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동해 바다의 암자 - 나를 찾아가는 여행

마음정원(寂光) 2006. 12. 17. 17:41


# 깊숙이 숨어 있지만, 서정 넘치는 동해 바다의 암자들

전국의 명산에는 빠짐없이 사찰이 들어서 있지만, 바닷가에 면해 세워진 절은 드물다. 지금이야 해안도로가 놓이면서 접근이 쉬 워졌지만, 옛사람들에게 바닷가는 벽지 중의 벽지였다. 이런 벽 지에 절집을 지어봤자 신도들이 모일 리도 없었다. 특히 동해안 은 바다가 거칠고 파도가 높아서 바다에 근접한 절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해바다 쪽으로 선 절이라면 먼저 떠올려지는 곳이 강원 양양의 낙산사다. 풍광을 노래나 시에 비유한다면 낙산사의 홍 련암은 가히 ‘절창’으로 꼽힐 만하다. 그러나 홍련암도 바다에 바짝 붙어있다기보다는 벼랑에서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형상이 다.

홍련암의 웅장함이나 세련미야 따라가지 못하지만, 동해안에는 바다 쪽으로 낮고 또 바짝 붙어 동해를 품안 가득 안마당으로 삼고 있는 서정 넘치는 절집들이 꼭꼭 숨겨져 있다. 양양의 죽도암이며, 휴휴암, 그리고 동해의 감추사는 감탄사가 터져나올 정도 로 주변풍광이 아름다운 바닷가에 들어서 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파도가 절집 안으로 들이칠 만큼 바다와 가깝다. 관음전 법당 에 앉아 문을 열면 바다가 밀려들어온다. 다소 누추하고 궁벽하 지만 이런 절집들이 매력적인 것은 해안 깊숙이 숨어 아직 손때 가 덜 묻어있다는 점이다.

강원 양양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주문진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죽도해수욕장이 있다. 그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에 바다 쪽으로 불쑥 나온 섬 아닌 섬. 이곳이 바로 죽도다. 죽도를 따라 도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보석처럼 숨어있는 암자 죽도암이 있다.

7번 국도에서 해안마을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데다, 절집이 바다 쪽으로 향해 있어 외지인들은 그곳에 암자가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죽도암에서 비구니의 단단해진 마음을 들여다보다.

죽도암 앞바다는 온통 기암괴석들로 가득차 있다. 흔히 보지 못 하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들이 얽히고설켜서 이국적인 느낌마저 풍긴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있는가 하면, 두부 모처럼 잘려나간 바위들도 있다. 고즈넉하게 서있는 죽도암의 관음전은 파도가 이런 바위들을 핥으며 흰 포말을 만들어놓는 것을정면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죽도암은 비구니 우성스님이 지키고 있다. 우성스님은 “새벽 3 시 반에 예불을 마치면 불경을 읽다가 해안을 따라 바위길을 따 라나가는데 붉은 해가 불쑥 솟아오르면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 했다. 스님은 “도를 닦든 안 닦든 그런 풍경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속세의 나이로 치자면 올해 서른여섯. 바닷가의 위태롭게 서있는 절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사연 은 무엇일까.

우성스님이 담담하게 잇는 사연. 여덟살때 아무런 연고 없는 이 곳 암자의 노스님에게 맡겨져 자랐고, 그 이후 줄곧 ‘스님이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단다. 한때는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만 ‘속세에서 잘 살 자신이 없어서’ 되돌아왔다. 결국 승가 대학을 마치고, 연로해 마을에서 기거하는 노스님 대신 암자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관음전 앞에서 먼 바다를 응시하던 우성스님 의 마음에는 단단한 옹이가 몇 개나 박혀 있을까.

# 새로 만들어지는 다채로운 전설들… 휴휴암

죽도암에서 주문진 쪽으로 더 내려가면 하조대 인근에 휴휴암이 있다. 해변의 모습이 삼태기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삼태기 마 을’로 불리는 양양군 현남면 광진2리 마을 바닷가에 들어선 휴 휴암은 1997년에 창건했으니 올해로 10년째를 맞는다. 홍법스님 이 처음 이곳에 암자를 지은 것은 아담하고 소박한 어촌마을의 포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모두 민박을 하는 마을로 변했지만, 휴휴암 아래의 작은 해변과 작은 집들은 예전의 아름다 웠던 어촌마을의 모습을 짐작케 하고 있다.

휴휴암이란 암자의 이름은 ‘쉬고 또 쉰다’는 뜻. 휴휴암의 역 사는 일천하지만, 극적이고 다양한 형식의 전설이 곳곳마다 담겨있다. 전설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내려온 것은 없고, 가장 오래된 전설이라고 해야 1999년의 이야기다. 이를테면 이렇다. 1999년 10월 보름날 홍법스님이 무지개가 뜬 자리를 살펴보니 관세음보 살 형상의 바위가 바닷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다. 또 휴휴암에 돈을 댄 시주가 운영하는 강릉시내 호텔에 큰 멧돼지가 새끼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졌다며 관세음보살이 남순동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전설은 거북바위며 달마바위, 여의주바위까지 끝없이 이어진다. 휴휴암의 관음전에 황룡과 청룡이 다투는 모습을 그려놓고는 비룡관음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이같은 전설의 연장선상이다.

