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마음

[스크랩] *참선 수행과 선의 세계

마음정원(寂光) 2012. 8. 19. 13:13
참선 수행

 

선()의 유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신집중의 수행(修行)방법. 
선은 팔리어(語) 자나(jh嚆na)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이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嚆na)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한다. 이를 정(定)·정려(靜慮)·기악(棄惡)·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선사상(禪思想)이 인도에서 발생한 것은 아리아인(人)이 인도에 침입하기(BC 1300년경) 이전으로 생각된다. 인도 원주민의 것인 인더스문명(BC 2800∼BC 1800년경)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인장(요가 수행을 하고 있는 시바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음. BC 2500년경)이나 석제의 흉상(선정에 들어가 있는 요가 수행자의 모습. BC 2000년경)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아리아인의 요가[瑜伽]사상은 이를 수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아인의 경전 《리그 베다》(BC 1200∼BC 800 편찬)에 보이는 요가라는 말은 후대에서와 같은 수행방법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는 초자연적 신통력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가 실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요가는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체계화되어 《카타카 우파니샤드》 및 《마이트라야나 우파니샤드》 등에서는 브라만(brahman:우주의 원리)과 아트만(嚆tman:개인의 원리)을 인식하는 수단, 브라만과 일치되기 위한 실천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요가사상은 불교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교에서는 불교 특유의 선사상을 발전시켰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후 처음에는 두 선인에게서 당시의 최고의 선정을 배웠지만, 선정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 사후의 해탈(解脫)을 구할 뿐, 현세에서의 해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를 버리고 홀로 명상에 잠겨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상황을 입증해준다. 즉 선정은 신심일여(身心一如)의 입장에서 일상생활 속에 해탈의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설은 원시불교 이래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되어 왔다.  
불교인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삼학(三學:戒·定·慧), 사무량심(四無量心:慈·悲·喜·捨), 사념처(四念處:身·愛·心·法의 네 염처), 그리고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이 모두 선(禪)수행 방법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원시불교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팔등지[八等至:사선+四無色定(空無邊處·識無邊處·無所有處·非想非非想處)], 구차제정(九次第定:사선+사무색정+滅盡定)을 들고 있다.  
부파(部派)불교에서는 선정을 학문적으로 조직·해설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상기한 원시불교의 9종 이외에, 삼등지(三等持:空등지·無相등지·無願등지), 식염관(食厭觀), 계차별관(界差別觀), 오정심관(五停心觀:不淨觀·慈悲觀·因緣觀·界分別觀·數息觀) 등인데, 그 공통의 특색은 ‘실재관(實在觀)’에 의해 고정화되었다는 점과, 또한 현실생활로부터 격리된 승원(僧院) 중심의 선정이 행해지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 이타(利他)의 정신에 입각한 행위로서의 선바라밀(禪波羅蜜)이 강조되어 선정이 능동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점은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잘 나타나 있다.  
원래 '지'는 선정을, '관'은 지혜, 즉 반야(般若)를 의미한다. 그러나 특히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연기(眞如緣起)에 근거한 자리(自利)·이타(利他)를 삼매(三昧)의 체험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는 자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며, '관'은 이타·교화의 활동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는 소승적 선관을 답습하면서도, 후자에서 생사의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관조하여 대비관(大悲觀)을 갖고, 그들을 구제하려는 서원(誓願)을 세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선정의 단계를 여러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외도선(外道禪)·성문선(聲聞禪)·보살선(菩薩禪), 《능가경(楞伽經)》의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외도·성문·연각의 선)·관찰의선(觀察義禪:法無我, 반야경의 空, 즉 객체는 모두 실체가 없다는 의미를 관찰하는 선)·반연여선(攀緣如禪:모든 분별을 떠남)·여래선(如來禪:일체중생의 구제에 전념하는 선정) 등과,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외도선·범부선(凡夫禪)·소승선·대승선·최상승선(最上乘禪) 등으로의 구분이 그것이다.  
이같은 대승불교의 선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 혜가(慧可) → 승찬(僧璨) → 도신(道信) → 홍인(弘忍) →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 때에 한국에 전래되어, 고려시대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으로 발전하였고, 지눌(知訥)과 같은 고승을 낳았다. 오늘날의 한국 불교도 크게 보아 선종이라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수행법중에서 참선수행은 그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제방에서 왕성히 참선이 행해지고 또한 참선수행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도 높다. 그런데 일반신도들은 참선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직접 수행하기에는 아직 거리감이 있다. 왜냐하면 선사들의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고 매력을 느끼고 실제 수행에 접근하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자신의 종교신자에게 신행방법이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구나 참선수행은 원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수행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선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책은 많은데 정작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고, 선법문을 하는 분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참선 방법에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참선수행의 의미 
禪이란 무엇인가? 선은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와 우주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을 확립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참선수행이 현대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인간은 참된 주체적 삶을 스스로 살지 못하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고 있다. 자아(自我)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 삶을 돌이켜 보면 타성적인 생활관습으로 살고 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산다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위해 사는 이도 있고,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산다고도 한다. 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 일상의 반복 속에 묻혀 살기도 하고, 하루하루 삶이 고통뿐인 삶도 있다. 이러한 각각의 삶 속에서 지각 있는 가슴은「나는 무엇인가」를 외치게 된다.  
나의 진면목이 무엇이며 울고, 웃고, 나고, 죽는 주인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더 많은 갈등과 불안요인으로 둘러 쌓여 있다. 더 높은 생산력 속에서도 인간은 여유는커녕 가중된 업무와 스트레스와 고독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이기적으로 되고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안겨주며 스스로 지쳐가고 있다. 사회전체가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물질적 풍요는 왜 우리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지 못하는지. 
여기에 선(禪)은 나는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참다운 자기로 살게 된다. 삶에 의미를 주고 자신의 참된 면목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은 무엇이 인간의 참된 삶이냐를 문제 삼으며 자기 주체를 찾아 활발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 참선수행의 정의 
참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정의를 내려보자.  
참선이란 무엇인가. 참구한다. 참여한다는 의미의 참과 선이라는 말의 합성어가 참선이다. 연구가 객관적 자료와 생각과 논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면 참구는 이런 것들을 떠난 체험과 직관에 의해 진행된다.  
선이란 범어 디야나(Dhyana)를 한역한 선나의 약어이다. 번역하여 공덕총림, 사유수, 정려라 한다.  
선을 통해 얻어지는 공능이 한량없으므로 공덕총림이라하고, 사유하여 닦아가므로 수유수라 하며, 선을 닦아 마음이 적정하고 여실한 지혜가 드러나므로 정려라 한다. 이 마음은 정심(定心)이므로 선정이라고도 한다.  
정은 범어 삼마디(samadhi)의 음역 삼매, 삼마지, 삼마야, 삼마제 등을 의역한 말로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하지 않음을 말한다. 삼매는 다른 말로 등지(等地)라고도 하는데 평등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불교의 수행법은 계정혜 3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총설편에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 끝과 같이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참선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라고 한다. 정과 혜는 수행의 증득의 측면을, 지와 관은 닦는 방법의 측면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어 지관쌍수라고도 한다.  
따라서 참선수행은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아나파나삿티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이자 유일한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참선수행을 우리 종단의 전통적 수행법인 간화선에 근간을 두면서도 이것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부처님 당시부터 행해지던 불교의 다양한 지관법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화두참구법이 독특하고 위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불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듯이 선 수행의 발전단계들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이 선방에서 마음 놓고 24시간 화두만 챙길 수 있는 전문수행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가정과 직장생활을 하는 재가불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여러가지 방법 들을 통해 그때 그때 스스로 응용하고 적용해가며 생활 속에서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법의 제시가 필수적이다. 그 중에서도 관법에 관해 자세히 제시한 것은 간화선이라 할 때 간(看)이라는 말도 결국 본다는 의미로 관(觀)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관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꽤뚫어 보는 것이다. 간화란 화두를 참구한다는 의미인데 역시 화두를 철파한다. 뚫는다고 한다. 다만 화두참구에서는 의심이 꽤뚫음의 핵심이 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의심하면서 그 힘으로 화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꽤뚫어 보는 관법수행이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초심자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두와 하나가 되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이므로 일상생활에서 늘 깨어있을 수 있는 관법 수행은 재가수행자들에게 유용한 수행법이 될 것이다.

