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이해

불자의 올바른 기도법

마음정원(寂光) 2005. 8. 2. 14:09
불자의 올바른 기도법
 

1. 나와 가정을 위한 기도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극한 정성(精誠)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듯 간절하게 하는 것이 정성이다 예불 드릴때 지심귀명례 (至心歸命禮)라 한다.



기도란 자신의 정성에서 비릇되는 것이다. 간절하게 기도하는것이 하나의 정성이다.

예불할 때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라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나의 몸과마음을 받쳐 부처님과 보살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귀의(歸依), 귀명(歸命)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하는 의미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他佛) 해석

부처님께 기도드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부처님께 간절히 예배 드리는 그 원형적 형태는

석가모니부처님 시대에서 비릇 된다.



부처님 당시 상공업이 무역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도시가 바이샬리이다.

바이샬리는 유마경의 설법지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는 곳인데 그 곳의 상인들이 지역의 특산물을 가지고

서북인도 탁실라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도중에 강도나 도적이 나타나서 물건을 뺏앗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부처님을 찾아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묻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무 붓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입으로 불러라 한다.

그러면 그 어려움에서 능히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씀 하신다.

이것이 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예배하며 염불을 하는 원초적 원형이다.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받쳐서 예배 한다는 뜻이다.

정성이 지극할때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불자들이여! 간절한 마음, 지극한 마음, 사무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 본적이 있는가?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눈물 흘려 본적이있는가?

관세음 보살님 명호를 목이 터져라 불러 본 적이 있는가?



관세음보살님은 천개의 손을 가지고 계신다. 왼손 20수, 오른손 20수 합하여 40수 관세음보살이라한다.

또한 손바닥에는 눈이 하나씩 있다. 그래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라한다. 왜 천수천안인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을 구원하기위하여 많은 손과 눈이 있는 것이다.

40수 관세음보살님은 25유(有)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40×25=1000이 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서 관(觀)은 관찰의 의미이다.

우리들이 보는 것은 관이 아니라 견(見)이다. 소견이고 관견이고 견해이다.

관세음보살님이나 부처님. 성인들이 보는 것은 관이다.
과학자가 현미경을 통하여 미세한 사물을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보듯 보살님도 천개의 눈으로 우리를 살피는 것이다.

세(世)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탐진치 삼독에 쪄들어 허득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것이다.



열가지 선행(十善)을 닦지 못하고 열가지 악(十惡)을 더 많이짓는 우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음(音)은 우리 중생들의 음성이다.그 음성은 신음하는 음성. 절규하는 음성이며, 아파하는 음성이며, 괴로워 하는 음성이다.

때문에 관세음(觀世音)이란 관세음보살님이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괴로워하고 번뇌하고 허허롭고 쓸쓸하고

답답한 모습을 관찰하시고 그 음성을 들어시고 우리 중생에게 대자비심을 내어큰 사랑으로 구제,구원하는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나오는데 그 의미도 중생을 구제하고 관찰하는

아무런 걸림없이 자유자재로 구원한다는 것이다.



빛으로 오소서 저희에게 오소서 음성을 들으소서

천개의 손으로 천개의 눈으로 구제하시고 구원하시는

자비의 화신. 사랑의 실천자. 그리운 님. 관세음보살님



보살(菩薩)이란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이다.

각유정(覺有情) 또는 각중생(覺衆生)이다 보리란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이다.

즉 깨달음의 요소와 중생의 습기가 조금식 있는 것이다. 보살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분이 보살이다.



그런데 지금은 무당 점쟁이 아무나 보살이라한다.보살이라는 위대한 언어의 외적 부분의 값어치가 떨어졌다.

여성에게 보살이라 부르는 것은 관세음보살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보살이라 부른다.



절하는 무릎이 아프고 시리도록 예배해 본적이 있는가?

불.보살님의 자비와 사랑은 모든 중생들에게 빠짐없이 나누어 주지만 그러나 정성이 지극한 불자에게

부처님의 자비 광명은 먼저 있는 것이다.



