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스크랩] *무아의 실천

마음정원(寂光) 2012. 9. 20. 08:11

무아의 실천

“무아설의 본뜻은 자기에 대한 집착 버리는 것”
불교의 특징적 사상인 ‘제법무아’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그리고 현상적 존재[諸法]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無我]’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 불변하는 개체나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기치를 내세우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atman)과 같은 존재는 무아설(無我說)의 견지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다.

사실상 불교의 무아설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아설의 의미는 왜곡되기 일쑤다.

그리하여 무아설은 우리를 허무주의나 도덕적 회의로 이끌어가기도 한다. 독일 불교학자 올덴베르그(H. Oldenberg)는 무아와 열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불교를 허무주의로 이해하고 있거니와, 부처님 당시 외도(外道)들 중에도 무아설에

근거하여 불교를 허무주의로 곡해한 예가 있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도 불교를 허무주의로 곡해한 사람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살을 한 비구가 있었다는 기록도 간혹

눈에 띈다.
부처님이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는 상주론(常住論)과 인격의 연속성을 무시하고 도덕적 인과율과 책임을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을 똑같이 배척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무아설에 대한 허무주의적.단멸론적 이해는 일단 오류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든가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자기 밖의 그 무엇을 의지하리요.”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실, 불교에서 부정하는 것은 실아(實我, 實體我)일 뿐, 가아(假我)와 진아(眞我)는 모두 인정한다. 나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 버리고  자기를 객관화시켜야 대자유인돼 요컨대 망상분별의 소산인,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는 없지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일시적으로 결합되어 존재하는 오온가화합체(五蘊假和合體)로서 여기 이렇게 숨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임시적인 나[假我]와 불교의 실천적 수행에 의해 체득되는 이상적인 참나[眞我]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 역정이란 가아가 진아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범부중생들은 오온가화합의 가아를 가아로서 보지 못하고 실아로 집착하는 것이다.
이 집착이 있는 한 ‘참나’는 결코 실현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끊임없이 무아를 설하여 그 집착을 끊게 하고 마침내 ‘참나’를 실현토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아의 실천[無我行]이란 ‘자기를 망각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참나의 실현’ ‘열반의 성취’ 다시 말해서 ‘인간완성’ 내지 ‘자기완성’을 향한 적극적인 노력과 실천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아설이 궁극적으로 ‘참나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다면, 참나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참나를 찾는다”거나 “참나를 깨닫는다” 또는 “나에 의지한다”고 할 때에, 자칫하면 참나를 현실적인 나[假我]를 떠나 있는 어떤 완성체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어떤 완성체로서 존재하는 나란 결국 실체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아’의 본래적인 의미를 떠올려 볼 때 그러한 ‘완성체의 나’ 역시 인정될 수 없다.
실체가 있는 불변의 대상적 존재는 어떠한 유형이든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기본 태도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생사와 열반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사 속의 가아와 열반의 진아 또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진아는 가아의 참다운 현실인 것이요, 깨달아야(발견해야) 하고 또한 만들어가야(창조해야) 할 실존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나’를 떠나서 참나를 찾으려고 하는 모든 기도는 어리석은 것이요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우주적 생명 그 자체’ 또는 ‘존재의 영원한 법칙과 원리’를 참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참나라기보다는 오히려 참나의 기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아를 통해서 나에 대한 집착[我執]의 어리석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아집을 버린다 하여 모든 일에 소극적인 자세로 임한다든지 행동이 위축된다든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는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수많은 인간사의 매듭을 아예 풀어보려 들지도 않으면서 외면해 버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집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정법에 의거하여 자기를 객관화시키라는 것이지, 무엇이든 무조건 체념하거나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창조적 질서에 기여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이라면 주저함 없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무아행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무아 사상을 전체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아의 실천이란 결코 개성도 없고 독창성도 없는, 획일적이고도 규격화된 삶의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사회화시키는 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로운 행위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개성과 독창성을 한껏 살려낼 수 있을 때, 도리어 무아행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아행이란 ‘나를 끝없이 죽여 가며 동시에 나를 끝없이 살려내는, 그 중도적 노력과 실천’이 되는 것이다.
무아(無我)의 의미와 삶의 주체 흔히 무아(無我)에 대해 말하면 "내가 없다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단 말인가?"라는

반문이 뒤따릅니다.
무아를 잘못 이해하면 '나'란 없기 때문에 바르게 살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할 필요도 없으며, 남을 괴롭혀도 그들도

무아이므로 상관없다는 궤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교에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행위의 주체로써의 나', '삶의 주체로써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나'는 내가 의지해야 할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아의 참뜻은 '나'라는 존재의 완전한 부정이 아니라 '나'라는 개체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아닌 무수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緣起)의 산물입니다.

삼법인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무상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가 아니다[非我]'라고 합니다.
나는 나의 뜻과 무관하게 태어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死] 과정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내 자신을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부처님은 나는 '내가 아닌 것[非我]'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독자적 실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그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성을 바로 깨닫는 것이 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내 몸 속에 돌고 있는 피는 물[水]에서 왔으며, 체온은 불[火]에서 왔으며, 활동성은 바람[風]에서 왔으며, 피부와

머리카락은 땅[地]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라 산이고 대지이며 강물이고 우주인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닌 타자들이 인연(因緣)을 매개로 잠시 모여있는 오온(五蘊)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독자적

실체가 없고 관계성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자성(自性)이 공(空)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용수(龍樹)는 [중론]에서 연기와 공의 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연으로 생긴 법들(因緣所生法) 나는 그것을 공이라고 설한다(我說卽是空). 또 이것을 거짓 이름이라고 한다(亦爲是假名). 이것이 중도의 뜻이다(亦是中道義)."라고 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연으로 존재하는데 '나'라는 존재도 바로 그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체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인해 있기 때문에 독자적 실체성은 공(空)하며, '나'라는 존재도 공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인연의 산물에 대해 '인간', '동물', '무정물'과 같은 거짓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무아를 설하는 것은 '내가 없다'라는 '나의 부재(不在)'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타자의

현전(現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아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내가 바로 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를 사유함으로써 없어지는 것은 내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아상(我相)의 울타리입니다.
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협소한 자기인식을 벗어버리고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나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설은 '나'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자기, 우주적 자아를 깨닫고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를 설한다고 해서 업(業)의 주체가 없다거나, 삶을 계획하는 창조적 행위와 미래를 설계하는 주체로써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유훈으로 남기고 계십니다. [법구경]에서도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이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과 행위의 주인은 바로 나이며, 나를 통제하고 미래의 올바른 삶을 빚어내는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 자신이야말로 고해(苦海)에서 나를 구해주는 섬[洲]이라고 했습니다.

즉 장아함 [유행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스스로를 주(洲)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말고 머물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욕망[貪]·분노[瞋]·어리석음[癡]과 같은 삼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상에서 오직 스스로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구하는 길입니다.
불교는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 '섬'을 찾고 개발하는 종교입니다.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교를 자력문(自力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아설은 자아에 대한 허구적 이미지에 대한 부정이며 이를 통해 참다운 자기를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 같은 오류를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고립적 개체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존재의 보편적 관계성과 공존을 성찰하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라'거나, '자기를 망각하라'는 등의 가르침을 위해 무아를 설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아상(我相)에 물든 삶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것이지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무아설은 창조적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업과 행위의 주체로써 나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과 그에 따르는 결과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삼독을 거슬러 수행할 수 있고 그 결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글쓴이 : 희작(喜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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