 3. 참선수행의 기본요건 
참선수행의 기본요건 및 자세와 참선 수행시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극복방법을 천태지관의 25방편을 근간으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다섯가지를 갖춤(具五緣) 
①지계청정(持戒淸淨) 
계를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율은 모든 수행의 바탕으로 참선수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②의식구족(衣食具足) 
옷과 음식을 갖추는 것이다. 수행자는 오직 굶주림과 추위만을 면할 뿐 사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아예 갖추지 않는 것도 선수행을 방해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옷가지와 음식물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의 경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무가 있으므로 부득이 여러 가지 소유물들이 생기겠지만 앞에서 소욕지족을 말했듯이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③한거정처(閑居靜處)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산란하고 시끄러움을 멀리 피하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또한 마음 속에 일이 없는 것을 한적함이라 하고, 마음 속에 시끄러움이 없는 것을 조용함이라 한다. 몸과 마음이 한적하고 조용해야 곧 선을 닦을 수 있다. 
④식제연무(息諸緣務) 
모든 인연있는 일을 쉬는 것이다. 작위적인 모든 사업을 하지 않고 세속적인 왕래를 좇거나 찾지 않는다. 방술과 재주를 익히지 않고 학문과 강론을 숭상하지 않는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오직 선을 닦을 뿐이다. 몸과 마음에 일이 많으면 수행을 할 수 없다.  
수행인은 세속의 일을 줄여 주변을 정리하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일을 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고, 쉴 때는 몸과 마음을 확실히 쉬며, 사교모임은 줄이이는 것이다. 또한 외도의 경전이나 외전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 불전이라도 지식을 쫓아 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⑤근선지식(近善知識) 
선지식의 필요성은 총설편에서도 밝혔지만 특히 참선수행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선지식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밖에서 보호하는 선지식으로서, 살림을 꾸리고 공양하여 수행인을 잘 보호하며 어지럽지 않게 하는 분이다.  
둘째는 함께 행하는 선지식으로서 함께 같은 길을 가면서 서로 채찍질해주고 북돋아주며 서로 어지럽게 하지 않는 분이다. 셋째는 가르쳐 주는 선지식이니 내외방편과 선정의 법문으로 가르쳐 이익되게 하는 분이다. 모든 수행에 선지식이 필수적이지만 특히 참선수행에서는 선지식이 더욱 중요하다. 만공스님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으로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다섯가지를 꾸짖음(呵五欲) 
마음을 기쁘게 하고 몸을 안락하게 하는 세간의 ①모양, ②소리, ③냄새, ④맛, ⑤촉감 등을 꾸짖는다. 이것들은 법부의 마음에 애착과 탐욕을 생기게하여 온갖 악업을 짓게 하므로 수행자는 항상 이를 경계해야 한다. 수행자는 이렇게 꾸짖어 책망한다. 
"일체중생은 항상 다섯가지 욕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 다섯가지 욕망은 얻을수록 점점 심해지니 마치 불에 땔나무를 더해 주는 것과 같다. 오욕은 이익이 없으니 개가 말라빠진 뼈를 씹는 것과 같고, 오욕은 다툼을 늘이니 새들이 고기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것과 같으며, 오욕은 사람을 태우니 역풍에 횃불을 잡은 것과 같다.  
또 오욕은 사람을 해치니 모진 뱀을 밟은 것과 같고, 오욕은 알맹이가 없으니 꿈에서 얻은 것과 같으며, 오욕은 오래가지 않으니 잠시 빌린 것과 같다. 어리석은 저 중생은 항상 오욕의 부림을 당하므로 '오욕의 노예'라 부른다. 이 욕망에 무릎 꿇어 삼악도에 떨어지게 되면 영영 벗어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내가 지금 수도하는 데도 장애가 되니 이것은 큰 도적이다. 마땅히 서둘러 이것을 멀리하고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3)다섯가지를 버림(棄五蓋) 
①탐욕 
다섯가지 감각적 욕망을 비롯하여 모든 욕망의 근원은 나라는 환상과 내것이라는 집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필사적인 애착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정관을 닦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다섯감관을 잘 수호해야 한다.  
다섯감관을 도둑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감각적 욕망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 때문에 도둑을 지키듯이 정신차리고 감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대상을 대하더라도 즐거워하지 않고, 환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대상에 대한 즐거움이 사라진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애착이 사라지고 애착이 없으면 속박도 없다.  
②성냄 
악의란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일에 대한 성내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탐욕 다음에 경계해야 할 것이 성냄이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앞에서 본 자비관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화가 일어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남에게 화를 내는 것은 마치 이글거리는 숯덩어리, 달군 쇠몽둥이 혹은 똥을 집어 드는 꼴이구나."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자기에게 화를 낼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라. "마치 받지 않은 선물이나, 바람을 향해던진 한 줌 먼지와 같이 그 사람의 노여움도 되돌아가서 제 머리에 떨어지고 말 것을."  
③해태와 혼침 
정신적 해이와 육체적 졸음에 대한 극복방법은 사수념(死隨念)이라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무상고를 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음이 닥칠 지 모른다. 지금 당장 죽음이 와도 후회하지 않겠는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모든 것은 무상함을 관하라. 정신이 번뜩 들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분발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여덟가지 각성제를 상기함으로써 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여덟이란 생, 노, 병, 사, 삼악도의 고통, 윤회에 기인한 과거세의 괴로움, 윤회로 기인한 미래세의 괴로움 그리고 자양을 구하는 데 기인하는 현생의 괴로움이다. '지금은 젊지만 나는 곧 늙음이 찾아 올 것이다. 늙음에 짓눌린 자 정진하기 여럽다. 또, 지금은 병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소화도 잘되고 몸은 균형잡혀 있다. 그러나 이 몸 병마에 사로잡힐 때가 오리라. 병든 자 수행하기 어렵다. 지금은 양식이 풍부하다. 그러나 곤란해 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수행에만 힘 쏟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행할 수 있는 지금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참선 중에 애를 먹는 부분 중의 하나가 졸음이다. 수마라고할 정도로 위력적으로 덤벼든다. 이 때에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목련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졸리운가? 목갈라나여, 졸고있는가? 목갈라나여"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목갈라나여, 어떤 생각을 하다가 혼침이 그대를 덮쳤든지간에, 그 생각에 더 이상 주의를 팔지 말아야 하며, 그 생각에 자주 머물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느니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해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이미 듣고 배운 바, 교의(法)를 마음 속에 떠올려 생각하고 되새기라.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가 이미 듣고 배운 교의를 모두 세세하게 암송하라. 그러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귓볼을 잡아당기고 손바닥으로 팔다리를 문지른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하늘의 별을 쳐다본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한 낮의 밝은 빛을 떠올려라(光明想). 낮에 그러했듯이 밤에도, 밤에 그랬듯이 낮에도 또한 맑고 트인 마음으로 밝음에 가득찬 의식을 계발한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감각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도록 한 채, 앞과 뒤를 똑바로 알아차리면서 왔다갔다 걷는다. 그리하면 혼침이 사라질 수 있으리라. 
그래도 혼침이 사라지지 않으면 곧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간직한 채 정념.정지하며 사자모양새로 두 발을 포개어 오른쪽이 바닥으로 가도록 조심스럽게 눕는다. 
다시 깨어나는 대로 "드러눕거나 기대는 즐거움에, 잠자는 즐거움에 빠지지 않으리라"생각하며 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④들뜸과 회환 
돌아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유희에 빠지는 것을 몸의 들뜸이라 하고, 읊고 노래하는 것을 즐기고 시비 가리는 것을 좋아하며 이익 없는 담론을 장활하게 설하는 것을 입의 들뜸이라 한다. 정서가 방일하고 제멋대로 상상하여 세간의 문장과 재주를 연구하며 온갖 나쁜 생각과 관찰로 사유함이 그치지 않는 것을 마음의 들뜸이라 한다. 이럴 때에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비유하면 여기 통 속에 물이 있는데 바람이 휘저어 흔들리고 출렁거려 파문이 인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 비친 자기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으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들뜸과 회한에서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나니,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행복도 남의 행복도 그리고 자신과 남의 행복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하느니라. 또한 이미 오래 전에 마음에 새겨 둔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새기지 않은 것들이랴. 이러한 들뜸과 회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율을 준수해야 하며 산란심을 극복하는 대치법으로 호흡관이 있다.

⑤회의적 의심 
의심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이것은 도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다. 첫째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요, 둘째 스승을 의심하는 것이며, 셋째 법을 의심하는 것이다. 자신을 의심함이란 사람이 스스로 나의 근기는 어둡고 둔하며 죄의 때가 깊고도 무거우니 법의 그릇이 아니지 않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승을 의심함이란 무엇인가. 스승의 위의를 보면서 '외모가 그럴 듯하지 않고 스스로도 도가 없는데 어찌 나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을 볼 때는 단지 그 도만 취할 뿐 그 모습을 취해서는 안된다.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법이 더 낫고 어떤 법이 더 못한지, 과연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마음으로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하면 법이 마음 속으로 젖어들지 못해 비록 법 가운데 있더라도 마침내 열반을 얻는 바가 없다. 의혹에 찬 수행자의 마음 속에는 잇달아 동요와 주저가 일고 결단력도 부적해지며 근심만 생길 뿐이다. 이리하여 그는 안전한 성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자기 내면에다 장애물을 스스로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심의 해로움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믿고 스승을 믿으며 법을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하여야 흔들림없이 정진할 수 있다.

 4) 다섯가지를 조절함(調五事) 
①조심(調心) 
어지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조복하여 지나치게 방일하게 하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느슨하거나 급하지 않는 네가지 모습을 얻는 것이 마음을 조화롭게 함이다. 마음이 산란하게 움직여 다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들뜬 모습(浮相)이다. 이때는 마음을 편안히 하여 아래쪽을 향하여 대상에 묶어두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억제하여 마음이 안정되게 머물도록 한다. 또한 좌선할 때 마음이 어두워 기억이나 상념하는 바 없이 머리가 자꾸 밑으로 처지는 것을 가라앉은 모습(沈相)이라 한다. 이때는 마땅히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하면 가라앉음을 다스릴 수 있다,  
만일 마음을 모아 생각으로 얻으려 하여 선정에 들어가면 마음과 기가 위로 향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슴이 팽팽하게 켕기는 통증이 생기는 것을 급한 모습(急相)이라고 한다. 이때는 마땅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기가 아래로 흐르는 것을 상상하면 고통이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이 이곳 저곳 유람하여 몸은 힘빠진 뱀같고 입에서는 침이 흐르며 마음은 어두운 것은 느슨한 모습(寬相)이다. 이때는 몸을 추스리고 생각을 거두어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게 해야 한다.

②조신(調身) 
몸을 조화롭게 함이란 몸을 편안하고 고요히 유지하는 것이다. 선정에 들지 않은 때라도 걷거나 머물거나 나아가거나 멈출 때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만일 하는 일이 거칠면 호흡도 따라서 거칠어지고 호흡이 거칠면 마음이 산란하여 단속하기 어려워서 좌선할 때에 이르러서도 편안하지 못하다. 따라서 항상 몸과 마음과 호흡을 조화롭게 해야 한다. 좌선을 하려면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를 하고 옷과 허리띠를 느슨하게 한다.  
참선은 원래 좌선만을 이야기 하지 않으며 일상생활 그 자체가 참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대개 앉아서 하는 좌선에서부터 시작한다. 좌선은 그 자체로 훌륭한 수행방법이면서 동시에 일상생활의 참선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 앉기 힘든 사람은 제외하고 좌법은 참선수행자가 불가불 배워야 할 기본 과정이다.

좌선할 때에는 우선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고 앉는다. 가부좌는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겹친다. 그리고 왼쪽 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포개는 것이다. 이것이 결가부좌이고 또한 반가부좌도 무방하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 무릎위에 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른 손을 발목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치며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둥글게 맞댄다.  
이것이 대삼마야인(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 한다. 그 다음에 허리를 반듯이 수직으로 세운다. 이때에 몸을 전후, 좌우로 약간 움직여서 허리를 자연스럽게 세워 몸이 기울거나, 앞으로 굽거나 뒤로 제쳐지지 않도록 한다. 특히 어깨나 목 등 몸에 힘을 주지말고 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된다. 턱은 당기고 눈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군다. 귀와 어깨가 서로 수직이 되고 코와 배꼽이 서로 수직이 되도록 반듯이 한다. 혀는 입천장에 대고 입을 가볍게 다문다. 혀를 입천장에 대는 것은 침이 입안에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결가부좌나 반가부좌가 익숙할 때까지는 다리가 자주 아프고 저릴 것이다. 그럴 때는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한다. 그러나 바꾸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즉시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먼저 왜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지 알아보라. 육체적 피로 때문인지, 정신적 불안정 때문인지를 몸이 고통스럽게 여기는 부분을 주목해 보라. 정직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는 법을 배워라. 수행정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육체의 문제가 아니다. 다리가 아프거든 스스로에게 "내게는 다리가 없다"고 타일러라. 공부가 순숙해지면 어느덧 몸이 있는 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시선은 여기저기를 두리번 거리면 정신이 산만해져서 좌선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집중이 안될 때에는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벽에다 작은 점이나 원을 표시해 놓고 거기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초심자는 눈을 감는 것이 더 집중이 잘 된다. 그러나 눈을 감고 하면 어느덧 혼침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오후나 새벽 좌선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잠을 청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좌선 중 수면에 시달릴 때는 눈을 크게 뜨도록 하는 것이 좋다. 좌선시 몸이 피로하고 졸음이 심해 정신이 집중되지 않으면 수시 포행을 하는 것이 좋다.  
보통 선원에서는 50분 좌선하고 5분 내지 10분간 선방 내를 포행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포행시간은 좀더 늘여도 좋다. 포행할 때는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의 아래 마디를 누르고 주먹을 쥔 상태) 을 하고 두 손을 자연스럽게 드리우고 서서히 걷는 것이 좋다. 이때에 좌우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포행은 바로 행선(行禪)이다. 앉았을 때와 같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이 돌며 몸에 활기를 준다. 따라서 좌선과 행선을 적절히 섞어서 수행하면 좋다. 한편 혼자서 하는 산책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사유를 깊게 해주며 내면들 들여다 보는 좋은 수행법이되므로 덧붙여 권하고 싶다.

