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무학대사

마음정원(寂光) 2011. 11. 7. 09:48

무학대사

무 학 대 사
태조 이성계를 돕고 다시 태조 방원을 돕는 무학대사.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정권 교체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처세 잘못으로 각각 태종과 태조에게 화를 입었으나 무학대사는 신중한 처세술 덕에 두 임금에게 모두 사랑을 받고 무사히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는 무학의 겸손이 인생의 한 귀감이 된다고나 할까.무학대사.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라 했다. 박자초(朴自超). 좀 이상한 이름이다. 무학(無學)이라는 승명 또한 특이하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듯한 이름이다. 고향은 경상도 삼기군 삼가면(오늘의 경남 합천읍)이었고,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아버지 박인일(朴仁一)과 어머니 채(蔡)씨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 다. 태조 이성계보다 여덟살 위였다.그러나 이런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설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금강산 어느 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무학은 부모 없이 자란 고아였다고 한다. 사연인즉 한 늙은 선비가 장가든 아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 청상과부 며느리와 단 둘이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늙은 선 비는 누구나 그렇듯이 아들을 대신할 손자를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더러 절에 가 백일기도를 드 려 보는 게 어떻겠는가 권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먹 음직한 천도 복숭아가 있는 것을 보고 그만 집어 먹었다. 그랬더니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가 곧 무 학이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동네에서 망칙스런 소문이 났다.결국 아이를 몰래 버리기로 했 는데 버린 이튿날 현장에 가 보니 학이 날아 오르고 그 밑에 아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더 이상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기르기로 했는데 이름을 날아가는 학, 즉 무학(舞鶴)이라 했다는 것이다.

나옹선사를 만나서

이러한 출생설화 말고도 무학의 어린 시절에 관한 설화가 남아 있다.
무학대사는 원효대사 만큼이나 유명한 역사 인물이기 때문에 떠도는 설화도 많은 것이다. 고향인 합천에서 는 무학이 어려서 읍내 제일 가는 부잣집에 꼴머슴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때 벌써 축지법 같은 도술을 썼다는 것이다. 부모없는 고아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학은 매우 가난하게 자 라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머리는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알았다는 천재 소년이었다.
18세에 홀연히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무학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는 데 이 산의 용문사에는 유명한 혜명국사가 계셨다. 무학은 혜명국사를 사사한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어느날 무학은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깨닫는다는 것을 도에 통한다, 즉 도통이라 하 는데 강도 높은 수도 끝에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무학은 비범하여 20세 남짓에 일차로 도통하 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자기보다 더 높은 스승을 찾았다. 옛날 사람은 스승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무학이 만난 스님들은 젊은 무학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침내 중국에 유학가기로 결심했는 데 그때 중국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 였다.공민왕 2년(1353). 원나라에 들어간 26세의 무학은 뜻밖에 나옹선사를 만나 사사하게 되었다.나옹은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었으니 이국에서 스승을 발견한 것이다. 그 는 무학을 한눈에 알아보고 장차 큰일을 할 인물로 점 찍었다. 나옹은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전 남 승주의 송광사에 자리잡게 되고 무학은 경기도 여주 고달산에 들어가서 조그만 암자에 머물게 된다.
공 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은 경기도 양주에 크게 회암사를 짓고 그 낙성식에 무학을 불러 고려의 국사(國師)가 되 어 달라고 청했으나 무학은 굳이 사양하였다. 고려의 멸망을 미리 알아차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앞 서서 태조 이성계와를 만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무학은 고려의 국사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
가 되는 것이다.


