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도피안(到彼岸) - 어디로 향하는 뗏목입니까?

마음정원(寂光) 2012. 10. 1. 18:15

어디로 향하는 뗏목입니까?

바라밀이 무엇인가요?
도피안(到彼岸) 즉 피안에 닿음이고, 피안은 강 건너 저 언덕을 말하는 것이니 '강 건너 저편 언덕에 도달함'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중요한 불교술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즉 차안(此岸-이편 언덕)에서 출발해 저편 언덕에 닿는 것이 바라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강의 물살이 워낙 거세어 맨몸으로 헤엄쳐 건널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뗏목'이라고 대표한 무언가 탈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뗏목과 바라밀은 다르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덕 이편에서 출발해 저편에 닿고자 한다면, 뗏목을 수단으로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저 언덕에 닿음[도피안-바라밀]이라는

결과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연(緣)]과 결과[기(起)]의 관계인 것이지요.

(중략..)

저는 출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부처를 이루고,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부처로 사신 45년간 설하신 이야기」

즉 니까야에 의지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의 정체성을 말하라 하면 누구든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삼특상(三特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요즈음 저에게 길을 묻는 법우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몇몇 법우님은 저에게 항의합니다.
뗏목의 비유도 모르시느냐, 강을 건너면 뗏목도 버리고 가야하는 것 아니냐, 어찌 스님은 무상-고-무아를 붙잡고

놓을 줄을 모르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답합니다.
그대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까?
그대는 강의 건너편 어디쯤에 닿으셨습니까?
그대가 닿은 그 자리가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닿으신 그 자리입니까?

만약에 그대가 아직 강 건너에 닿지 못하셨다면
지금 그대가 할 일은 뗏목을 버릴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대가 할 일은 이 뗏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제 속도를 내어 저 언덕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만약 그대의 뗏목이 강 건너 저편을 향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면,
지금 그대에게 급한 일은 도착후 뗏목처리 문제에 대함이 아니라 방향타를 조정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분명한 한 가지는,
우리가 닿으려는 저편 언덕은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닿으신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이 언덕의 세 가지 특상[삼특상(三特相)] 가운데 무상(無常)은 상(常)으로,

고(苦)는 락(樂)으로 변한 자리입니다.
모든 조건지어짐에서 벗어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에 의하면 그 자리에도 아(我)는 없습니다.
고정불변의 실체인 '본질로서의 나[자아(自我)]'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의 한 마디는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지금 그대께서 무언가 아(我)를 세우는 불교를 찾고자 하신다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닿은 저편 언덕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아닌 곳은 괴로움이 소멸된 자리[고멸(苦滅)]가 아닙니다.

열반(涅槃)이라고 부처님에 의해 이름지어진 그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대께서 저에게 뗏목을 버려야 하는 줄도 모른다 탓하신다면,
저로서는 오직 '아직 저의 갈길이 멉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닿은 바로 그 자리로 나아가려 합니다.

그 방향이 확실할 때 애써 노력하는 성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께서도 눈을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대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고자 하신다면,
저로서는 오직 그곳이 부처님이 닿은 그 자리가 아니라고 알려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문제는 그대의 몫입니다. 그러니 저를 보고 뗏목의 비유도 모르느냐고 추궁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직 그 뗏목에 의지하여 그 자리로 나아가는 자일 뿐이니 말입니다.



해피스님(happysangha)의 글 가운데에서 일부만 옮김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