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마음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 아짠 진용 빤야와로

마음정원(寂光) 2012. 3. 4. 08:38

 

♣ 이달의 법문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분명한 알아차림

아짠 진용 빤야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세 가지 양식의 느낌 (vedana : 웨-다나-, 감각)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느낌 속에는 세 가지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성향을 제거해야만 수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느낌 안에 일어나는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성향이란,
*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lobha : 로-바)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 괴로운 느낌에는 성냄(dosa : 도-사)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 중간 느낌에는 무지(moha : 모-하)의 바르지 못한 성향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을 즐기게 되기 때문에 탐욕이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또한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과정 동안 수행자 고통의 느낌에 반응하기 때문에 성냄, 짜증 등이 계속하여 일어나 결국에는 수행에 대해 의기소침해 질 것입니다.
중간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가 그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중간 느낌이 일어나는 전 수행 과정 동안 그것이 모호하기 때문에 무지가 반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듣는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겨나는 요소는 말하는 음파입니다. 이것을 치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생겨나는 요소는 귀안에 받아들이는 부분, 느낌을 아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받는 요소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물질입니다.
이 두 가지가 치고받을 때 세 번째 아는 의식,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정신입니다. 이것은 열리는 요소, 생기는 요소라고 말합니다.
듣는 과정에는 언제나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서 아는 순간에 팟사(phassa : 접촉)가 생겨나고, 이어서 웨-다나-(vedana : 느낌)가 생겨납니다. 즉,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중간의 느낌, 이런 느낌들이 생겨납니다.

실재 수행을 해보면 좋고 싫은 느낌은 명확한데 중간의 느낌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명확히 알아차림 하여, 들을 때는 다른 아무것도 없이 앞의 세 가지 요소, 즉 물질과 정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들음은 한 순간의 들음, 한 순간의 들음의 연속이고, 항상 하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실제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느낌에는 탐욕이, 싫은 느낌에는 성냄이, 무덤덤한 중간의 느낌에는 어리석음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르지 못한 「탐?진?치」라는 세 가지 성향이 자라지 못하게 알아차려 그 자리에 지혜가 자라게 해야 합니다.

(1).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이 세 가지 중에서 수행자는 괴로운 느낌의 현상을 먼저 경험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고통의 느낌을 극복하는 것은 초심자가 해야 할 행위 중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잘 이행하면 수행의 50%는 성공한 셈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하여 집중력이 조금 갖추어지면 고통의 현상들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통증, 가려움, 쑤심, 뻐근함, 메스꺼움, 딱딱함, 지루함 등의 고통의 느낌들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이 매우 강할 때 수행자는 그것에 깊이 반응하며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항상 문젯거리를 안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 문젯거리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몸을 뒤척이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수행을 하려고 몸의 자세를 꼿꼿하게 유지해서 움직이지 않고 마음집중 상태에 있으니, 몸 각 부분의 조직들은 무질서에서 질서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반응을 일으키게 되어, 그것의 결과로 통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통증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행에 있어서 통증은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설사 조그마한 가시라도 손에 넣어둔 채 일을 능숙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시가 몸을 망가트리지는 않지만 마음이 불편하여 일을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증의 관찰을 생략하고 다른 현상의 관찰로 넘어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와 같이 수행자는 고통의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할 때 세 가지 태도 중 어느 하나를 취하게 됩니다.

① 고통스러운 느낌을 그 자신에게서 제거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오직 그 고통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바램으로 관찰하는 자.
② 바로 그 좌선에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투쟁적인 태도로 관찰하는 자.
③ 그 고통의 느낌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보려는 태도로 관찰하는 자.

①의 경우 : 이것은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으로, 그 자체가 탐욕입니다. 수행자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탐욕을 증가시키는 것이 되어서 그의 마음 챙김에는 항상 번뇌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 됩니다. 번뇌가 도사려있는 한 수행자는 법을 보지는 못할 것이며, 수해ㅇ자의 지혜는 향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자가 지녀야 할 적절한 수행의 태도가 아닙니다.