이성계와의 만남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11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 했다. 고려의 국사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기까지 무학과 태조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 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일설에 이성계가 스무살 때 아버지 환조가 죽었는데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중 두 사람이 함흥 땅을 지나가게 되는데 뛰어난 산세를 보고 스승이 먼저 제자에게 묻기를 『이 곳에 왕이 날 흥왕지지(興王之地)가 있다고 하는데 너도 아느냐』 하니 제자가 대답하기를 『산이 세 줄기 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는데 아마도 가운데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가 봅니다』 하였다. 이에 스승이 제자의 의견 을 고쳐주면서 『아니다. 사람을 보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긴요하듯이 저 산도 오른 쪽 긴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이 대화를 이성계 집 종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급히 집에 가서 주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이성계가 하인에게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빨리 따라가서 두 분을 모셔오라』 하였 다. 종은 함관령 밑 까지 따라가서 두 스님을 모셔와 환조의 장지를 택하게 되는데 바로 이 두 스님 중 스승이 나 옹이요, 제자가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무학 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 살고 있 었는데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1만 마리는 됨직한 닭이 일시 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1천여호나 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찧는 소리가 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 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성계는 먼저 이웃마을 점쟁이 노파를 찾아갔다.노파는 『여인 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해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설봉산이 있고, 거기 토굴에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신승(神僧)이 있습니다. 가서 해몽을 부탁해 보시지요』했다. 이성계는 노파가 가르쳐 주는대로 설봉 산 토굴에 찾아갔다. 그 신승은 바로 무학이었다. 무학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해몽을 시작했 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1만여 집에서 일시에 닭이 울고 1천여집에서 방아 소리가 난 것 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 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 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무학은 이성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 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요. 큰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 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 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양천도

이 이야기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 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다. 이성계는 설봉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변(安邊)에 살고 있었고 무학이 하라는 대로 절을 짓고 남몰래 천일기도를 드리며 왕이 될 야망을 불태웠다. 이후 이성계는 왕명 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무학의 예언에 힘을 얻은 것이다.
위화도 회군 때 또 한 사람의 스님이 이성계의 두뇌가 되어 전략을 세워 주었다. 신조(神照)가 그 사람이다. 신조는 이성 계 부대의 주축인 승군(僧軍)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성계가 왕조교체에 성공한 배후에는 불교세력 의 공이 컸다. 무학만 하더라도 이성계에게 반드시 군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 주어 그에게 무한한 용기를 갖 게 해 주었고 또 신조는 실제로 승군을 이끌고 이성계의 손발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 이성계의 후손들은 유 교세력과 손을 잡고 억불(抑佛)정책을 썼다.
정치의 속성이 비정한 것이라 하지만 그때 불교와 유교를 모 두 다독거려주었더라면 조선왕조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무학은 왕사가 되어 처음 양주 회암 사에 있었으나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용문산으로 옮겨 조용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 유신들 이 모두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가 하면 먼 시골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는 바람에 고려 의 수도 개성에 정이 떨어져 한양천도를 결심하였다. 그런데 한양보다 계룡산 밑이 더 좋다는 의견이 있어 이성 계는 먼저 계룡산에 가보기로 했는데 무학을 데리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 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겠습니까. 도사께서는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니 과연 계룡산 신도안이 수도로 정할 만한 곳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이성계는 무학을 천하제일의 도사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최 종결정은 무학의 의견에 따랐다.
무학은 계룡산을 반대했다. 무학의 라이벌인 정도전도 반대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게 되고 이름만 신도안(新都安)으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후보지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서울을 새 수도로 정하는 데 있어서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는 무 학의 대답이 모호했다. 왕이 왕사 무학에게 『이 곳 한양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사는 『이 곳은 사방이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해서 도성으로 알맞은 곳입니다.
그러하오나 대신 들과 지관(地官)들의 의견을 묻고 따르는 것을 잊지 마소서』 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태조실 록」에 기록된 것이다. 무학이 말끝을 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학은 한양 정도(定都) 문제를 놓고 정도 전과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무학은 정도전과 달리 무악산(毋岳山) 밑 지금의 신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 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한사코 무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북한산 아래에 남향으로 경복 궁을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이성계는 당황했다. 자기 눈에도 신촌은 왕도로 적절하지 않았다.
땅이 좁은 것은 고사하고 산이 동쪽에 기울어있어 궁궐을 서향으로 짓게 되니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 계는 정도전의 주장에 기울게 되었고 무학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무학은 항상 자기 의견을 먼저 내비치 지 않았다고 한다.
왕이 물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고 재삼 재사 물을 때 비로소 대답하되 『대 신들의 의견을 참작하소서』라는 단서를 붙였다 한다.
어쨌든 한양 정도문제에서 정도전이 무학에게 이긴 것 같으나, 곧 태종 방원에게 죽는 것을 보면 긴 안목으로 보아 무학이 이긴 것이다. 정도전은 광화문에서 태종에 게 칼 맞아 죽는데 너무 살이 쪄서 칼이 배에 꽃일 때 물통두들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무학이 주장했던 무악산 고개는 그 뒤 무학재(일명 무악재)로 바뀌어 두고 두고 무학이란 이름이 살아 남았다.
서대문에서 무학재를 넘으면 바로 홍제동 화장터로 가는 길이다.
이처럼 무학재는 학이 나는 고개가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 길목으로 무학대사의 패배와 한이 서린 고개였던 것이다.


