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마음

[스크랩] 수행과 기도

마음정원(寂光) 2015. 4. 25. 08:01

수행과 기도 


불교는 수행(修行)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력(自力)적인 부분인 기도과 타력(他力)적인 부분인 수행의 조화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한다. 불교는 다양한 수행법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수행법만 제시해주면 일목요연하게 좋을 텐데 불교의 수행은 왜 이렇게 다양한가? 그 이유는 중생이 저마다 타고난 성품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으로,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 깨달음의 길로 다가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불교의 다양한 수행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가정이나 사찰에서 어떻게 신행 생활을 해야 하고, 불자로서의 어떤 수행 생활을 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1) 수행 


불교를 가리켜 ‘수행의 종교’ 혹은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과 그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한 안심입명의 길도 열어놓는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길도 궁극적으로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에 의지하더라도 불교는 깨달음의 끈을 놓지 않는다.


믿음과 수행, 이 두 가지를 아울러 신행(信行)이라 한다.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얻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를 믿는 불자들의 올바른 태도이다. 물론 그 믿음은 외부 대상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나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철저한 믿음도 있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모두 믿음의 대상으로 중요시 한다.


그렇다면 수행(修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수행해야 하는가? 수행하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며 어떠한 수행법이 있는가?


수행이란 자신을 닦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이리저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마음의 고삐를 잡아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왜 닦는가? 깨끗한 본래의 마음이 탐욕, 화, 어리석음의 삼독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정한 마음이 번뇌와 티끌에 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 번뇌를 걷어내 내 마음 속에 본래부터 자리 잡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찾기 위해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삼독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여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고 불성이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업장을 소멸하고 폭포수처럼 흐르는 윤회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나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모든 망상과 착각, 분별의 흔적을 없앤다. 나 중심으로 바라보던 편견과 억측과 아집을 단칼로 베어내듯 잘라낸다.


그 결과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며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리저리 불어대는 여러 가지 내 삶의 주인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리저리 불어대는 여러 가지 좋고 싫은 순역의 경계에 휘둘려 헐떡거리지 않고 경계에 깨어 있으며 매사에 자기를 반조하고 자기의 중심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 마음이 쉬어지고 여유로우며 편해진다. 세상을 넓고 깊게 보며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지혜가 솟아나고 한 없는 자비심이 펼쳐진다. 자기를 절대긍정하며 내면에서 무한한 생명과 힘을 느끼기에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며 두려움이 없다. 절대로 나 자신이나 타인, 그리고 사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매개로 하는 기도는 수행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기도 역시 수행에 포함된다. 불교에서 기도의 목적 역시 업장을 소멸하여 부처님의 가피, 즉 부처님의 생명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생명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내가 부처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으로서 윤회의 흐름을 멈출 때 가능하다.


그리고 기도가 진정으로 성취되려면 아상을 녹여야 한다. 내가 철저히 없어지는 무아가 되어 부처님의 밝은 빛과 함께할 때 기도는 성취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또한 수행이다. 다만 기도는 그 접근방법이 내 스스로의 힘보다는 부처님의 힘과 가피에 의지해서 닦아간다는 점에서 자력적인 수행과 다름 뿐이다.


엄밀히 나누자면 기도타력(他力)적이고, 수행자력(自力)적이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힘을 믿고 거기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서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나오는 지점은 깨달음이라는 데서 똑 같다. 즉 맨 처음 접근방법에서만 차이가 날 뿐 도달 지점은 둘 다 오직 부처를 이루는데 있다.


기도의 방법으로는 염불. 주력. 간경. 절. 참회. 사경(寫經). 사불(寫佛) 등을 들 수 있고, 수행의 방법으로는 이것들을 모두 포함하면서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관법. 염불선 등을 들 수 있다. 
 

2) 기도


기도(祈禱)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부족한 점을 얻기 위해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도 이런 차원의 기도를 인정한다.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다. 가피란 부처님의 중생 구제에 대한 원력과 연민이 작용하여 부처님의 은혜를 입어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 공덕의 힘은 참으로 크다. 부처님 앞에 모든 자신이 가치 판단을 내려놓고 간절하게 일심으로 구하면 기도는 이루어진다.


또한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이라 하여, 모든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 정의된다. 거리에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기도에는 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원으로서의 기도, 다짐으로서의 기도는 그런 다짐이 부처님이 가피로 더 굳세고 튼튼해져 쉽게 좌절되지 않는다는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도가 성취되면 업장이 소멸되어야 한다. 업장의 소멸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없이는 불가능하다.