# 영험함에 기대는 사람들이 밀려드는 절집

다른 절과 달리 휴휴암은 흘러간 과거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당대의 전설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영험함을 경험하려는 불자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당초 묘적전 한 채이던 휴휴암은 비룡관음전, 요사체, 종무소, 종루 등의 건 물이 들어서면서 웬만한 사찰규모를 넘어서고 있다. 믿기 힘든 몇가지 이야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전설의 진위를 놓고 시비 붙일 일은 아닐 터. 돌부처에 절을 하는 까닭도 꼭 부처에 소원을 빌어서가 아니라, 돌에게도 절을 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닦는데 있다고 하지 않던가.

휴휴암에서는 비룡관음전 아래 바닷가의 널찍한 바위 연화대가 가장 눈길을 끈다. 널찍한 바위마당에서는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는데 수천명이 들어서면 장관이 펼쳐진다. 발바닥바위며, 발가락바위, 여의주바위, 태아바위까지 각양각색의 바위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것들은 쏙 닮아서 감탄스러울 정도지만, 또 어떤 것들은 과장된 해석에 피식 웃음만 날 뿐이다.

마치 동굴처럼 만들어놓고 대다라니경에 등장하는 불상들을 그려넣은 법당의 화려함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 휴휴암을 찾았다면 화려한 금색과 붉은색, 푸른색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저마다 다 른 85명의 보살들의 모습을 놓치지 말고 꼭 둘러보자.

# 일주문 대신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감추사로 가는 길

강원 동해시 송정에서 묵호 쪽으로 기찻길과 나란히 내려가는 길. 그 길에서 내려서 건널목도 변변히 없는 기찻길을 건너 300m쯤 산길을 걷다보면 감추사에 다다른다. 사실 여행자의 눈으로 보 자면 감추사의 절집은 작고 궁벽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려들어 반질반질 윤이 나있는 관광지 같은 절집과는 격이 다르다. 절집은 가끔 법당을 울리는 목탁소리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조용하 고 평온하다. 또 감추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장엄하다. 그 어느 불상보다 더 장엄하다.

감추사의 창건 설화에는 신라 진성여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 이 야기가 담겨 있다. 진성여왕 때인 896년 선화공주가 몹쓸 병에 걸려 동해의 한 사찰의 스님이 가르쳐준 대로 바닷가 석굴 암자 를 얻어 매일 기도를 했다. 기도에 효험이 있어서인지 용물고기 를 약으로 얻어 병을 나았다. 이후 공주는 용왕의 도움에 보답하기위해 30여년 동안을 암자에서 수양했고, 공주가 세상을 뜬 뒤에 는 신도들이 공주가 머물던 암자를 보전해 왔다. 바로 그 암자가 지금의 감추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전돼 오던 암자는 1959년 동해안 일대에 밀어닥친 해일로 유실됐다가 1965년에 다시 중건 됐으며 지난 9월에 다시 대대적으로 보수됐다.

# 마음을 모은 기원과 촛불에서 슬픔을 읽다

감추사에서 바다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기도처가 있 다. 이 기도처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절을 하고 기원을 한다. 누군가 정성을 다해 켜놓은 17개의 촛불들이 바닷바람에 흔들 리며 따스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 감추사의 한 처사는 “기도처 로 이만한 곳이 없다”며 “기도의 효험은 둘째치고 이곳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씻겨진다”고 했다. 처사의 말대로 기도처에 서면 절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오른편 절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바다 쪽으로 휘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대나무 같다.

어깨가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바위틈 사이로 50대 주부가 촛불 을 켜놓고 벌써 몇 시간째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해는 설핏 기울어서 동쪽의 구름까지 붉게 물들이는데, 오후 나절부터 시작된 절은 끝날 줄을 모른다. 무엇이 그리 간절한지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기원이 너무도 간절하니 그 끝자락에는 슬픔이 묻어난다.

어둠이 찾아들고 차가운 달빛이 내걸리면 촛불은 더욱 밝게 빛난다. 적막 속에서 파도소리도 점점 커진다. 이럴 때는 도회지의 생활에서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았던 스스로의 마음이 들여다 보 인다. 올 한해를 살아왔던 기억들을 주머니에서 하나씩 꺼내 만 져보자. 누구는 ‘좀 더 따스하게 잘 살아올 걸’ 후회를 느끼기도 하고, 누구는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싶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또 한해가 달력 한 장만을 남기고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동해·양양 =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기사제공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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