③조식(調息) 
좌선하는 데는 반드시 좌선의 기초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 상기(上氣) 기타 신체상의 장애가 생겨 공부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다. 앞의 요령에 따라 바르게 앚았으면 다음은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알 필요가 있다. 먼저 몸을 3, 4회 전후좌우로 흔들어 자세를 바르게 한다. 처음에 호흡을 한번 크게(깊게) 내쉰다. 다음에 서서히 호흡을 들이쉰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편안히 앉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인도의 요가나 중국의 도교에서는 인위적으로 숨을 길게 또는 짧게 하는 다양한 호흡법들이 있으나 불교의 호흡법은 자연 호흡법이다.  
인위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려고 몸에 힘을 줘가면서 애쓸 필요가 없고, 일부러 숨을 길게 쉬려고 숨을 참거나 멈출 필요가 없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호흡하면 된다.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도 자연스럽게 안정되기 마련이다.안정된 속에서 편안하게 호흡을 하면 숨은 자연히 길어지고 미세해진다. 좌선할 때 뿐만 아니라 언제나 호흡을 의식하면서 호흡이 급한지 안정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라.  
화가 났을 때, 긴장하고 있을 때 호흡은 여지 없이 급해지고 불안정하다. 이때에도 호흡을 길게 심호흡을 몇 번 하면 마음이 안정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호흡과 마음은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참선수행에서 호흡관은 가장 기초적인 행법이다.

④조면(調眠) 
잠자는 시간을 조화롭게 하는 것으로 너무 많이 자서 몸과 마음을 나태하지 않게 하고 너무 적게 자서 피곤하지 않게 하며, 잠은 최소한으로 줄이되 짧은 시간 내에서도 숙면하도록 조절한다. 경전에서는 "초저녁이나 새벽에도 공부를 그만두지 말지니, 수면을 인연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어 얻는 바가 없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논에서는 수행자가 공부해야 할 시간으로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새벽 2시부터 6시까지를 지키도록 하였다.

⑤조식(調食) 
너무 많이 먹으면 기가 급해지고 몸이 팽만해지며 여러 맥이 통하지 않아서 마음을 막히게 하므로 좌선할 때 생각이 안정되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적게 먹으면 몸이 고달프고 마음이 동떨어져서 생각이 굳지 않게 된다. 음식을 최소한으로 줄이되 섭취한 음식이 최대한의 정기를 발휘하도록 조절한다.

 5 ) 다섯가지를 행함(行五法) 
①욕(欲;願) 
세간의 전도망상과 삿된 욕심을 떠나기를 원하고 모든 선정과 지혜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욕이라하고, 원이라하고, 뜻이라 하고 사랑함이라 하며 좋아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큰 의지이고 서원과 즐거움을 성취하려는 마음이지 생각을 일으키고 희망하고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선정의 결과를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면 마음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므로 삼매가 생길 수 없다.

②정진 
항상 방일하지 않고 계를 지키며, 다섯가지 덮개를 버리고 저녁 6~10시 새벽 2~6시까지 오로지 정진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나무에 구멍을 내어 비벼서 불을 일으키는데 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끝까지 그만두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③념(念) 
세간은 깨끗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속이므로 가볍고 천하게 생각하며, 불법의 선정과 지혜를 귀하고 중하게 생각한다.

④정교한 지혜 
세간의 헛된 즐거움과 선정 지혜의 참다운 즐거움 중 어느 것을 얻어야 하는지 헤아려 아는 것이다. 세간의 즐거움이란 낙이 적고 괴로움이 많으며,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고 실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손해이며 가벼운 것이다. 선정과 지혜의 즐거움이란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며, 인연에 의하여 생멸함을 떠난 것이고, 고요하고도 한가롭고 넓다란 것으로서 영원히 나고 죽음을 떠난, 그리고 오래도록 괴로움을 멀리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익이며 무거운 것이다. 이와같이 분별하는 것을 정교한 지혜라고 한다.

⑤일심  
한마음이라는 것은 생각과 지혜를 분명히하여 세간은 근심스러운 것이고 싫어하여야 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보고, 선정지혜의 존귀함을 알아 일심으로 결정하여 지관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금강석과 같아 천마나 외도라도 막거나 무너뜨리지 못하고 가령 헛되이 얻어진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끝내 되돌아서거나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 것을 한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길을 갈 때 우선 반드시 길이 통한 곳과 막힌 곳의 양상을 알고 그런 연후에 한마음으로 결정하고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방편을 잘 알아서 교묘하게 사용하고 그 마땅함을 잃지 않아 속히 선정을 얻는 것을 교묘한 지혜라고 하니, 선정에 이르는 길을 잘 아는 것이 정교한 지혜이고 그길을 가는 것이 일심이다. 따라서 일심에 의해 선정에 이른다.

 4. 참선수행의 방법

참선은 생사의 근원이 무엇이고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불교의 다른 수행법들도 모두 궁극적 목적은 해탈이고 성불이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빠르게 성품을 보게 하는 수행법이 바로 참선이다.  
참선과 유사한 말로 선, 선나, 선정, 삼매, 지.관 등이 있다. 참선이란 이런 수행법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하셨던 초선에서 상수멸에 이르는 선정과 37조도품, 위빠사나와 호흡관에서부터 중관의 반야공관, 유식의 유식관, 화엄의 해인삼매 천태의 일심삼관 등 실로 다양한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참선하면 중국 선종의 수행법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선풍에 따른 간화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화두참구가 참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 자리를 말하고 참구란 생각과 분별을 끊고 직입하는 것을 말한다. 직입하면 말 나오기 이전을 봄이요, 성품을 봄이다. 즉 견성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담박에 깨치는 것이므로 돈오라고 한다.  
이때 직입하게 하는 힘은 의심에 있다. 오직 의심으로 똘똘뭉쳐 모든 것을 잊고 무엇일까를 탐구하다 보면 철벽처럼 어둡고 깜깜하고 아득하던 화두가 툭- 트이는 순간, 화두가 타파되고 모든 낡은 껍질들을 벗게 된다. 나와 우주 만물의 참성품을 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으며 거짓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참은 또 어떻게 그것과 함께 그렇게 오묘하게 있는지를 알게된다. 

관법(觀法) 
현재 조계종단의 선원에서는 관법수행의 단계를 체택하지 않고 곧 바로 화두에 들어간다. 혹 어떤 사람은 화두들기 전에 관법수행을 체택하는 것을 두고 조계종의 전통 선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식관, 부정관, 인연관, 불타관, 자비관, 사념처관 등의 관법은 재가불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수행을 닦아갈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수행법이며 예로부터 참선 중에 나타나는 장애를 극복하는 대치법으로 익혀 오던 방편이다. 
관법수행에는 다섯 문이 있으니,  
첫째는 수식관(數息觀)이요, 둘째는 부정관(不淨觀)이며, 셋째는 자비관(慈悲觀)이요, 넷째는 인연관(因緣觀)이며, 다섯째는 불타관(佛陀觀)이다. 수식. 부정. 인연. 등 이 세문에는 안팎의 경계가 있고 불타관. 자비관은 바깥 경계를 반연한다.  
이 다섯 문은 중생들의 병을 따르는 것이다.  
즉 마음에 번뇌가 많은 사람에게는 수식관을 가르치고, 탐욕심(貪慾心)이 많은 이에게는 부정관을 가르치고, 화(瞋心)를 잘 내는 사람에게는 자비관을 가르치고, 집착심(執着心)이 많은 사람에게는 인연관을 가르치고, 마음이 흐릿한 사람에게는 염불(佛陀觀)을 가르친다." <오문선경요용법>

옛부터 참선수행의 5방편문으로 장애에 따른 처방법으로 즐겨 사용되 오던 관법들이 있다. 이들 오방편 중에서 수식관은 수식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호흡에 대한 관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안반수의경에 의거하여 소개하겠다.  
부정관은 사념처관 중에 몸에 대한 관찰에 포함되는 내용이므로 몸에 대한 관찰 속에서 이야기 될 것이다. 자비관은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자 하는 불교수행자들이 즐겨 익혀야할 수행법이며 가장 쉽게 실천하면서 가장 쉽게 공덕의 결과를 맛볼 수 있는 수행법이 될 것이다. 인연관은 법에 대한 관찰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다만 불타관은 염불수행에서 다루어지므로 생략하였다.

①호흡에 대한 관 
호흡관은 수식관이라하여 참선수행의 가장 기초적인 행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단의 통상적인 방법에서 탈피해서 부처님 당시의 호흡관에 근거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호흡관은 사념처관의 신념처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독립적인 행법으로 아나파나삿티(anapanasati)라 한다.  
아나파나삿티는 번역하면 입출식념이라는 뜻으로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모으는 방법으로 안반수의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입출식념경>을 비롯하여 아함경의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으며 사념처관에 관한 경전인 <대념처경>에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 가장 초기에 번역된 경전 중의 하나인 <안반수의경>에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경에 의해 안반수의는 수식에서부터 상수, 지, 관, 환, 정에 이르는 6사와 4성제로 이어지면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초기불교의 수행법의 총체인 37조도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안반수의는 수식관이라는 협소한 영역에서 벗어나 호흡관을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현실적인 행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앞에서 불교의 호흡법은 자연스러운 호흡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보자들의 경우 평상시에 그렇게 잘 쉬던 숨도 막상 앉아서 관하려고 하면 숨쉬기가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져 자연스러운 호흡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심호흡을 몇 번 한다. 숨 쉬는게 한결 편해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숨이 골라 지면 들숨과 날숨을 따라 관하는데, 이때에도 초보자들은 집중이 잘 안되어 생각이 이리저리 굴러가거나 졸리기 쉽다. 따라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쉬면서 하나, 다시 들어마시고 내쉬면서 둘 하면서 열까지 센다. 수를 세다가 또 집중하지 못하고 놓치고는 딴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면 즉시 알아차리고 하나부터 다시 세어나간다.  
이렇게 열까지 세어지고 집중이 되었다 싶으면 수는 헤아리지 말고 다만 호흡과정만을 관하도록 한다. 들고 나는 숨을 한 지점(주로 코끝)에서 계속 집중하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차가운지, 따뜻한지, 긴지, 짧은지, 급한지, 완만한지, 거친지, 미세한지 등을 관하다보면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되는 느낌이 확 온다. 그러다가 내가 사라지는 느낌, 우주와 하나가 된 느낌, 숨을 쉬는지 안쉬는지 모르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때 숨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숨을 쉬어야지 하고 생각을 붙여 숨을 쉬려고 하지 말고 그냥 관하면 된다. 실제로 호흡이 끊기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지 못할 만큼 미세해지기 때문이다. 또는 코로 숨을 쉰다는 느낌이 안들고 피부로 숨을 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호흡관은 산란심을 잠재우고 고요하고 깊은 삼매로 이끄는 힘이 있다.