어쨌든 외부를 향한 기도가 점차적으로 내부지향적으로 바뀌어 가고, 궁극적으로는 ‘일념에서 무념으로’ 진전되어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업장의 소멸되고 업의 뿌리가 바뀌고, 내 몸과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하나하나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진리와 자연스럽게 일치 되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참된 성품을 개발하고 진리와 만나며, 결국에는 깨닫게 된다면 이는 수행과 연결되는 것이다.


기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깨끗한 마음에서부터 생긴다.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이 함께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한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기도는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만남을 뜻한다.


따라서 기도의 마음가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다. 즉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적을수록 기도는 오히려 잘 된다. 무아가 되어 오직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잘되고 못되고 까지도 부처님께 맡겨버릴 수 있다면, 이미 성취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비우는 이러한 헌신적인 기도를 통해 모든 업장은 얼음 녹듯 녹아내린다.


그리고 기도의 성취를 위해서는 정합이 되는 소원, 즉 앞과 뒤가 맞아 떨어지는 소원을 가져야 한다.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과 서쪽으로 가고자 하는 소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소원성취는 요원하다. 

 

3) 기도와 수행의 마음가짐과 절차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수행이든, 수행할 때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전신을 집중하여 전심전력으로 매달려야 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할 때 삼매의 상태에 이르고, 그 삼매의 상태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업장을 녹이기도 하며, 스스로 지혜를 발견하여 업장을 녹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생명을 기울일 정도로 확신을 가지려면 부처님 법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결정적인 믿음이다. 반신반의하는 믿음이 아니다. 과연 수행의 결과가 제대로 나타날까, 기도가 이루어질까 하고 물러서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 모르고 불보살님이 어떠한 분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도하고, 그래서 기도나 수행이 성취된다 한들 그것은 분명 불교의 수행과 기도가 아니다. 오로지 불보살의 가르침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그 가르침대로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마음을 품어야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할 수 있으며, 삿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올바른 믿음과 정견의 확보,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한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 임을 알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수행에 임할 때 참다운 공덕이 쌓이는 것은 물론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 작은 물방울의 바위를 뚫는 것은 지속적으로 같은 자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에서, 이 시간에도 했다가 저 시간에도 했다가 해서는 수행이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은 방해를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낼 수 있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다. 장소도 가급적이면 가까운 법당이나 가정의 한 곳을 정결하게 단장하여 동일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 좋은 방법은 가정에서 지장을 받지 않고 행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정기적으로 수행하면서 법당에서의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나간다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누구를 기다리면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기도·수행의 고삐를 놓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기도나 수행을 할 때는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한다. 우선 일정한 장소에서 수행하고자 할 때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선택해서 앉으면 된다. 옷차림도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이다.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이다. 호흡이 중요한 이유는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수행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수행을 하다 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다.


기도, 수행의 절차로는 부처님 말씀을 통한 정견의 확보, 믿음 또는 귀의, 참회, 발원, 각자가 택한 수행법, 그리고 회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에 따라서는 회향하면서 발원을 다시 새길 수도 있다. 
 

4) 참회


우리는 살아가다 보면 많은 잘못과 허물을 짓게 된다. 악한 일도 저지르고 남에게 상처도 준다. 이러한 과실과 허물은 대부분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 분별과 망상에 의해 생겨난다. 이러한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이 씻어내지 않는다며, 나의 삶은 결코 편안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으며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 따라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해야 한다. 그것이 참회이다. 후회란 잘못된 마음을 억압해서 잠복시키는 데 비해, 참회는 마음의 뿌리를 뽑아 없애기 때문에 그 잘못된 마음이 모두 풀어져 없어진다.


참된 참회는 내 성품 속에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죄의 흔적과 자취를 없애는 것이다. 죄의 자취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의 나쁜 인연을 가리킨다. 만약 당장에 본래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분별과 망상이 빚어낸 삼독의 악연을 마음속에서 씻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참회는 과거의 죄를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바라볼 때 죄의 본성은 없다. 죄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참회를 통해 죄지은 마음과 그 흔적은 씻은 듯 사라진다. 그러면 마음의 삼독이 사라져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두려움이 없게 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도, 아무리 나쁜 일을 저지른 자도 참회를 통해 본래 부처님의 마음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회를 하는가? 참회는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바로 그 순간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참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매일 108참회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 108배를 하면서 절실히 참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참회의식을 할 때나 과거부터 현재가지 저질러진 잘못된 행위에 대해 참회할 때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면 된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면서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는 가정 하에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나가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108감사를 하도록 한다. 그것은 108배를 하거나, 108염주를 돌리면서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주위에서 감사할 이를 찾아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감사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공기나 불, 나무와 꽃들은 물론 부모, 친구, 모든 것들이 감사의 대상이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자기 긍정을 가져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5) 발원 


우리는 욕심 없이 살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욕심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있다. 그 방법이 바로 발원이다.


