(行住坐臥)] 말할 때나 침묵할 때와 행동하거나 명상할 때[어묵동정(語默動靜)] 어느 때 어느 곳[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든지 '지금 이 순간' 이전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말며[무억(無憶)] 이 순간 이후로 미래가 다하도록 한 생각도 갖지 말며[무념(無念)] 무상무념에도 기대지 말고[무주(無住)] 한 모금 차를 마시면 선(禪)과 더불어 한 가지 맛[다선일미(茶禪一味)]이라고 하는 경지다. 이렇듯 인간들이 형성한 일체의 것과 격식을 넘어선 곳에 선(禪)이 있다. 또 차와 선이 둘이 되면 선이 아니고 도가 아니므로 다선일여(茶禪一如)라 한다.

선(禪)에는 격식이 없다. 그러므로 차 또한 격식이 없다. 있는 그릇으로 차를 마실 뿐이다.

선(禪)이나 도(道)는 성자(聖者)의 경지이다. 흉내내기로 모습을 비슷하게 한다고 하여 그것이 곧 다도(茶道)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다도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다 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道)를 흠모하는 분들은 삶의 목적이 출세나 명예 또는 재물에 있지 아니하고 깨우치고자 하는 수행의 외길일 뿐이다. 그러기에 차(茶)로써 성덕(聖德)을 이루어가는 일단의 모습을 다도(茶道)라고 하였던 것이다. 참 수행인이 차를 마시면 격식이 없어도 다도(茶道)요, 잡된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격조있게 마셔도 다도는 아닌 것이다.

시대적 형편으로 보아 체험다도(體驗茶道) 즉 다도체험으로 볼 수는 있지만, 이도 일본 쪽에서 빛이 나는 듯 하다. 일본의 초암다실(草庵茶室)은 어장해사(魚藏蟹舍)라고 하여 물고기 집이나 바닷게 집처럼 겨우 웅크리고 출입하며 눈비나 피하는 초막인데, 우리네 불교에서는 토굴(土窟)이라고 한다. 30년 전만 해도 깊은 산중에 드문드문 있었고 향상일로(向上一路 : 聖者를 향해 가는 외길)에 있는 선승(禪僧)들의 움막이었다. 일본 다도는 이러한 선승들이 화려장엄한 궁성 한켠에 토굴을 얽어놓고 지내며 다도를 지도한 데에 그 근원이 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도 마찬가지이다. 한 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고, 동일한 인물과 두 번 만날 수 없음이 불교의 무상(無常) 관점이다. 찰나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일기일회가 분명한데도 이것을 일러서 사무라이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냉혹함이라고 비하시켜서는 안된다. 일기일회, 이 한 마디 만으로도 차는 도(道)로 승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 그 선사들[村田珠光, 武野紹鷗, 千利休]의 경지였다. 지금 사람들이 돈을 내고 다다미 두 쪽 반의 초암 속에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다도가 아니라 다도체험일 뿐이다. 체험을 통해서 흐트러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잠든 의지를 일깨워 생기(生氣)를 뿜어내고자 함이다. 일상 속의 생활차 속에서 옛 선승의 체취와 기품을 느껴보고자 함이 체험다도의 일단이란 뜻이다.

어느 이가 발표하기를, '중국은 생활차요, 한국은 풍류차요, 일본은 무사도차다'라 하였는데 이런 식의 정의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차(茶)는 생활차(生活茶)와 다도(茶道)로 나누어볼 수 있음이 공통이다. 공부하는 학생이나 학자들이 머그잔에 찻물을 가득 채워놓고 한 모금씩 머금어가며 학문하는 모습도 생활차요, 가정이나 식당 또는 호텔 등에서 숭늉처럼 마시는 것도 생활차요, 영국인들이 아침 6시 식전에 침대에서의 한 잔을 시작으로 하루 네 번 갖는 티타임도 생활차요, 손님을 맞이하여 정갈하고 향미있게 나누는 차도 생활차요, 아취있는 모임에서 청담(淸談) 속에 나누는 고품질 차도 생활차다. 이렇듯 일상적 차생활을 통해서 차(茶)의 덕(德)이 몸과 정신과 생활 속에 서리게 하는 이것을 우리는 회복하여야 한다.

지금 우리네 차문화는 몇 사람의 권위나 편부(片富)를 위하여 돌쇠 삼월이 잔치를 너무 길게 하는 듯 하다. 다도도 아니고 일상 생활차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다구가 어떻고 물과 불이 어떻고 차 우림이 어떻고를 논하며 이것을 다도인 양 착각하고 있으니 아지랑이를 강물로 믿는 혼란에 다름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차(茶)를 복잡하고 어렵고 사치스럽고 신비한 것으로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차를 권위나 명예나 부를 얻어가는 쪽으로 삿되게 이용한 모리배들의 패악이 빗어낸 현상이다.

다반사(茶飯事), 즉 생활차를 회복하여야 한국의 차가 살아나고, 차가 살아나야 우리 민족의 흥왕(興旺)한 기운이 살아나게 된다.

생활차는 담차(淡茶)이다.

일반적으로 알맞게 우려낸 차의 농도는 약 2%라고 한다. 담차는 1%인데, 효능은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담차를 주장한 분들이 있다 (특히 다산 정약용). 고귀한 차를 맛을 위하여 유효량 이상으로 쓰는 것은 차의 검덕(儉德)에 어긋난다고 보았던 듯 하다. 그러나 접빈(接賓 : 손님맞이)에까지 맛없게 담차를 내면 실례가 된다. 간혹 접빈다(接賓茶)를 다도(茶道)니 다례(茶禮)니 하는 이들이 더러 보이나, 이도 생활차의 범주이다.

차는 독성과 부작용이 전혀 없다.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유익하다. 다반사(茶飯事)를 회복하여 다 함께 흥왕한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

다반사(茶飯事)의 차생활(茶生活)을 다음과 같이 '일삼차(日三茶)'로 정리하여 보았다.

1. 조명청건(朝茗淸健)
아침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건강을 지켜준다.
(영국의 격언, ‘이른 아침 한 잔 차는 약장사를 굶긴다’)

2. 주다검중(晝茶儉中)
낮 차는 검박한 행실과 중정(中正)을 갖게 한다.

3. 야천정안(夜‘艸+舛’靜安)
밤 차는 심신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한다.

이렇게 일삼차(日三茶)를 생활화하면 청건(淸健), 검중(儉中), 정안(靜安)이 이루어져서 다도에도 한 걸음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차는 백초(百草)의 우두머리로서 뭇 식품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 최고최상의 가르침은 차를 마시는 일이다. 서산대사, 설잠대사(김시습), 초의선사, 서거정, 정약용, 김정희 등 다도(茶道)를 실현하신 큰 님들이 선대에 계셨음이 자랑스럽다. 다반사(茶飯事)를 회복하여 다 함께 밝은 삶을 누리자.

출처/천치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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