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현장

포교가 곧 수행

마음정원(寂光) 2012. 6. 1. 17:35

포교가 곧 수행 / 법상스님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이상적인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이름 합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하여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즉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 고하(高下)의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두 가지가 모두 함께 똑같이 중요한 수행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보살행이며, 보리(깨달음)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지도론』에서는 보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켰을 때, --- 그는 '나는 부처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서원했다. --- 그는 이때부터 보리살타(보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초발심을 일으킨 자가 바로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의상조사 『법성게』를 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란 말이 있듯이, 수행과 포교를 처음 발심한 이의 순수하고 지극한 마음이 바로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 구제와 자신의 닦음(상구보리 하화중생) 즉, 포교와 수행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존재입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어떤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보완적이며, 결국은 하나의 길에 대한 두 가지 실천 방법일 뿐입니다. 나와 너를 둘로 보지 않는 것이 연기법, 무아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구제하고(수행을 통한 깨달음) 상대를 구제하는(포교, 교화) 것이 바로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나를 구제하는 것이 곧 상대를 구제하는 것이며 상대를 구제하는 것이 곧 나를 구제하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불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포교(布敎), 교화(敎化), 전법(傳法)에 대해서 불교인들은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본인의 공부, 수행은 열심히 하면서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법을 일러주고 포교하는 것에는 너무도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불교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참선이 전부라는 생각, 스님은 산중에 들어가 수행만하면 된다는 생각 등등의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현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활 속에서 수행하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포교도 하나의 수행이라는 것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교의 힘이 바로 수행력(修行力)과 정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깨닫고 난 뒤에 포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현재, 바로 지금 내 위치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경전 한 구절이라도 남을 위해 한 마디라도 일러주는 그것이 바로 포교이지, 내가 깨닫지도 못했는데 무슨 포교냐고 한다면 이것은 소승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본인 수행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나를 위해 수행한다는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상을 녹이는 것이 수행일진대, 나 잘되자고 수행한다면 어찌 그 수행에 힘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내 수행이 원만해지기 위해서는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이타적인 포교의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고, 너의 수행, 이웃의 교화·포교가 바로 나의 수행과 직결된다는 당연한 믿음이 우리 불자들에게는 많이 결여되어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설법칼럼 준비를 하며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법우님들 모두에게 이익 되게 하기 위해 설법 준비를 한다고 보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역시 내 수행을 위해 닦아 나가고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똑같은 연기법을 설법 하더라도, 오늘 설한 연기법과 한달 전 설한 연기법은 절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늘 같은 연기법을 이야기하더라도 나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연기법의 세계는 나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올바른 연기의 실천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렇게 매번 법문을 하는 동시에 나의 실천의 힘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설법을 할 때마다, 이렇게 칼럼을 쓸 때마다 그 실천력이 늘어가는 것이며, 그만큼 마음 공부는 깊어 가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내 마음을 밝혀 줍니다. 이것이 내 수행입니다. 이것이 포교이지, 수행이냐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분별심일 뿐 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벌써 2,500년 전 그 위대한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일러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성도 후 열반까지의 전 생애 동안 철저히 포교와 교화, 전법으로 순일하게 일관하셨습니다. 스스로 이웃을 위하고 자신을 위한 정진의 삶, 보살의 삶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는 전법의 나날이요, 중생을 위한 이타행의 나날이었습니다. 참다운 불자라면 부처님을 닮아가야 할 뿐 다른 무엇을 닮고자 하겠습니까? 보살의 삶이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전법, 중생 교화라는 이타행의 실천으로 다시금 되돌아가자는 대승불교의 선구적 삶의 방식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행(信行)에서는 바로 이 점이 무척이나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교에 대해서는 다소 외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실정인 것으로 보입니다. 법우님들이나 스님들 모두가 포교의 중요성과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포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못하고, 그저 절에 오면 가르쳐 주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도 잘 모르는데 무슨 포교냐고 이야기 합니다. 이제 우리의 의식 전환이 필요한 때 입니다. 포교도 대승 보살의 당당한 수행이라는 의식 전환이 요구됩니다. 염불, 참선, 간경, 주력, 절, 관, 기도만 수행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진정으로 나를 위하고, 우리의 이웃을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길은 모두가 함께 부처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적극적으로 포교, 교화, 전법하는 데 있다고 하는 수행관(修行觀)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 :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