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스크랩] 수덕사와 ,수덕여관

마음정원(寂光) 2011. 12. 17. 20:46

 

 

 

 

 

 

 

 



수덕사와 ,수덕여관



(수덕사 전경 및 일주문)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초라한 초가집 한 채가 다소곳이 들어 서 있는데 이것이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신

(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일엽스님과 나혜석, 대웅전 석축사이의 잡초가
두여인의 영혼을 연상케 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이들은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신여성들이다.

한국 최초의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한다.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이 무렵 나혜석(羅蕙錫, 1896~1949)이 등장한다.

나혜석이 누구인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던 개화기 대표적 신여성이다.



(송만공 영정, 아래는 나혜석 자화상)


 


그녀의 삶은 불행했지만 불꽃 같은 삶의 주인공이었다.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그녀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예술가였다.

예술은 그녀가 살아 온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평소에 가깝게 지냈던 김일엽이 암자에서 수덕여관으로

내려와 반가운 해후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은 밤 늦도록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간곡한 부탁에 나혜석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일엽은 "너는 안 돼"라고 냉정하게 질타한다.

그러나 당시 조실스님이던 만공을 뵙도록 도와 달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다.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일엽이 예상했던 대로 나혜석은 만공선사와의 면담에서 참담하게 거절을 당한다.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다" 라는게 만공선사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손쉽게 물러날 나혜석이 아니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 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이렇게 나혜석은 수덕사에 머물면서 수덕사의 정경과 자신의 심경을 화폭에 담아 내면서 찾아오는 예술인과 담론을 이어간다.



(김일엽이 오르내리는 던 견성암 길,
아래는 '청춘을 불 사르고'를 집필한 견성암)


 


그러던 어느날,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김일엽의 아들 김태신이다.

김태신은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유일한 혈육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을 만나는 순간 김일엽은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말한다.

그런 김일엽을 옆에서 보고 있던 나혜석은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나 뿐인 아들이 천신만고 끝에

엄마를 찾아 왔는데 어쩜 저렇게도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나혜석은 김태신에게서 깊은 모성애을 느낀다.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 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

이 후에도 김태신은 냉정한 어머니 김일엽의 태도와는 아랑곳 없이

수덕사를 찾는다. 올 때 마다

'수덕여관'에서 묵게 되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김태신를 지극정성 보살펴 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김태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그의 예술혼을 키워준 것이다.

김태신도 그의 예술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결국 김태신은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이곳 수덕여관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작품활동을 하며,

자유연애, 이혼 고백장 발표, 최린을 상대로 한 정조 유린 위자료청구 소송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당시 사회적 이목을 집중하는

유명인사로 회자된다.

이 무렵 등장하는 인물이 이응로(李應魯 1904∼1989)라는 청년화가이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생으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로에게 나혜석은 예술적 멘토 그 이상이었다.

 이응로 청년은 거의 매일 수덕여관을 찾아와 그림에 대한 이론과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을 쌓아간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그에게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며 예술적 멘토였던 셈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두 사람 사이에 세속적 애정관계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림이라 는 예술적 장르로 승화된 정신을 주고 받았을 뿐이다.

이때부터 불란서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던 나혜석의 영향을 받아

이응로는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고 훗날 파리로 떠나는 계기가 된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로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다.

부인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수덕여관에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그러나 나혜석으로부터 들었던 파리에 대한 동경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이응로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나혜석, 이응로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1967년 또다시 김태신이 어머니 김일엽 스님을 견성암으로 찾아온다. 일엽스님은 쪽 물감 만드는 일과 선수행(禪修行)에 매진하는 것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모자간의 정을 나눌 틈를 조금도 주지 않는다.

“정갈하게 가꾼 쪽풀을 응달에다 말려 단지에 발효시키는데,

동짓달부터 이듬해 5월까지 7백 번 손을 써야 하느니라.

699번 정성을 드렸다가도 단 한번 소홀히 하거나 부정을 타면 쪽이 죽어버린단다. 이 어찌 지극한 선적(禪的) 생명체라 아니 할 수 있겠느냐?”

“발효하기 시작하면 목욕재계하고 조석으로 저어 줘야 하는데,

젓는 동안 화엄경을 암송한단다…”

이것은 김일엽이 입적하기 5년 전 일이다.

박귀옥여사가 수덕여관에서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을 즈음,

1968년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이응로 화백이 연루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때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르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깊은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이응노화백이 새긴 암각화와 수덕여관 표지석)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긴 것도 바로 그런 감회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암각화 말미에 “이응로 그리다,” 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또 다시 파리로 홀연히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린다.

긴 기다림의 한 숨 속에서 남편을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낱 같은 희망으로 살았지만,

고암 이응로는 1992년 귀국전시회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 이응로 화백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다. 그의 영면과 함께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페허로 변해가는 수덕여관)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 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면서

 최근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했다.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낸 것은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것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사람의 이야기 전부이다.,

한 많은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수덕여관, 그 비운의 수덕여관에는 이제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의 숨결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출처 : 인도네시아 해인사)


Text and Photo from Internet :
Webpage by Dalmasan, Dec. 5, 2011


 

 

 

 

 

 

 

 

 

 

 

 

 

 

 

 

 

 

출처 : 차한잔의 그리움
글쓴이 : 우연속에필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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