우리는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없다. 앞에서 수행은 언제나 깨어있음이라고 했다. 그 출발은 호흡에 깨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을 하다보면 호흡은 내가 아니다.  
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참나는?하는 물음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호흡관은 지와 관은 함께 닦고 가장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모든 수행법의 기초가 되면서 생사해탈의 열쇠를 쥐고 있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뿐아니라 심신이 경쾌해지고 수면이 단축되며 정신 집중력이 강해지고 삼매력을 키우는 터전이 굳어진다. <증일아함경 제17 안반품>에는 나운비구가 호흡관을 통해 삼매에 이르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한 나무 밑에 앉아 몸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잡고, 결가부좌하였다. 다른 생각이 없이 마음을 코 끝에 두고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길면 또한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또한 숨이 짧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것을 알고,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또한 숨이 따뜻하다고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숨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숨이 있으면 있다고 안다. 때로는 숨이 없으면 또한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알았다. 이때에 나운은 이와같이 사유하고 욕심이 곧 해탈을 얻어 다시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평안함을 얻는 초선에서 놀며, 깨닫고 관찰함에 스스로 기뻐하여 일심으로 깨달음이 없고 관찰함이 없는 삼매의 기쁨인 이선에서 놀며, 다시 기쁨조차 없고 오로지 몸의 즐거움을 알고 성현의 가호를 구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삼선에서 놀며 저 고락의 길이 멸하여 다시 금심이 없고 고가 없고 낙이 없고 생각이 청정한 사선에서 놀아 삼매 속에서 마음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증일아함경 제17 안반품>

②몸에 대한 관찰 
몸에 대한 관찰은 먼저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관한다. 뼈대와 살은 지대요, 피와 체액등은 수대요, 온기는 화대요, 호흡 및 기의 흐름은 풍대라 이렇게 사대로 이루져 있다가 죽으면 각기 흩어져 버리는 것이여서, 나라거나 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세속적 욕심과 몸에 대한 집착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과 백골관을 통해 몸의 실상을 알고 집착을 떠나게 된다.(이하 내용은 대념처경을 인용한 것임)

 *부정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이 몸을 '위로는 머리끝에서 아래로는 발바닥까지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물질로 가득 차, 피부 주머니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구별하면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몸에는 머리털, 몸털, 손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늑막, 지라, 허파, 창자, 창자 내용물, 위, 위 내용물, 똥,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관절액, 오줌 등이 있다'고 관하라.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하고,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하며,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한다. 또 몸에서 생겨나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하고, 몸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하며, 몸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몸이다."라고 그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몸에서 몸을 관하면서 주한다.

 *백골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후 하루,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서 부풀고 검푸러지고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法, chamma)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에게 먹혀지고, 매에게 먹혀지고, 독수리에게 먹혀지고, 표범에게 먹혀지고, 늑대에게 먹혀지고, 다른 여러 가지 살아 있는 것들에 의해 먹혀지는 것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마치 공동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피와 살에 묻어 있는 채로 힘줄에 얽히어 해골로 변해 있음을 보고, 이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 이와 같이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고 생각한다.

③일상생활에서 관 
*행동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가면서는 '나는 가고 있다'고 관하고, 서서는 '나는 서 있다'고 관하고, 앉아 있으면서는 '나는 앉아 있다'고 관하고, 누워 있으면서는 '나는 누워 있다'고 관한다. 이와 같이 어떠한 상태로든 그의 몸이 놓여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놓지 말고 잘 관하라.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나 이를 완전히 알고, 앞을 볼 때나 뒤를 볼 때나 이를 완전히 알며, 구부릴 때나 펼 때나 이를 완전히 안다. 옷을 입거나 발우를 들 때도 이를 놓지 말고 완전히 관하여 알고, 먹고 마시고 씹으면서 맛볼 때도 이를 완전히 관찰하여 알며, 대소변을 볼 때도 이를 완전히 관찰하여 안다. 가면서나 서서나 앉아서나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말할 때나 묵묵히 있을 때도 한동작 한동작을 완전히 관찰하라.

*느낌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어떻게 감각에서 감각을 관하면서 주하는가?  
수행자는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정신적 즐거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즐거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며,  
정신적 괴로운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육체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육체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알고,  
정신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끼면서는 '나는 정신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을 느낀다'고 잘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밖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안팎으로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또 감각에서 생겨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고, 감각에서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하며, 감각에서 생했다가 멸해가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그래서 관찰의 정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감각이다."라고 그 자각이 확립된다. 그는 초연하게 주하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감각에서 감각을 관찰하면서 주한다.

*마음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가 어떻게 마음에서 마음을 관하면서 주하는가? 애욕(愛欲)이 있으면 '내 안에 애욕이 있다'고 알고, 애욕이 없으면 '내 안에 애욕이 없다'고 잘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애욕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고, 이미 생겨난 애욕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며, 이미 멸해진 애욕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안다. 
성냄(瞋表)이 있으면 '내 안에 성냄이 있다'고 알고, 성냄이 없으면 '내 안에 성냄이 없다'고 잘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알며, 이미 멸해진 성냄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잘 안다. 
나태와 졸음(昏沈)이 있으면 '내 안에 나태와 졸음이 있다'고 알고, 나태와 졸음이 없으면 '내 안에 나태와 졸음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나태와 졸음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나태와 졸음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나태와 졸음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동요(掉擧)와 걱정(悔)이 있으면 '내 안에 동요와 걱정이 있다'고 알고, 동요와 걱정이 없으면 '내 안에 동요와 걱정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동요와 걱정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동요와 걱정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동요와 걱정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의혹(疑)이 있으면, '내 안에 의혹이 있다'고 알고, 안으로 의혹이 없으면 '내 안에 의혹이 없다'고 안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혹이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고, 이미 생겨난 의혹이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며, 이미 멸해진 의혹이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안다. 
이상과 같이 일상생활에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머무른다. 그리고 순간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 등 여러 가지 심리적 현상들을 관하여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즉,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며 생겨났다가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나라거나 내것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집착으로부터 해탈을 얻게 된다.

④진리에 대한 관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현상을 관찰하라. 
어떻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현상을 관찰하는가? 수행자는 "이것은 고통(苦)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如實)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의 원인(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의 소멸(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이것은 고통을 소멸하는 길(道)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직후 깨달음의 세계를 점검하시기 위해 12연기법(緣起法)을 순과 역으로 관찰하셨다. 그리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그런고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라는 그 유명한 연기법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의미와 방법으로 진리의 세계를 관찰하여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혹 어떤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제 마음이 깨끗하고 묘한 덕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믿고 즐거워하여 닦아 익힌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나>라는 상에 굳게 집착하여 그 습기가 너무 무거움으로써 갖은 의혹의 장애를 일으켜 정을 잊지 못하는 이는, <사람들의 몸이나 마음은 사대와 오읍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로 난 것으로서 거젓이여 진실이 아닌 것이 마치 뜬 물거품과 같아서 그 속이 비었는데, 무엇을 나라고 하고 무엇을 남이라고 하겠는가?라는 공관으로 그 견해를 부수어야 한다.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이와 같이 불법의 이치를 깊이 사유하고 관함으로써 사견과 여러 가지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사법법회에서 '주전자명상'이 있다. 대중들은 주전자를 보고 감사할 점을 찾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하면서 한두가지 적기 시작한다. 그러나 30. 50, 100가지를 넘어가면서 주전자 속에 우주가 담겨있음을 알게 되고, '하물며 이런 조그만 주전자도 이럴 진데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사람이야' 하면서 인간과 자기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된다. 연기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연기의 존재이기에 무아이면서 동시에 우주의 주인인 것이다. 모든 것의 은혜 속에서 살며 자리와 이타가 둘이 아닌 줄 알게 된다. 
진리에 대한 관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깊이 사유함으로써 현실에서 그것을 재발견하는 지혜를 준다.

⑤자비관(慈悲觀)  
사무량관법이 있다. 불도를 구하는 이는 사무량심을 행해야 한다. 그 마음이 무량하기 때문에 그 공덕도 무량한 것이다. 중생들 중에는 무릇 세 가지 부류가 있으니, 첫째는 부모.친척.좋은 벗 등이요, 둘째는 원수.도적.악인들로서 항상 괴롭히고 해치려는 부류이며, 셋째는 중인으로서 친하지도 않고 원수도 아닌 부류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 세부류의 사람들을 모두 인자한 마음으로 보되 친족처럼 대해야 할 것이니 즉 늙인이는 아버지처럼 보고 젊은이는 아들처럼 보아 항상 이런 인자한 마음을 닦아 익혀야 한다.  
사람으로서 원수가 되는 것은 나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니 나쁜 인연이 다하면 도로 친해지는 것으로 친함과 원수는 일정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이 세상의 원수로 후세에는 친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나운 분노는 큰 이익을 잃고 인자한 마음이 없으면 불도를 장애한다. 그러므로 미운 원수까지도 친족처럼 보아야 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원수로 말미암아 나는 불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원수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인내는 어디서 생기겠는가.  
그는 곧 나의 선지식이 되어 나로 하여금 인욕바라밀을 얻게 하는 것이다. 원수에 대해 인자한 마음을 가지게 된 뒤에는 사방중생들을 인자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편안하지 못한 일체의 곤충에 대해서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중생으로서 이 세상의 즐거움과 천상에 나는 즐거움과 성현의 도의 즐거움을 얻는 이를 보면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중생들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보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지혜로써 스스로 제어하여 중생을 반연하더라도 사심(捨心)을 일으키면 이것이 사무량심으로서 그 자비가 시방 중생들에게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무량이라 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닦아 익혀 혹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내 몸에 대한 뱀이나 불이라 생각하고 빨리 제거해야 한다. 마음이 흩어져 다섯 욕심에 빠지거나 다섯 덮개에 덮이거든 지혜와 정진의 힘으로 껴잡아 돌아오게 하고 인자한 마음을 닦아 익혀 항상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의 즐거움을 얻게 하되 쉬지 않고 익히면 다섯 욕심을 떠나고 다섯 덮개를 버리게 될 것이다. <오문선경용용법>

방법1. 
조용히 좌선자세로 앉아 먼저 가장 친한 사람을 떠 올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득 담아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 마음을 보낸다. 이때 배우자와 같이 애착이 강한 대상은 친한 사람들 중 제일 뒤로 돌리도록 한다. 참된 정신적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아야 한다. 다음에는 아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사랑하는 마음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적대적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보낸다.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마음에 저항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생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원한이라는 게 살아가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수행하는데 곧 장애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잘 느껴보라. 그러면 미움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이해와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 자주 자비관을 하다보면 자비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고 사람은 물론 우주 전제의 모든 존재에 대해 감사와 사랑이 느껴질 것이다.

방법2. 
먼저 마음 속에 자비의 마음, 행복한 마음을 갖는다. 그 자비의 기운으로 자신을 감싸고 점점 넓혀 방안, 집안, 우리동네, 우리나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지구, 우주로 점점 넓혀 가면서 분명하게 영상화시키고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의 기운을 전체에 방사한다. "그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 행복하게 살기를!" 이런 평화로운 마음은 수행의 진전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언제나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수행자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경지이기도 하다.