②의 경우 : 투쟁적인 마음속에는 반드시 성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내는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투쟁적인 태도는 번뇌의 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수행하는 동안 번뇌가 도사려 있는 한 수행자는 법을 보지 못할 것이며, 지혜 또한 향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태도는 수행자가 지녀야 할 적절한 수행의 태도가 아닙니다.

③의 경우 :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 챙김을 하는 태도가 옳은 접근 방법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행자는 이제 곧 법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담마는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수행자는 참 성품을 보려는 마음으로 고통스러운 느낌을 관찰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의 참 성품을 이해하려고 그것을 관찰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수행자는 이 고통의 느낌에 대하여 의연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통증은 수행을 방해하는 적이 아니라 수행을 돕는 친구입니다.

실제로 통증은 수행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보조 요인의 역할을 합니다. 통증은 결코 수행의 향상을 방해하는 적이 아니라, 오히려 수행의 향상을 돕는 보조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 수행의 가장 큰 장애는 졸음과 망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통증이 있는 한, 통증의 강한 느낌으로 인해 졸음과 망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통증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급류를 거슬러 오르며 수영하는 자와 같아서 목표에 이르지는 못할지언정 대부분 목표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수행의 격언 중에 《인내가 닙바-나(nibbana : 열반)로 인도한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결코 "이번 한 시간을 어찌 버티며 수행하나! 또 다리의 통증으로 괴로워해야 하나!"라고 하며 미리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냉정한 태도로,

"그것 자체의 성품으로 인하여 '느낌'은 통증과 고통을 일으킨다. 나의 의무는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의 참 성품을 보는 것이다"라고 마음을 가라 앉혀야 합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통증이 일어났음을 즉각 포착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괴로운 느낌이 더욱 강하게 되었을 때, 수행자는 무의식적으로 마음도 몸도 다 긴장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미 긴장 속에 있게 된 한참 후에야 자신이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즉시 그것을 주시하십시오.

먼저 몸의 긴장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조사해 보십시오. 마음 또한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긴장을 들여다 보십시오. 그러면 이완하려는 의도가 일어나면서 몸의 이완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을 고통스러운 느낌 위에 갖다 놓습니다.
다음에는 느낌이 실제로 있는 곳을 찾습니다.

만약 무릎이라면, 피부의 깊은 층에 있는가! 살 속에 있는가! 뼈 속에 있는가!

수행자는 꿰뚫어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느낌의 정도를 가늠하며 '통증, 통증' 혹은 '쑤심, 쑤심'하며,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하여 알아차림 합니다. '통증' '통증'하며 알아차림 할 때 통증을 싫어해서 그것이 빨리 사라져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통증 그 자체를 들여다보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는 명칭을 놓아버리고 그냥 통증 그 자체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명칭은 관념을 만들어 실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상당한 정도의 사마-디 (samadhi : 마음 집중)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느낌의 참 성품을 알아내기 위한 기초입니다.
수행자는 건성으로 혹은 관념적으로 그리고 서둘러서 알아차림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느낌이 변화하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꿰뚫어 보듯이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확고하게 알아차림을 할 때, 그 연속적인 알아차림을 위해 과도한 노력을 해서는 안 됩니다. 통증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과도할 때는 통증 그 자체를 알아차림 하는 것보다는 격렬한 노력 그 자체만 앞서서 마침내는 그것이 화냄을 동반하기 때문에 마음 챙김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통증 그 자체에 미치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지고 통증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고통스런 느낌은 변화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매번 변화하는 고통의 정도와 위치 및 양식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의 사마-디(sam?dhi : 마음집중)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너 댓 번의 알아차림 후 통증의 정도가 더욱 강렬해 짐을 발견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시해보면 그 통증은 최고의 절정에 도달한 후 서서히 감소하게 됩니다.
이때 수행자의 마음이 대상을 향하는 긴밀함도 다소 풀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수행자는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계속하여 꿰뚫어보는 관찰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통증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통증은 상승하기 시작한 후 최고의 절정에 달했다가 다시 서서히 감소하여 드디어 그 통증의 느낌이 사라진다는 것을 너 댓 번의 알아차림으로 경험한 것은 통증에 대한 성품을 보았음을 의미합니다.

