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수종사

마음정원(寂光) 2005. 8. 4. 00:10
동방의 사찰 중에 제일의 경관 '수종사'


가을에 오르는 수종사
곽교신(iiidaum);기자
동방의 사찰 중에 제일의 경관

'양수리 근처'라 하면 더 알기 쉬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 중턱에 수종사가 있다. 유명한 이 절집을 소개하는 글에는 대문장가 서거정이 "동방의 사찰 중에 제일의 경관"이라고 감탄했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람' 저술에 참가했던 서거정의 지리적 안목이요, 명나라에도 이름을 떨친 당대 문호가 찬사를 보낸 수종사의 전망은 더 말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 대웅전 마당에서의 장쾌한 조망
ⓒ2004 곽교신
서거정의 글도 좋지만, 그로부터 340여 년 뒤의 사람이며 수종사 부근 마현이 고향인 다산 정약용이 고향 마을에 머무르던 약관 20세 때 지은 '춘일유수종사'(春日遊水鐘寺 봄날 수종사를 유람하다)의 단 한 귀절은 아직 수종사를 모르던 시절의 필자를 황홀하게 했었다.

다산 왈,

輕陰汎遠田 엷은 (산)그늘에 멀리 밭이 떠있네

파스텔화 같은 이 귀절은 수종사에 오르기 위해 다산이 배에서 내려서서 본 강가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 마당에서 보는 조망은 저절로 이 귀절을 연상시킨다. 이 시를 알고 간 사람은 "아! 정말 논밭이 물에 떠있는 것 같네"하며 감탄하며, 이 싯귀를 나중에 들은 이는 수종사에 다시 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말하곤 한다.

▲ 다산이 배를 내렸을 위치에서 본 수종사
ⓒ2004 곽교신
다산이 수종사에 들르며 배를 대던 나루터 자리는 지금 중앙선 철교가 지나는 자리라는 게 근처 사시는 최점윤(85. 남양주시 조안면) 할머니의 증언이다. 그 곳은 50년대 말까지도 배를 대던 자리였다 한다.

15세에 조안으로 시집와서 여태껏 사셨다는 최 할머니는 해방 직전인 16,7세에 강에서 자갈 한 바락(한짐을 뜻하는 듯)을 퍼다 철교 공사장에 주면 5원을 줬다는 기억이 또렷하셨다. 그 때 쌀 한말이 150원 했단다. 할머니 증언대로 철교 근처에는 최근까지 나루터로 쓰던 흔적이 있었다.

다산이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던 때(1782년)는 팔당댐이 없었으니 우리가 지금 보는 팔당호 수면보다 훨씬 아래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보였을 것이다. 만년에 다산이 고향마을을 두고 "먼 훗날 물이 산으로 올라올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야화가 있던데, 1974년 팔당호가 생겨 수면이 부쩍 상승해 '물이 산으로 올라와' 고개마루 산마을이 강가의 마을로 되었으니 우연으로 돌리기엔 기이하다.

수종사에서 보이는 양수리도 팔당호가 생기면서 논이며 밭이며 마을이 물에 떠있는 듯이 보이게 되었으니, '멀리 밭이 떠있네'라고 읊은 다산의 문학적 상상력이 200여 년 뒤 미래의 풍광을 미리 꿰뜷었다 하면 필자의 지나친 비약일까. 다산 만큼의 상상력은 없이 보아도 수종사에서의 조망은 시원하고 장쾌하다. 호방하다. 참으로 아름답다.

종소리로 들린 물소리

▲ 대웅전 옆의 정의옹주 원형부도와 오층탑. 탑내에서 발견된 복장품들은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이전
ⓒ2004 곽교신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어 사적기가 없는 수종사의 창건연대는 알 길이 없고, 신라사찰이란 주장도 있으나 경내 원형석조부도의 명문으로 보아 조선 세종조의 사찰로 여겨지는데, 세조 4년(1458)에 어명으로 중창한 확실한 기록은 마치 수종사 창건설화처럼 전한다.

36살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엄청난 피를 뿌리고 옥좌에 오른 후 조카(단종)마저 기어코 죽여 시신을 영월 서강에 던져버린 세조이니, 유교국가 조선의 군왕으로는 백성에게 도무지 떳떳하지 못했다. 세조는 불교로 민심을 얻을 요량에 억불숭유의 조선이었지만 불사에 힘을 쏟는다. 그런 연유로 세조가 세운 여러 절집 중의 하나가 수종사이다.

세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오대산 기도를 마치고 북한강 뱃길로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 곳 이수두(두물머리, 곧 양수리)에서 묵던 밤, 멀리서 울리는 맑고 은은한 종소리를 듣는다(피의 대가인지 51세로 죽을 때까지 심한 부스럼에 시달리던 세조가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가 깨끗해졌다는 설화가 만들어진 오대산은 이래저래 세조와 인연이 많은 셈이다).

