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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란 무엇인가?

마음정원(寂光) 2011. 11. 11. 09:16

사념처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이것은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니 바로 사념의 길이니라. 그러면 사념처란 무엇인가?


비구는 몸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몸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써 (몸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감각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감각에 대한)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감각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마음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마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마음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비구는 법(마음의 대상)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법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주시로 (법의)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극복한다.


1. 몸에 대한 주시(身念處. 신념처)


1)호흡에 대한 주시
그런데 비구들아, 비구는 어떻게 몸을 주시 하면서 생활하는가? 비구는 숲속이나 나무 아래 또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몸을 똑바로 세우고 마음을 긴장 시킨다.

그리고 주시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주시하면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쉴 때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 있다.'고 알고, 숨을 길게 내쉴 때는 '숨을 길게 내쉬고 있다.'고 안다.


숨을 짧게 들이쉴 때는 '숨을 짧게 들이쉬고 있다.'고 알고, 숨을 짧게 내쉴 때는 '숨을 짧게 내쉬고 있다.'고 안다.

'(숨쉬는) 과정 전체를 주시하면서 숨을 들이쉬겠다'고 자신을 수행하고, '(숨쉬는) 과정 전체를 주시하면서 숨을 내쉬겠다고.'고 자신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혹은 내.외적으로 주시 하면서 생활한다(자신의 호흡을 주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흡을 주시 하거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호흡을 둘 다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참으로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해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2)몸의 자세
그리고 다시 그는 가고 있을 때는 '가고 있다.'고 알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고 알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고 알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다.'고 안다.

그는 몸의 어떤 자세라도 잘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모든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해
그리고 또 그는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서 갈 때를 분명하게 안다.

앞을 보거나 뒤를 볼 때를 분명하게 안다.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대변이나 소변이 마려울 때를 분명하게 안다.

걷고, 서고, 앉고, 잠자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을 지킬 때를 그는 분명하게 안다.


(잠자리에 든 후와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잠자는 동안 존재했던 육체적.정신적인 것들은 바로 잠자는 동안 끝나게 된다.'고 주시하는 사람은 잠자고 깨어나는 데에 분명한 이해를 가진 사람으로 불리운다. 행위(업)를 만들거나 행위로 구성된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잠이고 일어나는 것이 깨어남이다. (Bhikkhu Soma, The Way of Mindufulness))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몸의 부정함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이 몸은 피부로 싸여 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주시한다.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치아,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등의 내장들이 있다.'고 주시한다.


이와같이 그는 몸에 대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5)물직적인 요소(사대.四大)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몸을 주시한다.

즉 이 몸에는 견고성의 요소(地.지), 유동성의 요소(水.수), 열성의 요소(火.화), 운동성의 요소(風.풍)가 있다고 주시한다.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6)시체의 부패 과정에 대한 주시
그리고 또한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몸을 주시한다. '이 몸도 저 시체와 같으니, 저 시체처럼 썩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그는 몸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이 설법은 시체가 썩어 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각 단계에서는 수행자는 '이 몸도 저 시체와 같으니, 저 시체처럼 썩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라고 자신의 몸을 주시한다)


2. 감각에 대한 주시(受念處. 수념처)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감각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즐거움을 느낄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알고, 괴로움을 느낄 때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안다.


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낄 때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낄 때는 '비세속적인 즐거움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낄 때는 '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낄 때는 '비세속적인 괴로움을 느낀다.'고 안다. 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을 때는 '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고 안다. 비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을 때는 '비세속적인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고 안다.


(세속적인 감각들은 '가정 생활과 관계된' 감각들이고 비 세속적인 감각들은 '출가 생활과 관계된' 감각들이다. 비세속적인 즐거움은 명상으로 인해 생기는 행복을 말하고 반면에 비세속적인 괴로움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해탈로 가는 팔정도의 수행이 더딤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비세속적인 감각은 통찰의 결과로 생긴 평정함이다.
(중부, 137))


이와 같이 그는 감각에 대해서 내적으로, 최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며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 마음에 대한 주시(心念處.심념처)


그리고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비구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탐욕스러운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스럽지 않은 마음을 '탐욕스럽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고, 성내지 않는 마음을 '성내지 않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은 마음을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지 않은 마음을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마음의 무기력한 상태)'이라고 알고,

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이라고 알고,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상태)'이라고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욕계의 일반적인 의식)'이라고 알고,

초월적인 마음을 '초월적인 마음(색계와 무색계의 의식)'이라고 알고,

비초월적인 마음을 '비초월적인 마음(욕계의 의식)'이라고 알고,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고,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 법(마음의 대상)에 대한 주시(法念處.법념처)


그리고 비구는 어떻게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1)오개(五蓋. 수행의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주시
비구는 오개라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오개라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하는가?


자신 안에

1)감각적인 욕망이 있을 때 그는 '내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있다.'고 알고, 자신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없을 때는 '내 안에 감각적인 욕망이 없다.'고 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일어나는 대로 알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인 욕망이 사라지면 그것을 사라지는 대로 알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인 욕망이 이후로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일어나지 않은 대로 안다.