수행자가 꾸준히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사마-디가 모아지면, 통증에 대한 단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통증은 상승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윽고 최절정에 도달한 후, 단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그 통증은 두드러지게 감소하거나 혹은 장소를 이동해 버리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 통증의 현상 자체가 장소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앞서 일어났던 통증의 현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른 통증의 현상이 다른 장소에 새로이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느낌에 대한 성품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자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사마-디가 성장되었을 때, 통증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이게 됨과 동시에 통증이 순간적으로 일어남에 따라 알아차림도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통증이 순간적으로 사라짐에 따라 알아차림도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제 수행자는 통증 그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무상(anicca : 아닛짜)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분명히 이해한 것이 통증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입니다.

수행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혜(Udayabbaya nana : 우다얍바야 냐-나)'를 증득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둑카웨-다나 (dukkha vedana : 고통의 느낌)를 극복하는 시작입니다. 이것으로 고통의 느낌 속에 머물러 있는 탐욕, 성냄을 제거하는 일은 끝난 것입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들은 그들의 인연으로, 즉 조건들에 의해서 일어날 뿐,
수행자의 의지로서 그것을 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무아 (anatta, 아낫따, 조절할 수 없음)를 본 것입니다.

수행자가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를 완전히 보았을 때 고통의 느낌 속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진(성냄)'은 제거됩니다.

(2).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한 알아차림 방법

수행자가 열심히 정진하여 고통의 느낌들을 잘 극복하여 더욱 정진해 나아가면 수행자의 사마-디가 성장되어 고통스런 느낌들의 현상들은 사라지고 기쁨, 즐거움, 고요함 등의 현상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이 쾌적해지고, 유연해지며,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기에 적절해질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1시간 좌선 동안 두세 번 자세도 움직이거나 움직이고 싶었었는데, 이제는 1시간 좌선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두세 시간 계속 앉아있을 것 같고 실제로 앉아 보고도 할 것입니다.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잘 숙달되어 있으므로 감각 대상이 일어나면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절로 작용하는 것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기가 매우 쉬워질 것입니다.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감각과 상태를 얻게 됩니다. 전에는 좌선 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와 같은 기쁨과 편안함 그리고 평화스러움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위빳사나-의 삐-띠(piti, 기쁨, 환희)로 인하여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 (sukha vedana : 수카 웨-다나), 즉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 즐거운 느낌에 마냥 머물러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즐거운 느낌 속에 머물고 있는 탐욕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고통스러운 느낌처럼 즐거운 느낌에 대한 참 성품을 알아차리게 될 때까지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뚜렷하면 꿰뚫어 보듯이 주의 깊게 육체적인 편안함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각각 알아차림하며 관찰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지혜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였을 때, 그 편안함 들도 영원하지 않고 일어나서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임을 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감각이 일어난 후 그것이 사라지고, 그 후에 다른 편안한 감각이 일어났다가 또 사라지는 현상들의 연속을 보게 됩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더욱 성숙되면 그것들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속도가 증가하여 점점 빨라짐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너무나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므로 수행자에게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침내 일어나는 것은 잘 보이지 않고 계속하여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것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Bhanga nana : 방가 냐-나). 그 존재들이 너무나 허망하게 보일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엄청난 고통임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고통으로 보므로 이제 수행자는 즐거운 느낌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탐욕을 제거하는 일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하지 말고, 분명하게 그 감각을 알아차려서 면밀히 관찰해야만 합니다.

한 가지 더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부분 수행자들이 사마-디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실제에 있어서 수행자가 사마디, 즉 집중을 키우려고 주력하면 지나친 긴장을 가져와 오히려 역반응이 올 것입니다. 수행자는 단지 정확한 사띠(sati, 알아차림)를 하려고 주력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고 연이어 진행되면 사마-디는 자연스럽게 찾아들 것입니다.
사마-디는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찾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정확한 ‘사띠’를 하려고 주력하십시오. 사실 ‘사띠’는 위빳사나- 수행에 있어서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며, 우리의 일상 삶에 있어서도 대단한 공덕을 보장하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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