 화두참구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자리 개념과 관념이 붙지 않은 진리의 당체를 찾아가는 관문으로써 불입문자. 언어도단의 선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한 언어아닌 언어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수행자의 面前에 들이대어 바로 볼 것을 촉구하는 이 수행의 과제 '佛祖의 言句'를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이라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청의 공문서란 의미를 갖는 말인데, 범치 못할 확실한 법칙이라는 뜻이 있다.  
그 법칙을 바로 아는데서 살아있는 진리가 들어나는 것이다. 화두는 그 본질이 불조(佛祖)의 깨달음 자체이므로 이러한 성격의 언구는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 어림될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신의 眞面目을 밝혀 낼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불조관문(佛祖關門)이라고도 한다.

 1) 화두란 무엇인가 
화두는 대개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나 언동으로 구성되는데, 다음에 몇 개의 공안을 들어본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心磨)로 불리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無]"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조사공안이 1천7백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써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즉,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이러한 과정을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치기'라고 한다. 
공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천목중봉스님(1263~1323, 남송말 원초 스님. 임제종 양기파.)의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게 공안의 의미와 기능을 밝히고 있다. 
공안이라고 한 곳운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이란 훌륭한 도를 깨달아 세상 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이란 성현들께서 그 도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공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를 공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에 계합하여, 생사의 굴레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시방삼세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짂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 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야지만 알 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공(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안(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空)해지면 불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공안인란 바로 번뇌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런가 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 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 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습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 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2) 話頭참구의 세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본성은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써 있으며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나위거나 때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록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에 빠져 세간에서 낙인찍히는 악행을 했거나 다시 지옥에까지 떨어졌더라도 자기본성은 일찍이 때묻지 아니하고, 죄짓지 아니하고 그늘지지 않은 원래로 원만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진리의 주체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 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의 기본표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진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원과 정진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선자에 있어 이기적 타산은 금물이다.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불조가 제시한 화두는 불조가 어려운 수수깨끼 처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 앞에 드러내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길래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제불보살의 영원한 생명이 내 자신에게 있어 조금도 덜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므며, 생생하게 지금 내 생명에 뛰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여 보는 것, 듣는 것, 맛보고, 냄새맛고, 느끼는 것에 탐착하고 좋고 나쁜 것에 휘둘려 살고 있다. 일찍이 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전생도 이와 같았고 그 전생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 생도 또 이와같다.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 무지와 고뇌의 과거생, 무능과 비소의 과거 무수생을 종말짓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왜?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덥는다. 없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조는 화두로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것이다.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나의 물건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 명백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큰 의정이 솟아나는 것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 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3) 좋은 화두가 있는가?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을 뿐 화두에는 없다. 다만 더 잘 들리는 것이 있을 수는 있다. 수 억겁동안 살아온 업이 달라 수행법 중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고 잘 안되는 것이 있다. 화두 중에서도 의심이 확 들어 화두참구에 빠지게 하는 것이 있고 좀처럼 의심이 생기지도 앉고 잡히지도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 스승은 화두를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주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심을 돈발시켜 주는 화두를 줄 것이다.
그러나 혹 스승에게 받은 화두라도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편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의정이 생기면 활구요 그렇지 않으면 사구이다.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자심의 솟구치는 의정에 따라 활구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

4) 화두 참구하는 모양
화두란 격외도리로써 불조의 지혜안목을 연 사람만이 알아듣는다. 그 밖의 범부들은 알아 들을 리가 없다. 오직 절벽에 맞부딪힌 것처럼 꽉 막힐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는 의정(疑情)의 벽에 맞서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가 공안에 대한 대응자세이며 그 표정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옛 조사들은 말하기를 공안을 가져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은산철벽(銀山鐵壁)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는 접근하면 얼굴이 타버리는 큰 불무더기(大火聚)라고도 하고 또한 금강으로 된 밤송이가 목구멍에 걸린 것과 같다 했다.
이 때 의심하는 모양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수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히 잃어버렸다. 그 사람은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 둔 곳을 만져보니 보배가 간데 없으므로 의심이 나서 보배를 어디에 두었는가? 하고 찾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또 어두운데서 이상한 물건을 주었는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으므로 그 사람이 의심이 바싹 난 것과 같이 화두참구하는 모양도 이와 같다.
혹 화두를 들 때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우물에 들어가는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끓고, 어떤 때에는 찬 어름과 같이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단배와 같아서 술술 잘 된다.
그러나 공부가 잘되든지 못되든지 좋고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화두만 참구한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하고 말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지니 이는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혼이 흩어지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오직, 왜?라는 의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일심으로 해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나를 함께 잊어 산하대지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을 타파할 것이다.
또 망상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어떻게 제거할까? 망상이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가만히 두고 망상을 없애려 하지 말라. 망상을 없애려고 하면 망상이 더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소가 달아날 때 소 고삐를 단단히 잡아당기면 소가 스스로 사람을 쫓아오는 것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지 아니 일어나든지 상관 말고 화두만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진다. 다만 화두를 들어도 망상을 걷잡지 못하겠거든 화두를 즉시 놓아 버리고, 마음도 쉬어 전과 같이 한 뒤에 화두를 들면 새롭게 다시 깨끗해진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때에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항상 편안히 하고, 화두를 뚜렷이 의심하라. 화두를 너무 급하게 들면 심장이 움직여 가슴도 답답하며, 머리도 아프고 코에서 피도 나는데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하게 한 탓이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이니 부디 화두를 너무 극도로 하지 말고 방심으로도 하지 말라. 거문고 줄은 늦추어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너무 팽팽하여도 소리가 나지 않나니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첩첩 산중에 들어가다가 홀연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물러나거나 나아갈 곳이 없는지라 이런 때를 당하여 용단력을 다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꽃이 불긋불긋하고 버들이 푸릇푸릇한 곳에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공부는 다 마음으로 헤아려 궁구하거니와 참선공부는 단지 알지 못하는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헤아려 알고자 하면 만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화두를 참구할 적에 무슨 재미를 찾지 말고, 모기가 쇠로 만든 소위에 앉아 부리를 내리지 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 번 뚫고 들어가면 몸조차 쑥들어가리라.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봄이 돌아오면 꽃 피고 잎 피듯이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이같이 되는 것이다.

5. 참선수행의 공덕
일반적으로 참선수행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 우수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사선은 점차로 닦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깨닫는 돈오의 길을 제시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참 삶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에 대해 홍인(弘忍)조사가 말하기를
『본래의 참마음을 지키는 것(守本眞心)이 일체 번뇌가 끊긴 대해탈에 이르는 근본이며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고 보살과 부처를 이루는 길이다.』하였다. 참마음 닦는 선수행 속에 일체 공덕이 원만구족하다는 말씀이다. 성불한다는 것은 자성불의 완전한 회복이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모든 경전이 필경 본성을 밝히는 가르침이니 본성을 보면 일체 경전은 빈 껍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는 "원만 청정한 자성(自性)이 본사(本師)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고 했다.
한편,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관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하시고 끝에 그 공덕으로 열반을 증득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동안 소승의 관법이라 하여 외면했던 관법이지만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신 수행법이고, 조사선과 상보적인 효과가 있으므로 참선수행법으로 새롭게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수행자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7년 동안 내지는 7일 동안만이라도 이와 같이 닦는 자는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나 한가지를 얻게 된다. 즉 현상(現法)에서 구경의 지혜, 또는 나머지 생애에서 아나함(不還:윤회에서 벗어남)의 경지가 기약된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은 중생의 정화를 위하고, 슬픔을 건너기 위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위하고, 진리의 길을 위하고, 열반의 증득을 위한 단 하나의 길, 즉 사념처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에 설해진 것이다. <대념처경>
참선수행이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그 뿐만 아니라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공덕총림이라고도 하니 무루복과 유류복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효용면에서 몇 가지 부언해 보고자 한다.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효용(效用)
선의 효용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표를 향하여 닦아가는 과정에도 많은 공덕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미혹중생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무명(無明)과 번뇌가 점차 소멸되므로써 번뇌로 인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진리의 공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단번에 흘연히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수행자의 성실성과 수행자의 기질과 수행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오늘날 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선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용에 목적을 두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활주변에 나타나는 선의 효용이라 할 현상들은 선수행에서 부차적으로 나타나는 지엽적 현상이므로 그것이 선의 긍극적 목표일 수가 없다. 수행과정상의 효용을 목표로 삼아서는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고 선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
여기서 수행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효용을 몇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열거해 보기로 한다.

1)생활상의 효용
①마음이 안정되고 두뇌가 맑아진다. 두뇌가 맑아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②마음이 맑아지고 안정되며 정신집중이 잘된다. 오래 독서해도 피로하지 않다. 추리력 기억력 이해력이 증진된다. 피로회복이 빠르다.
③성격개조 능력개발 인간관계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
④수면 시간이 단축되고 심신이 경쾌하다.

2)건강상의 효용
①관념적인 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마음을 바꿈으로써 병을 고치는 원리다. 병을 고착시키고 양성시키는 관념적인 요인과 병의 뿌리인 정신상의 응결상태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②참선하면 신체내의 적·백혈구가 증가되고 혈색소가 증가하였다는 연구결과 보고가 있다. 따라서 생활의 활력이 현저히 증대된다.
③참선수행이 다음의 병에 크게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경쇠약· 부인과병· 심장병· 위장병· 신장병· 폐결핵· 천식· 히스테리· 공포증· 축농증· 특히 만성적 질환에 유효하다. 이것은 생활자체가 갖는 생명력과 자연 치유력을 활발하게 하고 강화시킨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거나 치우쳐 있는 상태를 선수행으로 인하여 제거되고 바르게 조절되기 때문이다.
④산소 탄산가스 산도(酸度) 포도당 등 혈액의 함유물은 호흡에 많이 좌우된다. 따라서 좌선을 하여 호흡이 깊어지면 뇌수활동을 정상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⑤좌선은 정신상태를 전반적으로 급속히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뇌파(腦波)측정 결과 나타났다.
⑥종래 동양에서는 기(氣)를 중요시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기르라 하였다. 그것은 천지에 가득 찬 지극히 크고 강한 정신적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길러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원만하다고 보았다. 이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또한 병이 난다. 이런데서 병은 기의 부조화라고 보았다. 병에는 좌정을 하여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기를 기르기를 권하였다. 이것이 양생법의 하나이다. 좌선은 이러한 무심정좌보다 사뭇 뛰어난 양생적 효과를 나타낸다.

3)성격상의 효용
①자기중심에서 폭넓은 협동적 인간으로 확대된다. 이웃과 사회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성이 생겨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 개선된다.
②들뜨고 조급한 현대인의 심리에 무심(無心)의 공간을 열어준다. 거기서 가슴이 열리고 참자기와 만나므로써 본심에 돌아와 깊은 안정을 얻게 된다.
③자칫 화를 내어 생생한 자신을 잃기 쉽다. 선은 탐, 진, 치 삼독심을 깨고 생생하고 진실한 자신에 돌아가게 한다.
④혼란이나 충격에 동요됨이 없는 부동심이 함양된다.