정도전과의 싸움

한 양 정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움을 벌인 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힘겨루기였 다. 무학은 한양 정도 문제를 놓고 정도전에게 졌으나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제 두고 보시오. 2백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고 5백년 뒤에는 흉년이 들어 온 백성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정도 전이 이 소리를 듣고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사! 걱정하지 마시요. 남한에 보리가 있지 않소. 보리 먹 고 살면 배고프지 않을 겁니다』 했다.
무학의 예언은 적중했다. 2백년 뒤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한양을 유린했고 한말에는 백성들이 굶거나 배고파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나라까지 망했다. 무학의 눈은 정 확했다. 그러나 경복궁 자리는 학의 등에 해당하는 곳이라 궁궐을 지으면 이내 기둥이 쓰러지는 자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무학은 거듭되는 실패에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한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용문사로 가 는 도중 지금의 서울 전농동을 지나 가는데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는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소를 보고 『이 놈의 소가 무학이처럼 미련한 놈이구나』 했다.
이 소리를 듣고 무학은 농부에게 다가가서 『왜 무학 을 미련하다 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농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을 해보시오. 이 바닥에는 한양터가 학터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무학 하나만 모르고 학의 등에다 궁궐을 짓고 있으니 학이 날개를 펴고 퍼득 거리면 집이 무너지고 마는거요』 했다.
무학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 묻자 농부는 기가 막힌 다는 듯이 『이 양반아! 그걸 몰라요? 먼저 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학이 날개를 펴고 날 수 없게 된다 그 말입니다』 했다.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

이 농부는 사람이 아니라 둔갑한 삼각산 산신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궁궐을 지으면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삼각산이 노한 것 이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그뒤 삼각산과 목멱산(南山)에 국사당을 짓고 서울의 안녕질서를 빌게 되었다고 한 다. 국사당은 일제에 의해 헐린 채 지금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무학은 처음부터 이성계에게 한양천도를 권했으나 개성의 송악산에서 바라보면 북한산이 가로막아 『한양이 좋기는 하나 1천년 갈 것이 5백년밖에 못 가 게 되었구나』하면서 개탄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무학은 농부의 말을 듣고 서울로 되돌아섰다.그리고 즉 각 도성부터 먼저 쌓고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은 정도전이 다 설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렇 지 않았다. 일설에는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서대문 자리를 놓고 격돌했다고 전한다. 무학은 서대문을 무악재 고개 에 짓자고 주장했는데 정도전이 이를 반대하여 지금의 서대문 자리에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학은 또 다시 패배하면서 『5백년간 중(佛敎)은 힘을 못쓰게 되었구나. 선비(儒敎)들의 종노릇이나 하게 되었다』고 개탄했 다. 결국 조선왕조 5백년간 중은 서울 사대문 안에 들어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무학 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신임했다. 태조 2년(1393) 봄. 아직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 태조는 송도(開城)에 연복사를 지어 문수법회를 열며 무학을 초청했다. 무학이 와서 설법을 하고 태조가 친히 참석,설교를 들었다. 66세의 무학 은 그뒤 연복사에 머물면서 자주 궁안으로 불려가 태조를 뵙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수창궁에서 농담을 주고 받았 다 한다.

태조가 먼저 말했다.
『누가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를 해봅시다』
『대왕께서 먼 저 하시지요』
『내가 보니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어째서 스님은 같이 농담을 안 하시오』
『아닙니다. 농을 한 것입니다. 용의 눈에는 모두 용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말한것입니다.』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파안대소했다.

