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향기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 서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마음정원(寂光) 2011. 11. 10. 20:29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 서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3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

배가 강화도 외포리 포구를 떠나자 갈매기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다.
배가 10여 분 만에 석모도 석포리 포구에 닿았다. 선원의 안내에 따라 자동차가 한두 대씩 뭍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필자는 차를 몰고 배에서 내려 보문사로 향했다.

보문사는 석모도 낙가산(267m) 중턱에 있다. 보문사에서 기원하면 기도발이 좋다고 한다. 그런 소문 때문일까. 오전인데 주차장은 벌써 포화 상태다. 보문사는 양양군 낙산사·남해군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관음기도 도량이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음성을 관(觀)한다. 사바세계 중생이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에 답하여 구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면 삶의 질곡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화엄경』에 의하면 바다에 솟아 있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 관세음보살의 거처가 있다고 한다. ‘보타락가’는 인도어로 하얀 꽃을 가리킨다.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하얀 꽃 한 송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어쩌면 고해의 한가운데에 상주하며 중생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길이 가파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락보전이 보였다. 일제 때 한국 불교를 지켜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한영(1870~1948년) 스님이 「보문사법당중건기」를 남겼다. 이 기록에 의하면 금강산 보덕암에서 수행하며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회정 대사가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석모도로 들어와 관음 성지의 길지임을 알고 보문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불교 학자는 불교 문헌에 법명이 회정이라는 스님이 고려 12세기에 등장한다며 창건 시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보문사는 근대에 이르러 1812년에 유생 홍봉장(洪鳳章)에 의해 중창되었고 1920년 대원 스님이 화주(化主)가 되어 관음전 법당을 중건했다. 그러다가 1998년 당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이 원력을 세워 원우 스님, 설송 스님 그리고 주지였던 원종 스님이 대대적으로 불사를 추진하여 옥부처 삼천불이 봉안된 극락보전과 설법전, 요사 등을 완성했다.



스물세 분의 나한상과
600여 년을 살았다는 향나무


극락보전 바로 옆에 석실 나한전이 있다. 진덕여왕 3년(649년) 어느 날 어부들이 앞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러나 그물에 걸려 올라온 것은 스물두 개의 돌덩이였다. 돌덩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 그물을 던졌는데 다시 돌덩이가 올라왔다. 그 돌덩이들이 현재 보문사 석실에 봉안된 나한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아라한은 마땅히 공양을 받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악을 멀리 떠났고, 번뇌를 죽인 성자를 가리킨다.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150여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석실은 약간 어두웠다. 근래에 나한상의 석질을 조사해 보니 인도의 화강암과 같은 종류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기하고 묘한 일이다. 아라한과를 이룬 성자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 가능하다. 인도의 아라한이 몸은 그곳에 두고 한반도로 날아온 것일까. 관세음보살……. 불자들이 나한상을 향해 하염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석실을 나와 작은 샘터에서 물 한 바가지를 마셨다.

“어머나, 죽었다가 살아났대.”

남녀 한 쌍이 향나무를 보고 있었다. 석실 앞에 600여 년을 살았다는 향나무가 있다.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용트림 형상을 하고 있는 향나무가 한국전쟁 때 싹이 돋아나지 않았었다고 하니 이 또한 나무로서 아라한과를 이룬 것은 아닐까.



말없이 미소짓고 있는 마애관음보살

향나무 아래에 보통 것의 3배는 됨직한 맷돌이 놓여 있다. 안내문에는 맷돌의 지름이 69cm, 두께가 20cm로 되어 있다. 보문사에서 한때 300여 명의 사부대중이 기거했다고 하니 맷돌도 그만큼 커야 했으리라.

향나무 맞은편에 종각이 있다. 1975년에 완성된 범종은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톤으로 당시에 우리나라 최대의 크기였다. 주지인 정수 스님의 발원과 육영수 여사의 시주로 만들어졌다. 범종은 아침저녁으로 스물여덟 번 울려 퍼진다. 중생들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 불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행무상을 깨치기 위함이다. 육영수 여사는 저세상에서나마 종소리를 듣고 있을는지…. 삶이 무상하다.

“드르르륵!”

북쪽 산기슭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예전에 길이 40m 폭 5m의 너른 바위인 천인대(千人臺)가 있던 자리다. 천인대는 창건 당시 인도의 스님이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를 깎아 와불이 만들어졌고 현재는 와불 전각을 짓고 있다.

와불은 석가모니 부처께서 열반에 들 때 사라쌍수 아래에서 머리는 북쪽에,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승가리를 네 겹으로 접어 오른쪽 옆구리를 붙인 다음 사자처럼 발을 포개고 누운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와불은 열반을 상징한다. 와불 불사가 끝나고 나면 보문사는 관음성지로서 또 다른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극락보전 옆으로 계단이 있다. 낙가산 9부 능선까지 이어진 420여 개의 계단을 오르자 눈썹바위가 나타났다. 눈썹바위 아래에 마애관음좌상이 앉아 있었다. 이 마애불은 1928년 주지였던 배선주 스님이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 스님과 함께 높이 920cm, 너비 330cm로 바위에 음각하여 조성했다.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이 마애관음보살의 미소가 부드럽고 자애롭다.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열심히 절을 한다.

“너무 멋있다!”

“장관이네.”

사람들이 바다를 보며 한마디씩 내뱉는다.
바다 저쪽에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 동전처럼 동그란 해가 해무 속에 잠기면서 붉은 노을을 만들어 냈다. 바다가 불타는 것 같다. 사뭇 비장미가 감돈다. 마애불은 해가 서쪽으로 지는 이유를 알까. 마애관음보살은 여전히 말없이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고만 있다.







유영갑 1991년 월간 『문학』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1994년 대산문화재단 창작 지원금 수혜자 선정을 비롯 2005년 장편 『달의 꽃』이 우수 도서에 선정되었다. 창작집 『싸락눈』, 평전 『성완희 열사』, 장편 『푸른 옷소매』, 『그 숲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

사진 하지권 사진작가

 

- 츨처 : 월간불교문화 / 대한불교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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