욕망으로 인한 욕심이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이라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확실히 하고 삶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덕묵이다. 발원은 그 러한 보편적인 인류에의 견지에서 나를 비우며 성취해 나가는 몸과 마음의 몸짓이다.


욕망으로 인한 삶과 발원으로 인한 삶 중에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가? 욕망은 항상 대립과 분열, 소외를 낳는다. 그러나 발원은 더불어 성장하는 진정한 행복을 낳는다. 발원하는 삶에는 대립이 없고 소외가 없으며 온전히 전체와 함께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욕심과 발원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욕심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바람이지만, 발원은 공통적 바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인류 전체,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을 행복과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 여기에서 나와 남의 구분되지 않는다.


둘째,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지만, 발원은 능동적인 수행을 동반한다. 잘 먹고 잘 살고,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발원은 욕심보다 더 깊지만 욕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에 가려진 본능을 본래대로 되돌리려면 욕망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것이 수행이다. 자기 욕심을 제어하고 자신을 돌이키면서 원을 발하여 자꾸 베푸는 마음을 연습함으로써, 아상(我相)을 소멸해 가는 것이다.


셋째, 욕심은 의도된 의지이지만, 발원은 순수 의지를 지향한다. 순수 의지는 공과 무아에 바탕을 둔 깨끗한 마음이다. 선악의 분별, 나와 너의 분별, 가치와 반가치의 분별을 떠난, 참으로 선한 행위가 순수 의지이다. 거기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순일 무잡한 전체가 있을 뿐이다.


넷째, 욕심은 결과를 중시하지만, 발원은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한다. 한마디로 발원은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다. 욕심은 미래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 달성을 위해서 때로는 현재의 희생을 강요한다. 하지만 발원은 현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스스로가 세운 원을 달성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하지만,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는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발원은 참다운 자기전환의 시작이다. 끌려다니는 업생이 아니라 창조적인 원생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이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에 지은 업에 이끌려 살다 가는 것이다. 반면 원생은 스스로의 삶을 갈무리해 나가는 창조적 삶이다.


창조적 삶은 걸림이 없으면 당당하고 활기차다. 걸림만 없다면 무엇이든 마음에 그리는 대로 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집중하면서 노력하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마음 속 어딘가에 걸림이 있기 때문에 즉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에 따른 의욕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원을 세워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발원은 욕망으로 물들어 있는 에너지를 생명 창조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부정을 긍정으로, 나에서 우리로, 부분에서 전체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대립에서 평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발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어리다.


이 사홍서원은 대승 보살들이 깨달음 성취[上求菩提]와 중생 구제[下化衆生]를 위한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제시한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떠한 난관에도 물러서지 않는 견고한 결의를 일으켜야 한다. 이타행을 통해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제도하면서도 누구를 제도한다거나 누가 제도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서원이다. 보살은 항상 무아로서 전체와 함께 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에, 한계가 없는 전체이기 때문에 무량하고 무수하고 무변하다. 그래서 큰 서원이라 한다.


이러한 사홍서원은 모든 보살이 지녀야 할, 모든 인류가 지녀야 할 보편적인 원이라 해서 총원(總願)이라 한다. 반면 각각의 보살들이 갖는 개별적인 원이 있는데, 그것을 별원(別願)이라 한다. 보현 보살의 십대원이라든가 문수보살의 원, 지장보살의 원 등이 그것이다.


서원은 클수록 좋겠지만 , 자신의 현재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하는 것도 괜찮다. 예컨대 지금 자기가 가장 절실하게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병고를 극복하거나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조그마한 생명이 아니라 전체로서 열려 있어야 한다. 병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다 병고에서 벗어나지이다‘ 하며, 마음의 안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다 마음이 편안하여 지이다’ 하는 식으로 발원해 나가야 한다.  

 

2. 기도 및 수행의 종류 
 

1) 절 


절이란 몸을 굽혀 상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예법이다. 절은 동양 문화권 어느 곳이나 있지만 , 불교에서는 두 무릎과 두 팔꿈치와 이마의 다섯 부분을 땅에 붙이고 양손으로는 상대방의 발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라 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의 맨 아랫부분이 발에 극진한 예를 표할 만큼 한없이 존경하는 마음과 귀의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이마를 존경하는 대상의 발밑에 대고 양 손으로 공경하는 것은 자기를 한 없이 낮추는 하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존경은 물론 귀의와 찬탄을 표하는 예절이 기도 및 수행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절을 할 때 상대에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 탐욕, 화,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을 없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이 단순히 몸의 굴신운동으로만 끝나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이 없다면 올바른 수행법이 될 수 없다. <원각경약소초>에서는 오체투지를 통해 다섯 가지 번뇌인 오개(五蓋)를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지혜의 개발이다. 삼매의 체험만 있고 지혜가 드러나지 않아 번뇌를 소멸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불교 수행법이라고 할 수 없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절을 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성이 드러나 지혜가 밝아지고 마음이 순일해져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게 된다.