4)정신상 효용
①종교를 향하는 마음상태를 살펴보면 스스로가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거기서 불안을 보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한다. 선은 불안을 해소하고 공허를 메우며 궁극의 의지처를 얻게 하고 근본적 안심을 얻게 한다.
②선은 생사에서 살되 생사에서 초월한 자기를 발견케 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
③선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준다.
④선은 인간에게 최고의 권위를 실현시켜 준다. 인간이 갖는 지혜와 지극히 높은 덕성과 능력을 인정한다. 인간의 신성 존엄 내지 중생의 절대적 주권을 열어준다.
⑤선수행을 하면 마음이 맑아져 번뇌에서 해탈하여 세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열린다.

선(禪)의 세계

1. 선의 어원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유일한 사유법인 `요가(yoga)'에서 발전한 것으로 부처님이 불교를 개창한 이래 불교 수행자들은 선을 통해 해탈의 길을 걸어왔다. 선이 인도에서만 발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성본스님은 그의 저서 〈선사상서〉에서 몬순의 계절풍 영향을 받은 우기지역에 자리한 인도의 지리적 특성에서 찾고 있다. 즉 4월부터 3~4개월간 많은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에 유행을 금지하고 한 곳에 안거(安居)하며 수행토록 했는데 불교에서는 이 기간을 하안거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선은 굳게 뿌리를 내리며 발전을 거듭해왔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와 팔리어 쥬안(jhan)의 음역이다. `디야나'는 중성명사형인데 이 말의 동사 어근인 `dhyai'의 의미는 `심사(沈思)하다' `숙고(熟考)하다'라는 말이다. 중국에 들어와 고요한 사유(靜慮), 종교적 명상(定), 직관(思惟修)등으로 풀이됐으며 한역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의 정(定)은 원래 사마디(三昧 samadhi)로서 `집중하다'를 뜻하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며 하나의 대상에 주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등지(等持)라고도 의역한다.
부처님의 성도는 바로 선정에 의해서 관찰된 법의 깨달음으로 성취됐다고 말해진다. 〈불교대사전〉(홍법원간)의 풀이에 의하면 선은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혼란해짐을 막고 지혜를 몸에 배게 해서 진실의 이치로 나아가도록 하는 수행법이다.

2. 선과 경전
"초기 선종은 경전도 중시"
교외별전이라고는 하지만 초기의 선종이 경전을 버리지 않고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전에 의하여 도의 대본(大本)을 안다"는 말에서 압축된다.
무엇보다 대승불교의 초기 선종에서 《능가경》과 《금강경》은 주요 경전으로 분류된다. 초기 선종을 '능가종'으로 부르는 경향에서도 알 수 있다. 도선은 《속고승전》 '법충전'에서 능가를 남북에 전한 것과 이것을 계승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달마대사가 《능가경》을 혜가에게 전하면서 "내가 이 나라를 보건대 다만 이 경이 있을 뿐 너는 따라 행해서 스스로 제도함을 얻으라"고 했고 또한 혜가의 법을 받아 이 경전을 전지(傳持)한 사람들의 계보를 밝히고 있다. 《금강경》의 전지설도 전해진다.
달마에서 혜능에 이르는 육대의 조사들이 대대로 《금강반야경》을 이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설의 자료로서는 《하택신회선사어록》이 최초로 꼽혀진다. 신회는 남종선 입장으로 대승의 차원보다 높은 '최상승'이란 말을 주장했고 아울러 《육조단경》과 함께 《금강경》을 중국선종의 소의경전으로 정착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선종의 전통적 영향을 받은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인 조계종도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음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이밖에도 선사상과 관련된 경전으로는 《유마경》, 제법실상의 《법화경》, 해인삼매의 《화엄경》, 불성사상의 《열반경》 등이 있다. 특히 《유마경》의 경우 '직심이 바로 보살의 도량[直心是道場]'이라고 설한 <보살품>은 선종의 기본적인 입장의 근거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유마경》에서의 주장은 훗날 중국 선종사에 있어서 조사선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이법문으로 유명한 유마거사가 중국 선종에서 항상 산성(散聖)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나 유마의 침묵이 불립문자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인 좋은 예다.

3. 선의 기원
선은 붓다 석가모니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한송이의 꽃과 미소에 그 원초적 기원을 두고 있다. 남송시대의 무문혜개선사가 편찬한 "무문관" 제6칙 "세존염화"라는 공안은 선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한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그 영문을 몰랐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진리에 관한 바른 안목과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한송이의 연꽃을 들어 보인 붓다와 이를 바라보고 홀로 깨달음의 미소를 지은 가섭의 이심전심에서 선불교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붓다는 언어의 설법보다는 한송이의 연꽃을 말없이 들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신을 표현했고 가섭은 자신이 직관한 붓다의 지혜를 미소로써 표현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이야기에는 불교의 창시자이며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붓다 석가모니와 그의 후계자인 가섭의 온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인간성의 가장 깊은 영역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기원을 말해주는 이 평범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모든 불교수행자들이 추구해마지 않는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과 같은 불교의 궁극적인 깨달음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설한다.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붓다가 가섭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한 불교의 진수는 훗날 인간에 관한 불교의 통찰을 총괄하면서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인 선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선종은 경전의 주석적 연구에 치중하는 교종과는 달리 경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오직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면서 선종의 독자적인 조직과 수도규칙을 확립하고 토착 중국불교의 최대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4. 벽관(壁觀)
고정관념 넘어선 '발상의 대전환'
선을 이해하는데 가장 필요한 용어의 이해가 벽관이다. 벽관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 선사상의 요체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송대의 종감(宗鑑)이 저술한 《석문정통(釋門正統)》에 의하면 벽관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이와같이 마음을 안정(如是安心)함이란 벽관을 말한다.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벽'이라 한다. 마치 가옥 외벽이 외부의 풍진을 방지하는 것과 같이 객진위망을 근접시키지 않는 마음의 긴장, 그것이 벽관이다."
여기에서 객진이란 밖에서 오는 오염이다. 위망이란 작위적인 것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덮은 먼지와 같은게 객진위망이다. 벽관은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한다면 객진위망이 달라붙지 않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 벽관을 해석할 경우 마음의 긴장상태는 없을 것이다. 즉 벽관은 '벽을 본다'가 아니다. 요컨대 '벽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벽이 되어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공(空)을 관(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공을 지켜보는 것이다. 때문에 벽관엔 시종일관 긴장감이 팽팽하다. 긴장감이 해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벽과 내가 하나가 되고 또한 그 단계를 뛰어넘어 공을 제대로 파악, '깨침'이 있을 때 가능하다. '벽이 되어 보는 것'은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는 일이며 발상의 전환이다. '바람도 깃발도 아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든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다리가 흐르는 것'등의 후대 선사들의 말은 벽관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다달았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중국선의 초조 달마대사는 벽관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북위의 한 동굴 속에서 혼자 좌선삼매에 들었는데 흔히 이를 '면벽정진'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면벽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다. 달마의 면벽은 벽과 하나되어 자기와 세계를 관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범성일체(凡聖一體)의 진실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벽관은 '회광반조'(廻光反照)의 뜻을 품고 있다. 석양이든 거울이든 모든 것을 반조하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벽관은 지니고 있다. 선의 출발은 이러한 벽관에 기인하며 따라서 더욱 큰 매력을 지니고 있다.

5. 안심법문
'안심법문'은 선가(禪家)의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안심(安心)'이란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을 필요가 없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기존 '깨달음'의 경지를 한차원 높여 설명하는 선적 표현이다. 이와 관련된 역대 선사들의 안심문답은 곳곳의 자료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시초는 역시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다.
달마대사가 9년의 면벽에 들어있던 어느날 신광(神光) 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제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조사께서는 부디 불안한 제 마음을 풀어 주십시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마음의 평화를 주리라.”
달마의 이 같은 응대에 신광은 다시 말했다.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이미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
신광은 이말에 크게 깨우쳤다. 그가 훗날 달마의 법을 이은 중국선종의 2조 혜가(慧可)대사다. '안심법문'은 달마 혜가를 이어 면면히 계승돼 전해진다. 혜가가 법통을 계승한 뒤의 일이다. 한신도가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해달라는 당치않은 요구를 해왔다. 혜가는 참회할 죄를 어디 한번 내놓아보라고 다그쳤다. 한참을 생각한 신도가 “나는 오랫동안 죄를 찾아왔으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혜가가 말했다.
“내가 그대의 죄를 사(赦)했다.”
이 신도가 그후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그가 3조 승찬(僧燦)이 된다. 승찬은 법통을 받은 후 스승을 꼭 닮은 조사가 되었다. 어느날 사미승이 찾아와 예를 올리며 간청했다.
“큰 스님. 청컨대 자비를 내리시어 해탈법문으로 이끌어주십시오.”
“누가 자네를 묶어 놓았나?”
“저를 묶어 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전히 해탈을 구하려 하는가?”
이 말에 사미승은 큰 깨침을 경험한다. 그가 훗날의 4조 도신(道信)이다.
이렇듯 안심법문은 역대조사들이 후학을 제접하는 본류로 자리해 내려오고 있다. 반규(盤珪)는 선천적으로 성질이 급해 수행에 엄청난 장애를 입고 있다는 한 제자의 하소연을 듣고 '급한 성질을 보여달라'며 오히려 태어난 마음 그대로 사는 것이 좋다고 충고하고 있다.〈반규어록〉

6. 이입사행
입도의 법문은 여러 가지다. 그렇지만 달마가 설한 '이입사행론'이 선학 발전의 밑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선으로 가는 두 가지의 길과 네가지의 실천'에 관한 달마의 설법은 이렇다.
“도에 이르는 길은 많으나 근본을 들어 말하자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진리의 깨달음에 의한 입문, 즉 이입(理入)이며 다른 하나는 실천에 의한 입문, 즉 행입(行入)이다.”
'이입'이란 경전의 연구를 통한 근본교리의 이해, 즉 깊이 뿌리박은 신앙에 의해 일체의 유정물(有情物)이 하나의 참된 본질인 진성(眞性)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진성이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외적 대상이나 망상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전심으로 벽관하면 아타(我他)의 구분이 없고 성(聖)과 범(凡)이 하나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이 믿음을 굳게 지킨다면 다시는 언구(言句)와 형상에 이끌려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깨달음의 진리와 하나가 돼 적연무위(寂然無爲)를 누리게 된다. 이를 진리의 깨달음에 의한 입문(理入)이라고 한다.
실천에 의한 입문(行入)에는 네가지 규범이 있다. 여기에는 다른 모든 규범들이 귀속될 수 있다. 그 네가지 규범이란 무엇인가.
첫째 증오를 갚는 규범, 보원행(報怨行)이다. 무엇이 증오를 갚는 규범인가. 사람안의 마음이 각성되면 누구나 자발적으로 이성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나아가 타인의 증오를 최대한 이용해 역으로 구도 정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보원행이다.
둘째는 삶의 가변적인 조건과 환경에 적응하는 규범, 수연행(隨緣行)이다. 모든 중생이 업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한다. 무엇을 얻었다고 의기양양해 할 이유가 없다. 마음 자체는 늘고 줄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항상 도와 은밀한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셋째는 집착을 버리는 규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사람들은 평생 미혹의 상태에 빠져있다. 따라서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집착이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진리를 이해하며 그들의 이성은 세속의 길로부터 회귀하기를 권한다.
넷째는 법에 맞추어 행동하는 규범, 칭법행(稱法行)이다. 지혜로운 이는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自利) 동시에 남에게 봉사한다.(利他) 번뇌의 오염을 떨치기 위해 육바라밀을 수행해 완덕을 갖추지만 그 또한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규범, 이것이 칭법행이다.

