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참선법(9) - 현대에 있어서의 선의 의미

마음정원(寂光) 2006. 7. 21. 16:51
가)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선

물질문명·기계문명 등으로 특징지어져 온 현대의 서구문명은 분명히 20세기 말로 그 한계를 드러낸 채 종언을 고했습니다. 따라서 근·현대 문명을 이끌어 온 서구사상과 기독교사상은 현대문명의 종언과 함께 그 명(命)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문명, 곧 서양문명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기의 문명을 이끌 대안사상(代案思想:Alternative thought)으로서 禪은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오늘날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에게 당면한 과제는 환경과 복지문제인데, 서구문명의 한계를 드러낸 가장 극적인 예의 하나가 바로 '환경문제'인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를 이끌어 온 서구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행복지수를 높여만 준다면 자연을 얼마든지 정복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행복을 무한대로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개발전략이 환경오염·생태계 파손·자연파괴라는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기상이변과 대기오염 등은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망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는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환경오염은 한 마디로 현대문명의 개발전략이 초래한 인과응보(nemesis effect)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개발전략 중심의 현대 물질문명은 분명히 한계점을 드러냈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안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 자연친화적인 노장사상과 주관적 유심론의 최고봉인 선사상(禪思想)입니다.

선은 철저한 만물일여(萬物一如)의 일원론입니다. 이는 서구사상의 특징인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이원론(二元論)과는 전혀 배치되게 됩니다. 또 이원론에 입각한, 근·현대 문명이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온 합리성까지도 뒤엎는 역설의 도가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선의 자연친화성

6조 혜능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남양혜충 국사(?∼755)가 무정물도 불법을 설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갈파한 이래 이 소식을 지음(知音)해야 비로소 선리(禪理)를 깨닫게 된다는 선풍이 풍미해 왔습니다.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의 과제인 '환경'은 바로 자연입니다.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선의 자연친화사상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물론 노장사상도 자연친화적이고 여타의 사상도 자연을 중시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선사상 속에는 노장사상이 상당히 녹아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구문명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노장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다가 선사상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도 이처럼 선사상 속에 노장사상이 수용돼 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선사상이 21세기 환경문제를 풀어나갈 대안사상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힐 수 있느냐의 여부는 선학의 발전적인 연구와 실천적인 역할을 얼마만큼 수행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확실한 점은 선만큼 자연친화적이고 자연을 경외하는 사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6조 혜능 이래 조사선을 관통하고 있는 선사상의 핵심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도 곧 자연의 도를 말한 것입니다. 평상심이란 자연심, 곧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일상생활을 이끌어가는 소박한 마음으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바로 그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상생활 속에 모든 진리가 내재한다고 보는 '平常心是道'야말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선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선사들의 樂道歌 역시 자신의 생명을 자연의 질서에 맡기고 산야를 소요하면서 사는 임운자연(任運自然)의 산거(山居)를 다시 없는 선경(禪境)으로 읊조려 왔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禪이 20세기 현대문명의 종말을 불러온 환경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 선의 활용

禪은 흔히 서구인들이 호기심을 갖는 신비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기존의 논리체계를 뛰어넘은 초논리의 논리이며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서 있는 초형이상학일 뿐입니다.

단지 이러한 초논리, 초형이상학의 선사상이 기존의 이분법적인 사유체계로 틀을 짠 문명에서 수용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선적(禪的)인 사유체계가 절실히 필요해졌고 문명의 흐름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습니다. 이미 구미 선진국의 석학들이 선사상을 21세기 대안사상의 하나로 폭넓고도 깊이 천착하는 가운데 정신분석학·경영학·스포츠 분야 등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1) 경영과 선
견성에 이르는 선의 방법론은 전적으로 '직관적 통찰'에 의존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따라서 논리적 분석이나 사량적(思量的) 분별을 개입시키지 않고 사물을 한눈에 직관적으로 꿰뚫어보는 것이 선의 진리에 대한 접근 방법입니다.

이같은 선수행의 전통적 테마인 창의성과 직관력은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와 일치될 뿐만 아니라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미 그 선리(禪理)를 실용화하고 있습니다. 근래 경영학에서도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경영은 한 마디로 분석경영이 풍미했습니다. 기업을 시작하려면 원가분석·시장조사·마케팅 전략 등 치밀한 분석을 거쳐 성공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남미·러시아 등을 강타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여실히 보여주었듯이 현대의 분석경영이 성공의 만능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도심에 칼국수집을 하나 여는 데 한 번 지나가다가 대충 보고 '여기면 될 만하다'는 직관적 판단을 내리고 시작하는 경우가 오히려 그 지역의 집세, 사무실 근무 인원, 점심시간의 유동인구 산출 등을 꼼꼼히 따져 보고 시작한 분석경영의 기법보다 더 성공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관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날 중동 건설공사에 건자재를 바지선으로 운송한 예와 서산 간척지 공사 때 고철선으로 바다의 급류를 막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본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정회장의 두 가지 사례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어보아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같은 경영기법은 비분석적인 직관적 판단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막대한 운송비 절감과 공기 단축이라는 엄청난 경영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직관경영이 만능일 수는 없지만 때로는 직관력이 치밀한 분석력보다 더 정확하고 사물의 본질 접근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2) 스포츠와 선
스포츠에서 선이 실용되고 있는 생생한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 프로농구(NBA)의 시카고 불스팀 감독을 1998년 시즌까지 맡았던 유명한 필 잭슨 감독의 얘기입니다.