아울러 절은 인욕하는 마음도 갖추게 되니 자연스럽게 육바라밀 수행과도 연결된다. 나아가 부수적으로 건강은 물론 몸과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해준다는 점에서는 현대인의 수행법으로 손색이 없다. 이 밖에 절은 대사회적인 참여의 수단으로서 활용되어 불교적 가치를 내외에 천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절은 육체를 움직이면서 하는 기도요 수행이다. 이는 다른 수행법이 지니지 못한 절이 간직하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절은 몸을 통해 아상을 버리고 무아를 체험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인 것이다.


강조하건대 절 수행은 몸을 통해서 진짜 무아를 체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몸이 나라고 생각해왔다면, 그러한 삶은 업력에 지배되는 삶이다. 반면 절을 통해서 몸을 극복하면 몸을 인한 업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절은 그 자체가 바로 나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편하고자 하고, 많이 먹고자하고, 더 갖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스린다. 특히 몸을 조복시키면서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 몸과 마음을 모두 다 길들이게 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나아가 천배, 삼천배, 만배 하는 마음 가짐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2) 주력 


주력(呪力)이란 진실한 말의 힘이다. 그 진실한 말은 진짜 말이요 참말이기 때문에 한자로 진언(眞言)이라 한다. 이 진언을 외우는 수행이 주력 수행이다.


말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말의 의미가 곧 말의 힘이 된다. 이렇게 말에는 마음을 전달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세상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힘이 종교와 결부되면 어떤 특별한 말은 인간세계를 비롯한 우주에 편만한 진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것은 우주적인 힘이요 초월적인 힘이다.


특히 최고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말은 진실한 말이기에, 그 속에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으며 모든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진실한 말을 외움으로써 실현 불가능할 것 같던 소원도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주력, 즉 진언은 진리를 담고 있다. 진언을 외우는 일 자체가 진리를 설한 말씀이나 경전을 잊지 않고 간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주력의 실천법은 현실생활에서 요청되는 악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수행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렸다. 즉 주력 수행을 통해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수력 수행은 기도 공덕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초 수행으로서 집중력을 키우고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며 업장을 소멸하는 역할을 한다.


주력의 종류로는 천수대비주, 능엄주, 육자대명왕진언, 광명진언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일상 의례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진언이 있다. 그런데 주력 수행을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진언을 외우기 전에 그 진언은 설하게 된 불보살의 목적과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수대비주를 외울 때는 무조건 진언을 외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한 마음과 대비주를 설하게 된 목적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력을 할 때는 입으로 또박또박 주문을 부르고 마음으로 그 주문을 떠올리며 귀로도 또박또박 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 주문을 떠올릴 때도 해당 불보살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간경


간경(看經)은 정기법회나 기도, 정진 법회 시 독경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경전 공부도 간경의 방법으로 널리 실시되고 있다.


원래 경전은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편찬된 것이다. 처음에는 깨달음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경전을 읽었으나, 점차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정착되었다.


간경은 독경(讀經), 전경(轉經), 풍경(諷經)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독경은 경전 말씀을 소리 내어 외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도 모르고 무턱대고 외는 것이 아니라 , 그 의미를 알아내어 내 것을 삼았을 때 수행의 효과가 있다.

 

전경이란 경전을 마음속 깊이 굴려 그 경전의 말씀이 내안에서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풍경은 안 보고 외우거나 노래한다는 뜻이다.

 

독경의 형태가 외우는 데까지 나아가고 그것이 곡조를 타 아름다운 노래가 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간경법이라 할 것이다.


간경에는 소리 내어 경전을 읽는 독경을 포함하여 소리 없이 마음 속으로 읽는 것, 경전 공부하는 것, 그 경전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경전의 말씀과 의미를 쓰면서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사경도 간경의 범주에 들어 간다.


간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으로써 그 경전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순간은 나와 부처님이 함께하는 시간이요, 모든 사람들과 동시에 전체로 함께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열려 있을 때 경전의 뜻이 마음속에 드러나 그 마음을 밝힌다. 이것을 경전을 펴서 마음을 본다 하여 피경조심(披經照心)이라고 한다.