태조는 이듬해인 태조 3년(1394) 3월 무학대사의 출생지인 삼기현(三岐縣·지금의 합천)을 군으로 승 격시키고 작고한 왕사의 아버지에게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추증했다.
그뒤 무학은 다시 회암사로 돌아 가 도를 닦게 되는데 태조 4년(1395) 4월에 태조는 쌀과 콩 1백70섬과 오승포(五升布) 2백필을 무학에게 하사했 다. 그해 7월에는 내신(內臣)을 보내 모시 여러 필을 하사했다. 내신이 돌아와 왕사 무학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 하자 태조는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 치료케 하는 한편 태조 6년(1396) 7월에는 만일을 위해 미리 회암사에 대사 가 죽으면 사리를 안치할 부도(浮屠)를 세워 주었다.


함흥차사가 되어

왕자의 난 이 일어나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태조가 실망하여 함흥으로 떠났다. 그때 태종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온 갖 노력을 다하는데 보내는 사신(함흥차사)마다 죽어서 돌아왔다. 그때 누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무학대사를 보내면 능히 태상왕을 모셔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무학은 태종의 부탁을 받고 함흥에 갔다. 태조는 무학 을 보자 진노하면서 말했다.
『왕사까지 이러깁니까? 방원의 부탁을 받고 나를 보러 왔지요?』
무학 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다지도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빈도(貧道)가 전하를 한두 해 모셨습니까? 전하를 위로하러 머나먼 길을 걸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제서야 태조의 얼굴이 부드 러워지면서 같이 머물도록 허락했다. 수십일을 머무는 동안 무학은 단 한번도 태조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침묵 을 지켰다. 그러다가 하루는 밤중에 갑자기 태조에게 말했다.
『태종 방원은 진실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은 모두 죽고 방원 하나가 남았습니다. 만약 태종마저 버리신다면 전하가 이룩 해 놓은 대업(大業)은 장차 누가 맡겠습니가. 남에게 주느니 차라리 하나 남은 피붙이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 아 니겠습니까. 세 번 생각하여 주십시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태조는 그만 『왕사의 말씀이 옳습니 다』고 승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태조는 서울로
곧장 가지 않고 두 달 동안이나 소요산에서 묵은 뒤 서울 로 행했다.
태조는 무학의 설득으로 환도하게는 되었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것이 다.
태종이 교외에 까지 나아가 태조를 맞이하려는데 하륜이 태종에게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가라앉 지 않았을 것이오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차일과 장막을 받치는 기둥을 굵게 세우도록 하소서』 라고 조언했 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하륜은 열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으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곤 룡포를 입고 기다리는 아들 태종의 모습을 본 태조는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와 활(동궁)을 힘껏 당겨 화살(백우 전)을 쏘았다. 태종은 급히 기둥뒤로 숨었는데 화살은 탁 소리를 내며 기둥에 꽂혔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러나 이것을 본 태조는 껄껄 웃으면서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거지』 하면서 옥새를 내놓았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옥새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
이어 성대한 축하연회가 베 풀어졌는데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헌수(獻壽)하게 되었다.
그때 하륜이 다시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잡고 술을 부으시고 아버님에게 잔을 올리실 때 전하께서 친히 올리지 마시고 내시를 시켜 잔을 드리게 하소서』 했다.
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내시를 시켜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술잔을 받아 마시 고 나서는 웃으면서 옷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쇠방망이를 내어 놓으면서 『모두가 하늘이 시킨 것이다』 하였다 는 것이다. 태조는 쇠방망이로 아들을 치려 했던 것이다.