저 높은 하늘의 태양이 이 세상의 만물을 골고루 비추어 만물이 소생하지만.

태양이 동해 먼 바다에서 떠오를 때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산 봉우리부터 빛을 비추는 것이다.



원효스님께서도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배슬(拜膝)이 여빙(如氷)이라도 무연하심(無戀火心)하고

아장(餓腸)이 여절(如切)이라도 무구식념(無求食念)이니라 절하는 무릎이 얼음 같드라도 불 생각을 하지말고

배가고파 창자가 끊어지더라도 밥 생각을 하지말라.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했다.

춥고 배가 고파야 도심이 생긴다 포난(飽煖)에 생음심(生淫心)이다. 등 따스고 배 부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 누리를 비추지만 그러나 태양이 솟을때 가장 높은 산 봉우리를 비추는 것과 같다.

우리들 중생도 부처님께 메달려야 한다 우는 애기 젓 준다 하지 않는가?



“관음경”에 관음보살 일심칭명 관기음성 개득해탈(觀音菩薩 一心稱名 觀其音聲 皆得解脫)이라 했다.

관세음보살님 명호를 지극히 부르면 보살님께서 그 음성을 관찰 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나와 나의 가정을 위하여 부처님과 보살님께 정성껏 기도하자.

간절한 마음으로 불러라 사무치는 마음으로 불러라 지극한마음으로 불러라.





2. 이웃을 위한 기도



불교를 깊이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기복(祈福)이라하고

그와같은 행위를 기복불교(祈福佛敎)라 폄하 한다.



기복이란 복을 비는 것인데, 부처님께 복(福)을 비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땅에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고국양왕(고구려)은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 崇信佛法求福”이라하여

백성들에게 불.보살께 신앙할 것을 하교(下敎) 하였다.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바램이다.



“새해 복(福) 많이 받으세요”“행복 하십시오” 모두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을 비는 것은 나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을 비는 것이 개인의 평안과 안녕, 번영과 영달을 기원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고쳐야 한다.

소박한 바램을 벗으나, 욕심의 충족과 탐욕의 극대화에 치우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니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끝이 없다.



스님들이 법당에서 불공을 하거나 기도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축원을 한다.

“앙고 시방삼세 제망중중-----학업자 지혜총명. 병고자 즉득 쾌차. 단명자 수명장수. 사업자 사업성취.

상업자 재수대통. 박복자 복덕구족. 직무자 수분성취. 참선자 의단독로. 염불자 삼매현전. 간경자 혜안통투”

어떤 불자님이 오셔서 자신의 아들이 배를타고 멀리 태평양에 가서 고기를 잡는데 고기 많이 잡는 염불 해 주세요하고



어떤 불자님은 와서 요즘 우리 아들이 사업이 되질 않아 기계가 놀고 있는데 사업이 잘되게 기계가 잘 돌아 가게 축원 해 달라한다.

“공업자는 기계윙윙. 어업자는 그물 만땅 ” 앞면보체 뒷면보체 절을 할때 손을 벌려서 하지마라

스님이 염불할때 앞에 산과 같은 엉덩이 치켜들었다 놓앗다 하지말고 옆에서 나추어서 하라



깨어있는 불자. 생각하는불자. 성숙한 불자라면 자신과 관계된 개인의 기도와 기원에서 벗으나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위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하 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찰에 가면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부처님의 메시지이다.

유마경에서도 불이법문(不二法門)를 유마거사가 말한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라고



그대의 불행은 나의 불행, 그대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다. 때문에 이웃을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기원해야 한다.

나 혼자 성불하지 않고. 우리 모두 함께 성불할려고 다짐 한다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우리는 반드시 나와 이웃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불자의 올바른 기도법이다.



스님들이 하는 축원문에도 우리모두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나홀로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것이 연기의 법칙이고. 상의상관성이다.

자타일시성불도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