 

그 결과 경전과 마음이 상통해 마음이 밝아지면 경계도 함께 밝아진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드러나고 그것을 실천할 때만이 경전의 가르침이 진실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경전의 말씀이 우리 몸에 체화되면 그 경전 구절을 망각하지 않고 마음 속에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 그래야만 경전 구절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경전 내용에서 부처님의 참된 말씀을 찾아내는 데 간경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 그 진실한 말씀을 찾게 되면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기 마련이다. 그 지혜로 무명을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업장을 녹여 깨달음을 향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경전의 말씀이 지혜로 승화되어 몸과 마음에 그대로 체화되면 그 경전을 말씀을 언제라도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으며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경전은 중생심을 벗고 불성을 드러내는 길로 향하는 나침반이자 기준 역할을 한다. 다른 모든 수행의 옳고 그름은 이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 기준을 삼아야 한다. 따라서 모든 기도 및 수행에 들어서기에 앞서 부처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담아 둠으로써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슬러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경전을 독경할 때는 마치 부처님이 내 앞에서 그 경전을 설하고 있고 내가 그 말씀을 듣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4) 염불


염불이란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떠올리는 것이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서가모니불‘ 등 불보살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염불의 종류에는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염불(觀相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 등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염불선까지 포함한다.

칭명염불은 말 그대로 불보살이 명호를 부르면서 염하는 것이요, 관상염불은 불보살의 특징이나 모습을 보면서 염하는 것이며, 실상염불은 부처님의 본래 마음인 공의 이치를 염하는 것이다.

러나 칭명염불을 하면서 관상염불이나 실상염불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목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불보살을 염하면서 관상염불이나 실상염불을 병행한다.


염불하는 방법으로 소리를 내든 안 내든 그 불보살님의 명호를 또박또박 부르고 마음 속으로 떠올리고 귀로 들어야 한다.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잡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 삼매를 설한다. 삼매 상태에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을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염불왕생(念佛往生)]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흔히 염불하면 ‘나무아미타불’을 떠올린다. 그러나 염불은 칭하는 불보살의 대상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즉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관세음보살 염불이요, ‘지장보살’을 염하면 지장보살 염불인 것이다. 어떤 불보살을 염하든 간절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간절히, 그리고 빈틈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떠올려 삼매의 경지에 도달해야 부처님을 친견하여 왕생할 수 있고, 왕생한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염불을 삼매에 들 정도로 지속하여 정진하는 것을 정근(精勤)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불보살님의 지혜와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평안하게 해주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해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3. 선(禪) 

 

1) 선의 정의와 종류  


불교의 수행법하면 누구나 선 또는 참선을 떠올린다. 선은 앞서 언급했던 수행법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간경, 염불, 주력 등을 통해서도 선에 들어 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자력과 타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지금부터 언급하는 선은 철저히 내부지향적이며 자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밖을 향해서 무언가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이켜 비춘다는 데 선의 특징이 있다.


참선이란 ‘선(禪)에 참입한다’는 뜻이다. '참입(參入)'이란 마치 물과 우유처럼 혼연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선에 깊이 들어선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좌선(坐禪)이란 앉아서 선에 드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선, 참선, 좌선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앉아서 선에 드는 모습이 참선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선’이라고 하면 조사선이니 간화선을 떠올리는 이유도 그것들이 참선의 전통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은 이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와 팔리어 '쟌나(jhana)'를 중국에서 선나(禪那) 혹은 선(禪)으로 음역한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선(禪)’으로 표기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선(Seon)'으로, 중국은 '찬(Chan)'으로, 일본은 젠으로 각각 다르게 읽고 있다.


‘드야나’라는 말은 사유수(思惟修)를 뜻한다. 사유하면서 닦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유는 어떤 사태에 직면해서그것을 분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모아 집중해 들어가며 닦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 과정이 깊어지다보면 마음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되어 안과 밖이 전일한 생태에 이른다.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와 대상이 온전하게 하나가 된 상태, 그것을 삼매(參昧 samadhi) 또는 (定)이라고 부른다. 마치 맑은 거울과 같은 모습, 한 점 티끌도 없는 잔잔한 물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한 물 속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선은 이렇게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 들어가 삼매의 상태에 이르러 마음의 깨끗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마음의 본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자성 자리를 밝히는 것이며, 참나를 보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걸림이 없이 , 막힘이 없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선의 종류는 많다.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밖에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관법 수행도 선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국,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위빠사나가,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등이 실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禪)이라고 하면 이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지칭하며, 이것들이 선종의 주요 흐름을 형선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이러한 선과 구별하여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위빠사나에는 오정심관을 비롯한 여러 종류가 있다. 대승불교의 관법에는 일상관, 일몰관, 천태지관 등 다양하다.