이튿날 종소리가 들린 운길산을 뒤졌으나 절은 안보이고 작은 암굴에 모셔진 16나한을 발견한다. 세조가 들은 종소리는 굴 천정에서 떨어진 물소리의 울림이었다. 이 자리에 절을 지을 것을 명하니 바로 수종사이다.

집채 만한 바위가 날아다니던 영주 부석사의 예처럼 허구적이지만 적당한 신비성은 기본인 창건(또는 중창)설화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다.

절집에서 사무를 보시는 보살님 말씀에 의하면, 세조는 수종사에서 눈으로 보이는 곳까지의 땅을 모두 수종사에 주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산 밑 마을의 노인들이 수종사 아래 골짜기의 "구(舊)절터"라는 곳을 기억하며 지금도 그 곳에서 기와파편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수종사가 꽤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단종의 생모이자 형수인 현덕왕후(문종의 비)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꿈을 꾸자 그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한 포악한 세조였으니, 지은 죄가 많은 탓에 환청으로 물소리가 종소리로 들렸으리란 것도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아무튼 수종사 중창 설화는 세조의 귀에 종소리로 들린 바위굴의 물소리에 기인하므로 이에 절집 이름도 '물종' 즉 '수종(水鐘)사'가 되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설화 속의 물방울 떨어지던 석굴은 어디 쯤이었을까. 이는 절집에서도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약사전 마루바닥 아래에서 가물거나 장마가 지거나 매양 고만큼씩 졸졸 흘러떨어지는 석간수가 있단다. 단단히 자물쇠를 채운 곳에 필자가 가까이 다가가 그 소리를 들어보니 소리 울림이 청량하다. 세조가 듣던 그 착각의 종소리도 이랬을 터인데 그 암굴은 어디쯤일까.

중창설화의 기원지일지도 모르고 수량이 매우 적은 이 석간수 샘은 이래저래 수종사 최고의 보물로, 물맛과 형태의 보존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그 물은 부처님께만 공양을 올린다고 한다. 사진촬영은 물론 기사에도 자세한 언급을 자제해 달라는 절집의 부탁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단 한평의 차 재배지도 없는 수종사가 예로부터 차로 유명한 아이러니는 오로지 그 물로 설명이 되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미각이 예민함을 자부하는 필자에게 맛을 보라며 절에서 한 컵 내어준 그 귀한(?) 물의 맛은 거의 '비어 있었다'. 좋은 물일수록 맛이 크게 비어 있다. 크게 비어 있는 물이니 당연히 채울 곳이 많다. 그 빈 곳으로 차 맛이 깊게 우러나리라.

▲ 다실 '삼정헌'
ⓒ2004 곽교신
물 맛을 알아본 다산이 시인묵객들을 모아 수종사에 머무르며 석간수로 우린 차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최고의 찻물이다.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선사도 내왕한 이 물의 전통은, 대웅전 마당에 있는 다실(茶室) '삼정헌'(三鼎軒)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차를 보시하고 있는데 휴일에는 4~500명의 호사가들의 접대에 손이 바쁘단다. 사연이 깊은 수종사의 삼정헌에서의 차 한잔은 다향 만큼이나 뜻이 깊다 하겠다.

명절에 조상께 올리는 '차례'(茶禮)는 고려시대에 부처님께 차를 올리던 '차(茶)공양'에서 유래된 것이니, 한가위 전후에 수종사에 올라 차를 마시며 조상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각별하지 않을까? 주문하는 '차례상 세트'에 꾸뻑 절만 갖다 맞추고 풀세트로 차례를 간단히 끝내기도 하는 세태에 '차례' 본래의 정갈한 뜻이 얼마나 통할까 싶지만.

수종사의 월출

필자가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가위 연휴에 하늘이 대체로 맑으리란다. 달이 얼마나 밝을까. 두둥실 떠오를 큰 달덩이를 "동방 제일의 경관"을 지닌 수종사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이보다 특별한 경험이 또 있을까?

일출은 물론 월출도 백미인 수종사이지만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차량의 안전을 고려해 아쉽게도 야간엔 출입을 막는다 한다. 저녁예불 시간까지는 개방을 한다고 하니 저녁 6시경이면 솟는 보름달을 한 시간은 볼 수 있겠다. 자고 나면 험상궂은 기사가 난무하는 이 어지러운 시대를 달빛처럼 푸근한 순리로 만져주길, 스산한 바람이 부는 이 땅에 달빛같은 평화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빌어보자. 다만 절집에서도 염려해주는 차량안전이니 개개인의 조심스런 안전관리도 예의의 하나이겠다.

500년 전 다산의 마음에 떠있던 논밭은 아파트도 들어선 양수리로 서있지만, 깊고 푸근한 달빛 아래 떠있는 양수리는 우리 마음에도 선경으로 다가올 것이다. 엷은 산그늘에 멀리 양수리가 떠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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