무소유의 사상

무학은 태조가 말한 것처럼 돼지처럼 생기고 돼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는 소유(所有)를 싫어했다. 무엇이든지 남은 것이 있으 면 갖지 않고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무학은 또 글쓰기를 싫어했다. 그의 사상은 너무 심오 하여 글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은 물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사는 말로 제자 를 가르치지 않고 침묵으로 가르치는 법이어서 행위 그 자체가 진리요 도(道)였다. 그래서 그는 늘 『갓난 어린 아이의 행동이 제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학은 말년에 회암사에서 금강산으로 옮겨가 진불암에 오 래 머물렀다. 태종 5년(1405) 무학이 78세 때 가벼운
병을 앓게 되었는데 제자가 정성들여 약을 달여드리 자 『나이 80에 병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약은 무슨 약』
하며 거절했다.
그 해 4월 금장암으로 옮 겨 사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니 그리 알아라』 했다.
한 제자가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으니 무학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또 물었다. 『스님이 병중이신데 도대체 병은 누가 만들어 낸 것입니까』 무학은 또 손을 가로 저으면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다. 『육신은 결국 썩어 없어지는데 없어지지 않는 진법신(眞法身)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무학은 그때 두 팔을 뻗으면서 『바로 이것이다』고 하더니 이내 입적하였다 한다. 향년 79세. 무학은 역시 무학(無學)이었나 보다. 아는 척만 하는 모든 후학들에게 무학의 겸양을 가르쳐 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제자와 나눈 문답을 후에 사람들 은 무학사상의 총결산이라고 평했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 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했다. 회암사에는 앞서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지금 경기도 양주 군 회천면 회암리에는 넓고 큰 절터만이 그 옛날 태조와 무학의 고사를 증언하며 쓸쓸히 방치돼 있다. 무학이 예 언한대로 아직도 불교는 5백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 회암사 절터에는 아름다운 무학의 부 도(보물 388호)가 남아 있고 인도승 지공(指空)과 나옹선사의 승탑(僧塔)이 무성한 잡초에 싸여 절터를 지키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승려.
무학()·계월헌()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삼기(:)
주요저서 《불조종파지도()》
주요작품 《인공음()》
본문

속성 박(). 호 무학()·계월헌(). 삼기(:) 출생. 18세에 소지선사()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 길상사(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과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에서 낙성회()를 연 때 수좌()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 《인공음()》이 있다.

 

<무학대사가 잡아준 耘谷(운곡) 元天錫(원천석) 의 묘:원주 판부면>이야기

무학대사(1327년고려충숙왕14년생)
통정(通亭)강회백(1357년 공민왕6년생):연화부수형 명당: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의 묏자리도 무학대사가 잡아 주었다.

“耘谷(운곡)[元天錫(원천석)의 호]은 어느 것을 원하시오?
재물과 벼슬이 후손들에게 넉넉하기를 바란다면, 의당 그곳 만대 영화지지요.
다만,그저 탈없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면 앞에 보이는 봉요혈(蜂腰穴)이 적격이요.“
“봉요혈”,이를테면 벌의 허리에 해당하는 혈자린 것이다.
금방 끊어질 듯 가늘지만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진혈의 허리다.

후손중에 똑똑한 인물이 나와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고,그저 순탄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원주원씨 중시조 원천석 이다.

혈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뜻밖에도 무학대사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개요에 있다.
원천석은 고려의 인물이다.고려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탄식하며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공양했다.
고려왕조가 망하자,그의 뒷담을 끼고 돌아보듯 쇄망을 나귀의 말발굽으로 짚어가며 한수 시를 읊조린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조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그런데,흥미로운 것은 무학대사와의 만남이다.어떻게 조선의 왕사가 고려의 충신과 한자리에서 앉아 있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운곡 원천석의 행동 때문인 것이다.
일찍이, 이방원(태종)은 왕자시절 운곡 원천석에게 글공부 가르침을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즉위한 後 중임을 하려고 원주에 자주 찾아 왓으나,그때마다, 산속으로 몸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왕은 계곡에 있는 바위에 올라앉아 집을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돌아갔다.

훗날 그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운곡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忠義)였음을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짐작 할 수 있다.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최영장군을 기리는 것과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이를테면,그들이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면,왜 일직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의 힐문이었다.

치악산에 은거하면서,운곡은 여섯권의 야사를 집필했다,
죽음에 임하여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것을 가묘에 잘 간수하도록 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유언은 지켜졌으나,증손자때에 책의 내용을 살피다가 혼겁하여 태워버렸다고 한다.
여차하여 그런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조정에서 알게되면 멸문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다.
바꾸어 생각하면,돌함(石函)에라도 넣어서 길이길이 가전비보로 전해 주었다면 얼마나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까.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무학대사와는 세살터울 아래이며,나옹화상과는 열 살 차이가 난다.