7. 미(迷)와 오(悟)
깨달음과 미혹이 둘이 아닌 이치
오(悟)는 언제나 미(迷)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미가 곧 오가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선불교는 그래서 마력을 갖는다. 미(迷)가 미(迷)가 되는 까닭은 오(悟)라고 하는 것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미가 한번 오로 전환하게 되면 이제까지의 미는 곧 바로 오가 된다. 무시겁래(無始劫來)의 암굴이라 하더라도 오의 햇살이 한 번 비추어 들어가게 되면 그 암성(暗性)은 그 자리에서 명성(明性)이 되는 것이다. 암이 나가고 난 뒤에 명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암 그 자체가 명이 된다는 논리다. 즉 미가 오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대로 하자면 '부처님이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사이에는 일호의 간격도 없다. 다만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미가 오가 되고 암이 명이 되며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전환의 기(機)만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환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홀연'이며 '돈(頓)'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은 전기(轉機) 그 자체를 의미한다.
또한 그 성적(成積)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주의할 것은 그러한 구별을 굳이 하게 될 경우 깨달음은 이미 그 자리에서 달아난다는 점이다. 말로 놀아나고 말로 구별하며 실해(實解)를 그 자체로 본다면 그것은 미(迷)다.
또 이것을 두고 이(理)에는 따르지(順) 않으면서 사(事)에는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 역시 오(悟) 자체 위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마조도일선사의 제자 대주혜해는 "다만 체관(諦觀)만 할지어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오(悟)다. 체관은 직각(直覺)의 뜻으로 만법을 만법으로 보는 것 이외 다름이 아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나누게 되면 오는 그만 없어진다. '순사(順事)는 있으나 순리(順理)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혜해선사는 오(悟)는 혜능이 말하는 견성을 가리킨다고 적시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의미에서 혜능이 깨달은 자와 미혹한 자 사이에, 보리(bodhi)와 번뇌(klesa)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으며, 자성은 '도'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주장한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만하다. 이를 종합해 풀이하면 견성은 돈견(頓見)으로서 가능하며 돈견이 아니면 아니된다. 혜능 이후의 계통은 다 이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8. 견성
형언할 수 없는 최상의 자유
견성이 없으면 선은 사선(死禪)에 불과하다. 불입문자와 교외별전이 방편으로 활용되는 이유는 절대 이뤄야 할 견성에 이르도록 하려 함이기 때문이다. 《육조단경》 '돈점품'에 따르면 견성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견성한 사람은 세워야 할지 세우지 않아야 할지를 알맞게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왕래에 자유로워 지체되거나 구애됨이 없기 때문이다. 견성인은 경우에 따라서 언제고 응하여 활동하며, 그에게 향한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여 대답한다. 한순간도 자성을 여의치 아니하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 이렇게 그는 최상의 자유라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여 지속적 희열인 '유희삼매'(遊戱三昧)를 누린다. 이것이 바로 견성의 의미이다."
견성이란 말은 혜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과연 달마가 중국에 와 '이심전심 견성성불'이란 말을 했는지 역사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혜능 이전엔 '관조'(觀照) 또는 '적조'(寂照)로서 깨달음의 '지'(知)를 보편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혜능이 '조' 대신에 견(見)을 그려 넣어 '견성'이라고 한 것이다. 관조와 적조가 편견에 빠지기 쉬웠던 데 비해 견성은 혜능 당대에 성불로까지 파악됐던 것은 흥미롭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회시대에 와서 새로이 도출된 견성의 사상이다.
신회는 견성을 단순히 혜능의 설이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육조대사의 통설이라고 주장했다. 도원이 《육조단경》에 견성의 이자(二字)가 있는 까닭으로 이 책을 위서라 하고 육조의 진설이 아니라고 했다는 점에서 견성은 신회의 고유한 사고였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신회에 의하면 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선사상은 무념(無念)과 견성의 두가지 기둥으로 이룩된다.
남종(南宗)을 특색짓는 여래선, 좌선, 견성등의 사상이 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좌선을 정의하고 있는 신회의 다음 말은 주목된다. "지금 좌라고 함은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선이라 함은 본래의 자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몸을 앉히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선정에 들어가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회는 선이란 본래의 자성을 보는 것, 즉 견성이라고 했다. 견성이란 자성이 자성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이단의 의식을 초월해서 그 스스로를 본다는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다.

9. 공안
깨달음으로 가는 완벽한 의문구조
공안이란 무심(無心)과 견성(見性)을 목표로 삼는 참선수행의 대명제이다. 한국불교의 참선수행도 모두 공안의 참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정도로 공안은 선의 핵심이다. 선의 수행과 깨달음으로 이끄는 공안은 원래 관청의 '공문서' 〔公府案牘〕라는 용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정부가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선종에 차용돼 절대적인 규범성과 판단의 준칙이 되는 참선수행의 명제로 기능했다. 구체적으로는 조사의 말 어구 문답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안은 옛선사들의 언행과 깨달음의 해결을 필요로 하는 완벽한 의문구조이다.
선사들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와 행동을 남기고 선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의 인생과 깨달음은 후학 및 제자들에 의해 점검되어지고 전해졌다. 특히 이 속에서 각 개인의 통찰이 투영되고 의문이 더해지면서 공안은 하나의 의문구조로 정착하게 됐다. 공안에 대해 〈벽암록〉의 서문을 쓴 삼교노인(三敎老人)은 이렇게 적고 있다.
"조사 스님들이 가르쳐 보이신 바를 공안이라고 한다.(祖敎之書 爲之公案)"
즉 선가에서는 이와 같은 공안을 참선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생각하는 대상 또는 단서로 삼도록 했다. 특히 임제선에서는 참선수행인에게 진리를 참구하는 테마로 전수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조동종의 경우 산천초목을 비롯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에 낙엽이 지는 등 여러 가지의 자연현상도 수행자에게 불교의 진리를 가르쳐 보이는 공안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공안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흔히 1,700가지라고 하는데 이는 〈전등록〉에 등장하는 1,701인의 선사들이 보여준 기연(機緣)과 언행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나의 공안으로 좌선에 빠질 때 일반적으로 화두(話頭)를 든다고 한다. 사전에 의해도 공안은 화두 또는 고칙(古則)과 같은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공안과 화두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듯 보이지만 엄밀하게는 다른 용법으로 쓰인다는 견해도 있다.
공안이 선사와 참선자간의 선문답이라면 화두는 선사의 답변이라는 것이다. 화두의 참구를 중시하는 선을 간화선이라고 한다. 화두의 참구를 중시한 송대의 대혜종고는 지나치게 사변적이며 어록을 주석하는 학문으로 떨어진 송대 선종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해 굉지정각의 묵조선을 극력 비판하면서 화두의 참구를 중시하는 간화선을 성립시켰다.

10. 천상천하유아독존
"보살이 탄생하자 사람의 부축없이 곧 사방으로 거닐며 각 방면으로 7보를 걸었고 걸음마다 발을 들면 큰 연꽃이 솟아났었다. 7보씩 걷고 나서 사방을 둘러보고 눈을 깜짝이지도 않으며 입에서 절로 말이 나왔다. 먼저 동쪽을 바라보며 갓난애기의 말답지 않게 스스로 글귀에 맞게 바른 말로 게송을 읊으셨다.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구나
나는 오늘부터
목숨 받는 일이 끝났네."

《불본행집경》제8권 '수하탄생품'에 묘사된 말이다. 부처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 이땅에 오시게 되는데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 마자 '이 세간 가운데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는 말로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웠다고 한다.
선불교에서 받아들이는 이 말의 해석은 '인간의 본성은 부처이며, 본래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무한한 존엄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중생과 달리 불성(佛性)을 깨쳐 각자(覺者)가 됨으로써 윤회의 굴레를 벗고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몸을 받기란 매우 어렵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높아진다.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개체(個體)란, 재산 지위 능력이 있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음습한 곳이나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총 망라한다. 어떠한 사람도 사람인 이상 절대적 존엄성이 있다. 부처님 생명은 살아있다. 보잘 것 없는 것, 이름 없는 것도 빠짐없이 각자의 목숨을 풍족하게 개발해 나가는 대자연의 섭리,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다.
각자가 각각 가지고 있는 껍질을 벗고 본래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일이 바로 불성의 계발인 것이다. 때문에 진면목을 참구해 낸 선사들은 산은 산, 물은 물, 나무는 나무로 바라본다. '일상생활에 도가 있다( 平常心是道)'는 뜻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간 각자의 개인의 존재는 개인만의 존재가 아니다.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이루어 온 연기의 법칙, 인과의 도리에 따라 오늘날의 이 시점에서 그의 삶을 살고 있다. "이 하루의 목숨은 존중해야 할 신명이다. 존경해야 할 송장이다. 이와같은 목숨이니 스스로도 사랑하고 스스로도 존경해야 한다." 옛 역대 조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한결같이 강조했던 인간존엄의 가르침이다.

11. 돈오(頓悟)
돈(頓)은 시간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연속성을 절대로 부정하는 비연속성의 뜻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또 그대로 오(悟)를 서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일반의 지식과는 달리 추론적으로 꾸며 맞출 수 있는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성의 성질을 보여준다. 돈오가 무엇인가는 지덕법사의 물음에 답한 신회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지덕법사가 물었다.
"선사는 대중에게 돈오하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소승의 교설부터 점수(漸修)하지 않습니까. 9층 건물을 오르는데 계단에 의하지 않고 오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회가 답한다. "자네가 오르려고 하는 것은 9층 건물이 아니고 다분히 흙을 쌓은 여우의 무덤이 아니냐. 정말로 9층 건물이라면 틀림없이 돈오다. 내 생각으로는 돈의 가운데에 점을 세우기 때문에 9층 건물을 오르는데 계단이 필요하게 된다. 결코 점의 가운데에 점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지혜로부터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돈오다. 대체로 단계에 의할 것은 없다.
자연이야말로 돈오다. 각자의 마음이 본래 공적인 것이 돈오다. 마음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마음 그 자체가 도인 것이 돈오다. 마음이 고정할 수 없는 것이 돈오다. 본래의 마음에 눈뜰 뿐으로 아무 것도 더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모든 존재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 돈오다. 공(空)이라고 말해서 공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불공(不空)을 좋다고 하지 않는 것이 돈오다. 나라고 말해서 나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아(無我)를 좋다고 하지 않고, 생사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돈오다."
9층은 밖으로부터 보아서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구조가 인정되는 한 그것은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가야만 한다. 그것은 지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속성 차제성(次第性) 누적성을 보지 않는 것이 돈오의 성격이기 때문에 9층의 누대는 말하자면 오(悟)를 뒤쫓아가서 지식이 그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서 표치(標幟)를 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단계를 보는 것이 지식이니까 지식의 면전에는 언제나 9층루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기의 발자취로서 자기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9층루란 있지 않다. 따라서 한계단 한계단 점차적으로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올라간다고 할 때 오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는 이미 오가 아니게 된 것이다. 신회는 이러한 근거로 혜능과 신수의 차이를 설명한다. 돈오설이 달마로부터 혜능까지 전수돼온 전통사상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혜능과 신수의 대립은 신회에 의해 극대화됐고 마침내 북종과 남종의 분립이 이루어졌다.