 

선도 간화선, 묵조선 뿐만 아니라 염불선도 유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간경, 주력 등도 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간경선, 주력선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을 핵심 수행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으로 삼고 있으며, 여타의 수행법을 섭수 통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불교계는 염불, 주력, 간경, 위빠사나, 대승 관법 등을 간화선에 들어가기 이전의 기초 수행으로 정립할 수 있다고 본다.

 

2) 위빠사나

 

위빠사나는 동남아시아 및 구미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수행 인구가 늘고 있다. 위빠사나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의 원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위빠사나(vipasana)에서 ‘위(vi)’란 분리하다, 쪼개다 , 관통하다 라는 의미이며, 빠사나(pasana)는 관찰, 식별, 봄을 의미한다. 즉 어원적 의미를 분석해 보면 위빠사나는 ‘꿰뚫어 봄’, ‘통찰’을 뜻한다. 이것을 한자로 ‘관(觀)’ 혹은 ‘관법(觀法)’이라 번역했다.


이 위빠사나와 어울리는 개념이 사마타(samata)라는 말이다. 사마타(samata)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수행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이자 전제 조건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오로지 한 대상에 모아 집중해 들어가기 때문에 삼매에 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 분별작용을 그치게 된다. 그래서 ‘지(止)'라고 번역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어느 한 대상에 집중 되어 선에 들어 삼매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를 선정(禪定)이라 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마음에서 모든 분별작용이 사라져 고요해 졌을 때, 즉 사마타가 이루어졌을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위빠사나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지(止)와 관(觀), 선정과 지혜는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지관쌍운(止觀雙運), 성적등지(惺寂等持), 정혜균등(定慧均等)이라 한다.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오락가락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가 사라지고 고요해진다.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하는 지혜가 나온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의거한 대표적인 수행의 형태가 오정심관(五停心觀)이다. 오정심관이란 다섯 가지 중생의 이 마음을 정지시키는 관법이다. 
 

부정관(不淨觀)

부정관은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 닦는 관법이다. 물질적인 욕망과 애욕에 눈 먼 사람들은 우리들의 육체가 얼마나 더럽고 부질없는 모습인가를 봄으로써 탐욕을 멈추게 된다. 이 방법으로 우리들이 애지중지하는 육신의 덧없음과 더러운 모습을 관하는 것이다. 
 

자비관(慈悲觀)

자비관은 사람들이 성내고 다투는 마음을 그쳐 자비로운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순간적인 불쾌감을 참지 못해 우리는 무심코 화를 내게 되고, 그 결과 인간관계가 불편해지고 신뢰가 깨지며 싸움과 분쟁이 일어난다. 상대방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은 자신의 마음도 괴롭다. 이러한 성내는 마음을 뒤집으면 자비가 된다. 자비심으로 화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인연관(因緣觀)

욕망과 화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의 번뇌는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치를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것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지혜가 열리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계분별관(界分別觀)이라는 관법도 있다. 계분별관까지 포함하여 오정심관이라고 하지만, 이 계분별관과 인연관이 유사한 까닭에 계분별관 대신 불상관을 든다.

 

불상관(佛相觀)

이것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관하여 중생의 업장을 다스리는 관법이다.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관함으로써 그 결과 부처님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명확하게 각인되어 나의 중생업이 소멸되고 부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수식관(數息觀)

들어가고 나가는 숨을 관찰한다고 해서 입출식념(入出息念)이라고도 부른다. 주로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밖에 위빠사나에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도 중요시 한다. 
 

3) 조사선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태고적부터 자리 잡고 있는 본래 부처로서의 내 마음자리를 밝히는데 있다. 이 본래 부처로서의 ‘참나' 는 어느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으며, 허공처럼 청정하고 한계가 없어 풍진에 물들지 않고 손상되지 않는다. 어떠한 가식과 꾸밈도 없고 인위적인 발자취조차 남기지 않는다. 삼라만상과 다투지 않고 서로 어울려 고요한 평화로움만 감돌뿐이다.


세파에 찌들고 시달려 살아가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다. 이것을 ‘본래 마음’, ‘본래 면목’ 이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고도 한다.


조사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에 관한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즉 내가 본래 부처요,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위적인 수행이 아니라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조사선은 조작과 시비 분별을 떠나기 위한 수행이다.


이렇게 조사선은 우주 만물은 모두 ‘본래 부처’이며 이미 다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성불’을 내세운다.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이니 바로 이 자리에서 자기가 완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외친다. “바로 네 얼굴 앞에서 위없는 참사람이 왔다갔다 하고 있으니, 그것을 보라, 보라!”