그는 1994년 시카고 불스팀이 3년 연속 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자 스포츠 기자들이 몰려들어 회견을 하면서 "3연패를 달성한 선수 훈련 비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선수들을 선적(禪的)으로 훈련시켰다."고 말했습니다.(〈뉴스위크〉 1994년 6월 24일자)

그가 말한 '선적(禪的)인 훈련'이란 간단히 말해서 선수들로 하여금 승부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필 잭슨 감독은 바로 이 선적인 무심의 경지를 선수들에게 체득시켰던 것입니다.

모든 감독과 코치들이 입으론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힘껏 뛰라고 말하고 선수들 역시 관념적으로는 그렇게 하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인간인지라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 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승부에 속박 당하면서 긴장과 압박감을 갖게 됩니다.

필 잭슨 감독의 '선적인 훈련'은 구두선(口頭禪)이 아닌 바로 선적인 수련을 통한 무심의 체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선수들을 코트에 들여보내기 전에 잠시의 틈새 시간이라도 내서 좌선을 하게 해 무심의 심지(心地)가 흔들리지 않도록 안정시켰습니다. 시카고 불스팀의 시합 전 좌선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단 1분, 5분씩이라도 꼭 하며, 현재도 시카고 불스팀의 참선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라) 선수행의 핵심요소

(1) 재즈와 선
선(禪)에 있어서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 생성되어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보는 입장에서 생긴 공안(公案)인데 바로 이 현성공안이라는 선(禪)의 즉흥성은 재즈라는 즉흥음악과도 상통합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사토 마사히코는 재즈만의 특성인 스윙이나 블루노트 같은 음악적 장치들을 팝이나 클래식에서까지 구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재즈의 진정한 가치는 이제 즉흥뿐"이라고 외칩니다.

전형적인 틀이 없는 재즈의 즉흥성과 현장성은 다른 음악이 복제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몽골 태생의 재즈 보컬리스트인 사인호남치락은 재즈의 진정한 가치와 목표는 "쉬고 있는 두뇌에 충격을 주어 직관적 각성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즈가 지향하는 직관적 각성이라는 것은 바로 돈오(頓悟)입니다.

(2) 창의력과 직관력
21세기를 흔히 정보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보화 시대의 선두주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와 일본 소프트방크의 사장인 손정의는 수많은 인터뷰와 강연에서 한결같이 "정보화 시대의 핵심요소는 아이디어(창의력)와 감수성(직관력)"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수행은 사물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창의력과 직관력의 배양이며 고양입니다.

돈오(頓悟)니, 견성이니 하는 깨달음도 고양된 창의력과 직관력의 전광석화 같은 폭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는 창의력과 직관력이 배양되지 않은 제자를 절대 인가(認可)하지 않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의 창의적인 독창성과 주체성을 금과옥조로 여겨 스승의 선법(禪法)을 맹목적으로 암기하거나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덕산의 법을 이었으나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하지 않는다(嗣德山 又不肯德山)' 방(棒 : 몽둥이질)으로 유명한 덕산선감 선사(782∼865)의 사법 제자 암두전할 화상이 스승의 선법에 맹종하지 않겠다는 독자성을 선언한 사자후입니다.

암두는 선종 법계(法系)상 분명한 덕산의 법제자이지만 "덕산의 선법만은 긍정할 수 없다"는 말로써 스승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선법을 펴고자 했습니다.

'위산에서 30년 동안 밥을 얻어 먹고 똥을 누었지만 위산의 법만은 배우지 않았다.' 이 말은 위앙종 개산조인 위산영우 선사(771∼853)의 사제(師弟)로 위산이 제자 앙산혜적 선사에게 법을 전해 종문의 기틀을 확고히 다질 때까지의 시간적 틈새를 메우면서 위앙종이라는 선종 종파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공헌했던 장경대안 선사(793∼883)가 자신의 독창적인 선법을 밝힌 말입니다.

장경대안은 위산과 한 스승 밑에서 배웠고, 30년 동안을 같이 살며 같은 선지(禪旨)를 펼쳐 왔지만 그 방법과 천착하는 안목은 전혀 같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암두와 장경이라는 두 선사가 토해낸 사자후는 한 마디로 선이 창의적인 독자성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드러내 보인 단적인 예입니다. 이와같이 선(禪)은 1,500여년 동안 수행의 핵심요소로서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하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핵심요소와 선 수행의 주요내용이 이처럼 일치하는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인류문명이 지향해야 할 과제인지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을 창의력과 절대자유로 보는 선사상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일 수 밖에 없는 앞으로의 천년을 이끌 인류 보편의 윤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마) 선의 효능

그리고 현대인들은 정보화의 시대에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육체적, 정신적인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참선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효능이 있게 됩니다.

① 참선을 하게 되면 신경기능이 조절되고 정상화되어서 심신이 안정됩니다.

② 마음이 차분해지고 느긋해지며 원만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③ 의지가 강해지고, 정신이 안정되고 집중력이 생기게 되어 일을 도모할 때 능률이 오르게 됩니다.

④ 창조력과 지적능력이 계발됩니다.

⑤ 참선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단전호흡을 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왕성해져서 건강이 증진되고 병으로부터 회복이 잘 됩니다.

⑥ 이와같은 점들로 인해서 심신이 안정되고 인격이 도야됩니다.

그러나 참선은 이상과 같은 것들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내가 나 자신을 깨달라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일체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하는 것이며 위의 효능들은 이러한 공부를 해 나가다보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