12. 여여(如如)
몇 년전 대중가요로 히트한 '타타타'가 바로 이 '여여'란 뜻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여여'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의 의역으로 있는 그대로 진실의 모습을 의미한다.
<법화경> '수량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 若退若出 亦無在世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 三界見於三界
내용을 압축해 설명하면 "여실히 삼계의 상을 지견 또는 관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여실지견(如實之見)이 있는 곳에 해탈이 있다'고 불교에선 가르친다. 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여실지견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법은 유(有)가 아니면서 유이고, 유이면서 유가 아니다. 그래서 유에도 주(住)하지 아니하고 무(無)에도 주하지 않는다고 〈종경록〉에서 밝히고 있다.
이 여(如)의 사상은 가장 인도적이면서도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의 불교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는 '그대로', '그와같이'등의 뜻을 가진 것으로 본래 부사였으나 나중에 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이 '여'가 불교에 들어와 쓰일 때는 '같이', '그러한' 뜻으로 쓰이지 않고 '물건의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란 뜻으로 인용된다. 자연법이(自然法爾)와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여는 반드시 '여실'이며 '진여(眞如)'라야 한다. 부처님을 다른 표현으로 여래(如來)라고도 하는데 '진여로부터 내생(來生)한 이'로 수행을 완성한 사람, 인격완성자, 완전한 사람을 지칭한다. 나아가 진여로부터 왔기 때문에 진리의 체현자로서 중생을 가르쳐 이끈다는 부처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여'의 논리는 뒤에 공(空)과 같은 뜻에 놓이게 된다. 차례차례대로 관찰해 나아가 보니 모두가 공이 아닌 것이 없다. 여의 진실은 곧 공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공이면서 불공(不空), 불공이면서 공이다 하는 것은 여여의 뜻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도 해석한다.
〈종경록〉제30권에 '유여여급여여지독존(唯如如及如如智獨存)'이란 말이 나온다.
여든 공이든 적(寂)이든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데 무엇인가 그것을 아는 놈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아는 놈이 지(智)라는 것이다. 이 지가 있어야 여여가 인정된다. 이것을 여여지(如如智)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여여지는 여여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여와 여여지는 또 일여의 체중(體中)으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여가 곧 여지이고 여지가 곧 여인 것이다.

13. 회광반조
노산의 간법사(簡法師)가 신회에게 물었다. "명경(明鏡)은 높은 대상(臺上)에 놓여져 만상을 비추어 거기에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무슨일 입니까?"
신회가 대답한다. "명경은 높은 대상에 놓여져 만상을 비추어 나타낸다. 옛부터 고덕(古德)들이 이르길 그런 상태를 불가사의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없다. 명경이 만상을 비추어 만상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 훨씬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여래는 무분별에 의하여 일체를 잘 분별하신다. 어찌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일체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신회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명백하다. 명경이 자유로이 물건을 비추지만 비추어진 물건에 의해서 명경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명경의 불가사의함은 여기에 있다. 명경은 또 작의(作意)하거나 선택해서 대상을 비추지 않는다.
거울 자체가 명정(明淨)하기 때문에 그 자체에 비추는 힘이 있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담아낸다. 중생도 또한 마음이 청정하면 자연히 큰 지혜의 빛이 있어 무한의 세계를 비출 수 있다. 그것은 무념(無念)으로서 가능하다. 신회는 무념을 명경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명경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비추지만, 물건이 비추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것도 비추지 않을 때에 명경의 진가가 발휘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상이 있고 없음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저 거울 자체의 작용이라 해도 좋다. 비추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고 하는 소식이 여기에 있다.
견성이나 돈오나 이러한 명경의 비유가 가장 구체적이다. 회광반조란 원래 석양광선의 반사를 의미하는 '반조'에서 나온 말이다. 두시(杜詩)에 '반조'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듯이 삼라만상은 석양에 비추어져서 그 실상을 발양(發揚)한다.
여기에 기인해 당의 선가(禪家)에서는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작용을 '조(照)'라고 했다. 이 말은 당대의 선사상에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말자체는 대승불전류에도 나와 있지만, 당 시대에 거울의 철학이 완성되자 '조'의 일자는 선어(禪語)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비추지 않고서 비추는 소식을 '조'의 일자에 기탁한다. 예컨대 회광반조라든가 조용동시(照用同時)라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회광반조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비추던 것이 스스로 비출 수 있는 힘을 되찾아서 비춘 것을 되비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의 심성이 반조된다는 것이다. '회광반조'의 구조는 임제에 이르러 보다 철저해진다.

14. 거울과 벽돌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작용을 '조(照)'라고 불렀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말은 당대의 선사상에 특유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말 자체는 승조(僧肇)와 대승불전에도 나와 있지만, 당대에 이르러 거울의 철학이 이루어지자 '조'의 일자는 널리 회자되는 선어가 됐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발상은 탁월한 철리(哲理)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마음을 발견해가는 거울의 철학, 그것은 남악회양(南岳懷讓)이 그의 법제자 마조도일(馬祖道一)을 일깨우는 장면에서 더욱 극명한 가르침을 던져주고 있다. 남악회양은 거울을 가르치기 위해 벽돌을 사용하는데 마음을 반전시키는 극적효과마저 낳고 있다.

마조가 남악 전법원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좌선에 열중하면 어느 누가 내방해도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회양이 왔을 때도 좌선에만 매진했다. 이에 회양이 하루는 마조의 암자 앞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역시 돌아보지 않다가 몇시간이나 그러고 있는 회양의 태도가 하도 괴이해 물었다.
"벽돌을 왜 그렇게 열심히 갈고 계십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든다는 겁니까?"
마조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그러는 넌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된단 말이냐?"
마조는 앞 이마가 갑자기 서늘해짐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옳다는 말입니까?"
"비유하건대 수레를 타는 것과 같다.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소에게 채찍질을 할 것인가, 수레에 채찍질을 할 것인가."
마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회양이 이어 말했다.
"너는 좌선하고 있느냐? 아니면 앉아있는 불타의 흉내를 내고 있느냐? 좌선이면 좌와(坐臥)에 구애되지 않으며 앉아있는 불타는 선정의 자세에 구애되지 않는다. 진리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일부러 취사해서는 안된다. 너는 앉아있는 불타를 배워서 오히려 살불(殺佛)의 죄를 범하고 있다. 좌선에 사로잡히는 것은 선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얼마나 살아있는 설법인가. 회양의 가르침은 이제 '거울의 철학'에서 몇걸음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거울'마저 빗겨가고 있는 셈이다. 어느 것도 차별하지 않는 그것이 '거울'이라면 형체가 없는 선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가는 그것은 이미 '거울'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벽돌이 거울이 될 수 없는 이치는 무명으로 부처가 될 수 없는 이치와 너무 흡사하다. '진리의 눈'을 외면하고선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회양이 벽돌을 들어 '거울의 철학'마저 부수고 선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갔던 순간이다.

15. 평상심시도
인간의 일상생활을 모두 불도의 전개로 보려는 사상이 여기에 있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여기게 됐던 이 말은 마조도일(709∼788)의 상당법어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마조의 제자 남전보원((748∼834)이 '평상심이 바로 도'라며 스승의 말을 메아리처럼 전수한다. 비슷한 말로 ‘착의끽반 아시송뇨(着衣喫飯 屎送尿)’도 있다. 도는 의복을 걸치고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는 일상생활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도가 일상생활에 있다는 생각은 옛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일을 일상생활의 행위에 근거해 짧막하게 한마디로 단언한 것은 역시 마조의 특출한 선기를 느끼게 한다. 마조가 직접 설파한 평상심이란 이렇다.
“평소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이러니 저러니 판단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좋아하지도 않고, 단견상견(斷見常見)을 버리며, 범성을 구분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범부처럼 행세하지도 않고 성인 현자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지금 이렇게 걷다가 곧 멈추기도 하고 다시 앉아있다가 편안하게 눕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이 모두가 바로 도다.”
아무리 청결하고 우아한 사람일지라도 하루에 몇번 반드시 배설을 한다.
대소변을 배설하는 것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에 청결과 불결을 분별할 소지는 없다. 마조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으면 거기에 진리가 있다. 자칫하면 철학적으로 생각됐던 생로병사의 진리가 마조 이후 식욕과 배설이란 가장 원시적인 생리 기능면에서 생각케 된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시도’의 가르침은 마조의 법제자 남전보원선사에 의해 더욱 충실히 발전 계승된다. 남전의 제자 장사경잠과 한 스님의 대화를 들어보자.
“평상심이란 무엇입니까?”
“졸리면 잠을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그 뜻을 좀 더 가르쳐 주십시오.”
“더우면 부채질하고 추우면 화롯불을 쬔다.”
경잠선사의 말처럼 졸리면 자고 추우면 불을 쬐는 행위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이다. 졸릴 때 잠을 못자면 고문이 되거니와 거기엔 인위(人爲)가 끼어있다. 때문에 평상심을 유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같은 평상심에서는 두려움 성냄등 감정이 일어날 수 없음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대로가 지극히 편안한 삼매상태다. 스승 마조를 이어 후학들이 ‘평상심시도’란 동일한 철학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심시도는 이어 일상의 용어들이 공안으로 채택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6. 회호(回互)
사전적 풀이로는 상호 순회한다는 의미다. 즉 이(理)와 사(事)가 상호 의존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회호의 논리란 긍정과 부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주인과 객이 언제라도 자리를 바꾸어 앉되 결코 주객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것. 선학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이론으로 취급되고 있다. ‘회호’라는 말은 석두희천(700∼791)선사의 〈참동계〉에 나온다. 석두선사는 ‘회호’를 통해 제법의 실상과 본래의 자기를 융합시키는 원리를 밝히고 있다. 그가 말하는 ‘회호의 논리’는 무엇인가.
“신령한 마음 근원은 밝게 사무치나 곁가지가 은연중 가닥쳐 흐르니 현상을 붙들면 아예 미혹한 것이요, 이치에 계합해도 깨침은 아니다. 구비구비 온갖 경계 회호하고 회호하지 않는 것들이 빙둘러 돌아갔다가는 다시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문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개개의 주체가 상즉상입의 호환을 통해 물아일체의 총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불회호란 낱낱의 숱한 것들이 각자의 처지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회호의 입장에 서있다면 ‘물이 흐르는게 아니고 다리가 흘러간다’거나 ‘구름은 가만히 있고 산이 움직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회호는 ‘물아일체의 총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회호방참(回互傍參)’이란 말도 선가에서 쓰이는데 그 뜻은 대립적인 두 개의 것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관계가 있는 것에 골고루 걸쳐서 궁극적으로는 자타가 일체가 됨을 의미한다.

출처 :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글쓴이 : 희작(喜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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