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三學)의 실천
-고 산 큰스님-
불교의 절대적이며 근본되는 교리의 골격으로 삼학이
있다.
계(戒). 정(定). 혜(慧)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삼학은 불교를 배워 도를 이루려는 사람이 반드시
닦아야 할 필수의 과정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양식있는 인간이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자]라고 말한바 있다.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의 도달점은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때 푸쉬킨이 말한 '양식있는 사람'과도 상통
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다.
정신을 맑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늘 성찰하고
규범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규범이 다름아닌 계(戒)다.
계(戒)는 산만한 마음을 방지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불교는 신(神)을 존중하여 의지하는 유신(有神)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달아 최고의 지혜를
증득하는 자력(自力)의 종교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일체만유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청정하고 바르게 갈고 닦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중생들에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생각(意)이라고 하는 육근(六根:감각기관)이 있어
온갖 번뇌망상과 시비가 생겨나고 공연한 분별심이 일어난다.
여기에 끌려다니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한치도 향상될 수 없다.
계란 여섯가지 감관(感官)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한 욕망과
망상과 분별심을 단속하는 채찍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청정한 불심(佛心)을 보호하는 담이다.
계를 지킴으로써 안정을 얻고 번뇌와 망상을 소멸시킬 수
있다.
정(定)이란 경학(輕學)과 요동(搖動)이 없는 평온정착한
마음상태를 말한다.
마음의 잡된 물결이 고요히 잠들고 번뇌의 거친 파도가
침잠되어 버리면 잃어버린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定)은 바른 사고(思考)의 기본이다.
산란한 마음에서는 바른 사고와 몰두가 행해질 수 없다.
고요한 마음에서만 온갖 지혜가 샘솟게 된다.
혜(慧)는 슬기로움이다.
계를 지켜 고요함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으면 그로인해 참된 슬기가 생겨나게 된다.
부처님의 절대자유하고 평등무애한 세계로 나아가는 바른
방편은 이것을 빼고나면 없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라는 교리서를 보면 삼장(三藏)
과 삼학(三學)을 적절하게 비교하고 있다.
즉 율장(律藏)은 계학(戒學)이며 경장(經藏)은 정학(定學)
이며 론장(論藏)은 혜학(慧學)에 대비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경.율.론 삼장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여 계.
정.혜 삼학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천가지 경(經)과 만가지 이론을 모르는 바 없이 모조리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라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배고프면 밥먹어야 하다는 것을 알기만 하고 밥을 먹는
행위(실천)가 없으면 그는 굶주림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중생의 온갖 고통이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를 밝히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로 인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누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근본 목적인
'행복한 삶의 성취'는 못하고 있다.
목이 말라 강가에까지 왔는데 어리석게도 물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