이러한 임제 선사 같은 분을 조사(祖師)라 한다. 조사란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불심을 체득하여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력과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조사들은 부처님과 같이 위없는 깨달음을 보여준다. 조사들의 위치는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다.


선은 문자 이전의 참마음을 곧바로 보여준다. 선지식은 어떤 매개도 통하지 않고 제자의 눈앞에서 그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제자가 그것을 보고 깨치는 순간 이심전심의 미소가 번지는 것이다. 영축산 정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오직 백발이 성성한 가섭존자 한 분만 그 뜻을 알아듣고 고요히 미소짓듯이 말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은 바로 본래 마음을,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그 마음을 보면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일러 ‘자기 마음을 직관하여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조사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특징이다.


조사선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오간 선문답이 많이 있다. 이 모든 선문답은 스승이 제자에게 보여준 문자 이전의 참마음이요, 본래 면목을 가리킨다. 제자는 선사가 제시한 그 말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알아차리는 순간 깨닫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 말 끝에 바로 깨닫는 것을 ‘언하변오(言下便悟)’라 한다. 말을 듣자마자, 어떤 행위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각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언하변오 또한 조사선의 큰 특징이다.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 선사는 달마 선사의 “불안한 마음을 가져 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깨쳤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단박에 떨쳐버리고 깨달음을 연 것이다.


이 언하변오(言下便悟)와 관련하여 우리는 돈오(頓悟)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돈오'란 단박 깨닫는 것이다. 단번에 핵심, 알맹이, 바닥, 샘물, 뿌리로 들어간다. 서서히 차츰차츰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완전히 깨닫는 것이다. 인도의 선이 점차로 깨달아 가는 선이라면, 중국의 조사선은 이렇게 단박에 깨닫는 돈오를 내건다. 이러한 돈오의 가치를 최초를 표방한 선이 달마조사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이다.  

 

4. 간화선


1) 간화선과 화두 참구  

 

간화선(看話禪)은 조사선의 정신을 고스란히 받들고 있다. 다만 조사들의 선문답을 화두로 정형화 시켜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조사선과 간화선 전통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간화선을 중심 수행으로 내걸고 있다. 해마다 90여 개의 선원에서 2,000여 명의 수행자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시민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많은 재가불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간화선이라고 할 때 ‘간화’는 볼 간(看)자, 말 화(話)자가 결합된 단어이다. 여기서 화자는 화두를 의미한다. 화두를 간(看)하는 것, 즉 화두를 보는 것이 간화선이다. 화두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말이되 생각의 길과 말길, 마음의 길이 끊어진 말이다. 그것은 생각과 말이 나오기 이전의 본래 자리를 일컫는다. 한편 화두의 두(頭)자를 해석하며 말머리라고도 하는데, 이 또한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 자리를 일컬는 근원인 키워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들고 부처의 자리를 확인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일러 ‘화두를 든다’고 하고 ‘화두를 참구한다’ , ‘화두 공부를 한다.’고도 한다. 화두를 간할 때 그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분석하여 헤아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 속으로 사무치게 들어가야 한다. 화두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든다고 하면, 그것은 화두가 내 마음의 중심에 딱 걸리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뿐만 아니라 삼백육십 개의 골절과 팔만사천개의 털구멍으로 , 온몸이 화두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한다.


화두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에, 화두가 마음에 걸리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간절한 의심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솟아 나온다. 이렇게 화두에 대해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그 화두에 몰입해 들어가,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화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간(看)하는 것이며 참구이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생각과 말로는 찾을 수 없다. 헤아리고 분석하는 알음알이로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은 물론 진리를 바로 볼 수 없다. 본래 그 자리는 말과 생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이문 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이차문내 막존지해 : 以此門內 莫存知解)’ 라는 글귀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알음알이란 지금까지 머릿속에 간직해 온갖지식과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던가,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다던가, 이것은 이익이 되고 저것은 손해가 된다는 등의 판단 분별이 모두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이다.


화두는 이러한 알음알이의 작용, 모든 생각이나 판단의 작용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화두는 우리를 생각이 끊어진 자리로 인도하여 부처의 자리를 보게 해준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들고 모든 사유작용을 끊고, 그 생각이 끊긴 자리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인도의 선이나 그 밖의 선이 마음을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여 차례차례 깊이 관찰해 들어간다면,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단박에 마음의 본바탕으로 들어간다.


쉽게 말해 간화선은 마음 바닥으로 곧바로 들어가 그 깨끗한 본바탕을 가리고 있는 모든 쓰레기를 치워내고 그 본바탕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나무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 하나를 윤기있게 하기 보다는 뿌리와 줄기 그자체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지가 무성하게 뻗어나가고 잎사귀에서 풀은 생명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곁가지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화두 삼매에 이르러 화두가 타파되면 본래 내 자신을 발견한다. 나의 모든 고정관념, 생각, 판단, 가치기준, 무의식까지 철저히 타파되어 본래 내 자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보는 것이다. 
 