2)악의,증오

3)나태와 무기력

4)침착하지 못함과 걱정

5)회의적인 의심의 경우 에도 그렇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2)오취온(五取蘊)에 대한 주시
비구는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이 있고,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의 일어남이 있고, 이와 같이 물질적인 형상의 사라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감각, 지각, 의지적 형성력, 의식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3)육내입처(六內入處. 인식 주관), 육외입처(六外入處. 인식 대상)에 대한 주시
비구는 눈을 알고, 물질적인 (보이는) 형상을 알고 그리고 이 둘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족쇄(번뇌)를 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그는 귀와 소리를 알고, 코와 냄새를 알고, 혀와 맛을 알고, 몸과 감촉을 알고, 의식과 의식의 대상을 알고 이 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족쇄를 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어떻게 일어 나는지,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미래에는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4)칠각지(七覺支. 깨달음의 일곱가지 요소)에 대한 주시
비구는 자신 안에

염각지(念覺支. 관찰이라는 깨달음의 요소)가 있을 때 '내 안에 염각지가 있다.'고 알고, 자신 안에 염각지가 없으면 '내 안에 염각지가 없다.'고 안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았던 염각지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염각지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안다(나머지 여섯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인

택법각지(擇法覺支. 여기서 법은 정신과 물질을 말한다),

정진각지(精進覺支),

희각지 (喜覺支),

경안각지(經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사각지(捨覺支)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그는 법(마음의 대상)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5)사성제에 대한 주시

비구는 진리에 따라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 대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는 법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주시하면서 생활하고, 법에서 소멸하는 요소들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간다. 이와 같이 비구들아, 비구는 사성제의 법에서는 법을 주시하면서 생활한다.


진실로 비구들아,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7년 동안 사념처를 수행 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최종적인 해탈의 지혜(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不還果)를 얻을 것이다. (중부 70)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사념처를 7년이 아니라 6년, 7개월, 6개월, 5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 동안만이라도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를 얻을 것이다.


누구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만 사념처를 수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결과 가운데 한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지금 여기서 아라한과를 얻거나,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을 때는 불환과를 얻을 것이다.


비구들아, 이 때문에 '이것은 중생들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판을 극복하고, 고통과 비애를 여의고, 올바른 길에 이르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니 바로 사념처의 길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붓다가 이와 같이 말하자 비구들은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주시에 대한 이 설법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것이 몸, 감각, 마음, 법(마음의 대상)이라는 특별한 네 가지 대상에만 관계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몸에 대한 주시는 어떤 것지도 없이 궁극점 까지 몸을 완전히 분석함으로써 즉 몸을 그 구성 요소들로 분석함으로써 우리들에게 몸의 본성을 깨닫도록 해 준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몸을 머릿속으로 탐구하다 보면 인간의 육체가 어떤 하나의 현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는 영원하고 지속적인, 어떤 실체가 없는 하나의 흐름(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들숨과 남숨은 자발적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식관(數息觀. 호흡을 주시하는 수행)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숨쉬려고 해야 하고 또 그 숨을 알아야 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집중력을 계발하고 길러서 몸과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 수식관이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몸의 자세와 걷기 따위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산만한 생각들을 없애고 집중력을 향상시키며 인식과 불방일(항상 깨어 있음)을 계발하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사념처의 두 번째인 감각(느낌)에 대한 주시는 '마음속에서 하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감각을 분석해서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또는 중성적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끼면 의기소침해지고 그러한 느낌을 싫어한다.

그러나 유쾌함을 느끼면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나 주시는 초연한 관점을 가지고 모든 감각들을 경험하도록 해서 감각의 농계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우리는 점차 거기에 단지 감각만이 있고 그 감각 또한 흘러가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에는 감각을 느끼는 자아(주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념처의 세 번째인 마음에 대한 주시는 마음을 연구하는 중요성과 다양한 생각들을 알아차리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이 경우 다양한 생각들이란 모든 잘못된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과 악한 생각을 극복하는, 그 반대의 생각들을 말한다.


마음과 생각들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마음의 진정한 기능 즉 마음의 본질과 마음이 어떻게 무익하거나 유익한 행위를 위해 사용되는가 하는 마음의 활동을 이해하게 된다. 마음에 대해 주시하는 사람은 마음을 통제하게 되어 마음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된다.


마하 풋사(Maha Phussa) 장로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경전에 실려 있다.

그는 수행하면서 항상 자신의 생각을 주시했다. 걷고 있는 동안 악한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점령하면, 그 는 걸음을 멈추고 악한 생각이 제거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그가 길을 잃어 버렸거나 도중에 무언가 잃어 버렸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그렇게 지속적으로 주시를 함으로써 후에 번뇌가 사라진 사람인 아라한이 되었다. 이것은 옛 선인들은 특별히 명상 시간에 명상의 자세로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자신들의 생각들을 주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음에 대한 이러한 주시는 또한 소위 마음이라는 것이 동일하게 변하는 정신적인 요소들도 되어 있는, 늘 변하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고 거기에는 자아나 영혼이라 불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사념처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은 붓다의 가르침인 모든 본질적인 법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법들의 대부분은 이 책에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경에서는 사념처의 각각을 묘사하면서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아 간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목표로 한 성과 즉 성실하고 열성적인 사람들의 성과물이다.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고, 그러한 높은 정신적인 삶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거듭해서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생에서 아니라면 미래의 다른 생에서 어느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력한 모든 사람들이 도달한 정상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생각을 심어라. 그러면 행위를 거둘 것이다.

행위를 심어라. 그러면 습관을 거둘 것이다.

습관을 심어라. 그러면 성격을 거둘 것이다.

성격을 심어라. 그러면 운명을 거둘 것이다. 성격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라고

 

[삐아닷시의 붓다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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