2) 화두 참구의 중요한 요소  

 

예로부터 화두 참구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로서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들었다. 이것을 삼요(三要)라고 한다.


대신심(大信心)이란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다. 내가 본래 성불해 있다는 인간에 대한 큰 긍정이다. 본래 부처란 우리가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완벽한 부처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없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돈 많은 사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는 있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지위 고하, 신분, 성별,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본래 부처로서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비록 일시적으로 큰 죄를 지어 지옥같은 고통을 받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의 생명이 숨기고 있기에 언제라도 부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용기가 충만해 있다. 비록 착각과 망상속에서 중생놀음을 하고 있지만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내가 본래 부처라는 커다는 믿음 위에서 간화선은 출발한다. 그리고 나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선지식에게 철저히 하심하고 믿고 따라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즉 화두는 본래 면목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화두를 타파하면 반드시 본래 부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대분심(大憤心)이란 내가 본래 부처인데 현재 중생놀음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분한 마음이다. 하루하루 망상과 착각 속에서 눈앞의 탐욕과 육체적 안락에 젖어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생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책이다. 그래서 이러한 욕망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확철대오하겠다는 서원이 마음에서 울컥울컥 솟구쳐 나와야 한다. 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여 당당하고 걸림 없이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가슴 절절히 우러나와야 한다.


대의심(大疑心)이란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의심이다. 화두는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 수가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이리 갈 수도 없고 저리 갈 수도 없으며 뒤로 물러 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유의 통로가 차단된다.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다. 들어갈 만한 문이 없다. 그래서 무문(無門)이라 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닫힌 문 앞에서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철두철미하게 의심해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큰 의심의 일어났을 때 온 몸과 마음이 하나의 화두덩어리가 되어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온통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하는 사무치는 의심이다. 그래야만 화두에 탁 고리가 걸려 화두와 나 사이에 빈틈이 없다. 그렇게 하다 보면 화두를 드는 데 힘을 얻게 된다. 화두 드는 힘을 얻게 되면 동시에 힘을 덜게 되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이 밖에 화두참구에서 중요한 것은 발심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나,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나, 걸림 없는 나 자신을 찾아야겠다는 발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이 되려면 우선 정견이 확보되어야 한다. 정견이란 무아, 연기, 공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 이 도리를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실천해 보겠다는 마음이 솟고쳐 나와야 한다. 이러한 발심과 앞서 말한 화두 참구의 세가지 요소가 연결될 때, 화두가 제대로 걸린다.


그리고 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 지, 화두를 들 때 경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해 줄 수 있는 스승, 즉 선지식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았을 때 화두 드는 힘이 생긴다. 그렇다면 선지식은 어떻게 만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하면 그 하는 만큼 선지식이 보인다.
 

3) 화두 참구와 일상생활  

 

재가자들도 화두를 들고 일상생활을 활기 있게 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주변에서 전개되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화두로 다스리고 현실에 깨어 있는 것이다. 화가 나려 할 때, 정신이 혼미해질 때, 어떤 대상에 한없이 집착하려 들 때, 화두를 들고 화두에 역력히 깨어 있게 되면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근심 걱정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간화선은 본래 생활선이다.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어느 정도 점검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가 재미있어지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절이나 이웃에 망설임 없이 보시 하고싶고 그 보시하는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그야말로 열린 사람이다. 이와는 다리 남의 허물이 눈에 더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고 보시하는 일에 인색해진다면, 이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것은 ‘아집’을 없애는 것이다. 그것은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배우자나 직장 동료, 만나는 모든 이들을 부처님 대하듯 하면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 수행하는 불자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일찍이 가장 가치 있는 수행이요, 질러가는 수행법이라 해서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다. 불자들은 이러한 간화선과 만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 불자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수행을 할 때는 주변 환경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이 좋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조용하고 정갈한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선의 자세도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서거나 어떤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가장 안정적인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 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經行)이라 한다. 이 때도 화두를 잊고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방선 또한 참선이 연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인은 걷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도 화두 드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무심코 걸어가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나를 지배하는 것은 쓸데없는 망상과 잡념이다. 화두로 이러한 망상과 잡념을 거두어내고 마음 속 깊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를 해나가면, 비록 깨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화두 드는 힘으로 일상생활을 편히 해나갈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이 혼미해질 때 화두를 들어 보자.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생활에 중심이 잡힐 것이다.

출처 : 산사의 풍경소리
글쓴이 : 寂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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