“고려사”에의하면,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등과 모두 금문책(金門策 :과거)을 꿰뚫은 동문들이다.

치악산에 들어간 것은 이성계가 위하도 회군할 무렵이었다.그는 정치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그가 누워 있는 묏자리는 특별한 무학대사의 선물인 것이다.

묏자리가 선방위가 풍수법상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무학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선택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 준다.
형국으로는 포은 정몽주나 목은 이색의 산소보다 국세를 잘 맞추어 있으며,특히,사세가 일품이라고 풍수사들은 입을 모아 칭찬한다.백호 줄기의 산에 올라서 “봉요혈“을 내려다 보면 마치 한 마리 벌이 꿀을 따먹기 위해 꽃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다.조화치고는 너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운곡 원천석은 강원도 횡성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 되어 있다.조선초의 은사(隱士)였다.


내용출처 : [기타] (풍수지리로 보는 가문이야기 책에서)


효종의 북벌론이 실패한 까닭
중공(中共)의 한국전쟁 참전원인


― [무학대사가 잡아준 耘谷(운곡) 元天錫(원천석)의 묘:원주 판부면 ]이야기
고려왕조계보와 조선왕조 계보
선조수정실록의 허구성과 역사왜곡의 증명

(출처 : '[무학대사가 잡아준 耘谷(운곡) 元天錫(원천석)의 묘:원주 판부면 ]이야기' - 네이버 지식iN)


무학대사는 책에서 한양을 도읍지로 정할때 무학대사가 돌아다니면서 도읍지를 찾아 다녔다고 하는거, 맞습니다.
하지만 좀 정확히 써드리겠습니다.

태조 이성계 젊은시절.
이성계가 꿈을 꿨다.
그 꿈은 이성계가 어딘가 서있는데 도사가 홀연히 나타나
쇠꼬치를 이성계 몸 3곳에 껴논 꿈이었다.
이런 꿈도 있을까 하고 생각한 이성계는 산에서 도를 닦는다는 무학대사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자신의 꿈 풀이를 해달라고 했다.
무학대사는 깜짝 놀라며 이성계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성계가 놀라며 말했다.
"왜 저에게 절을 하십니까?"
무학대사가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꿈풀이를 해주겠소.
당신의 몸에 쇠꼬치 3개를 꽂았다는건 임금 왕(王)이 된다는 뜻이오...
절대 누설하지 마시오.
그 꿈이 틀어질수도 있으니."
그 해몽은 꼭 들어맞았다.
1392년 고려가 멸망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왕이 되었다.
이성계는 왕이 되고 잠을 잤다.
그런데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자가 나타나 눈을 무섭게 뜨고 이성계를 노려보았다.
"네 놈이 우리 자손을 모두 죽였으니 어찌 원한이 없으리오!"
이성계는 꿈에서 깨어났다.
"분명 그자는 왕건일거야...
안되겠다. 도읍지를 옮기자!"
안그래도 조선 백성들은 도읍지가 그대로 고려의 땅이라고
흉흉한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꿈풀이를 해준 무학대사는 태조의 명을 받들어
도읍지를 찾아떠났다.
그런데 딱 좋은 도읍지가 발견되었다.
계룡산이었다.
태조는 그곳을 도읍지로 정했는데
꿈에서 신선이 나타나 태조에게 말했다.
"이곳은 도읍지로 적합하지 못하니 딴곳으로 옮기거라."
그래서 도읍지 공사는 중단되고 무학은 또 도읍지를 찾으러 갔다.
무학은 그 당시 고려때는 별볼일 없던 한양을 도읍지로 하자고 주장했다.
태조는 한양을 도읍지로 건설했다.
도읍지가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태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도읍지가 완성됐으니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터봅시다."
고하를 막론한다는것은, 한마디로 벼슬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말튼다는 건, 아무리 높아도 농담을 할수 있다는 뜻이다.
태조가 농담거리로 무학에게 창피한 말을 했다.
"오늘 무학대사를 보니, 꼭 돼지같아 보이오."
무학대사는 무안했고, 대신들은 껄껄 웃었다.
무학대사는 그러나 태연한 척하며 이성계에게 말했다.
"전하께선 꼭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
태조가 말했다.
"과인은 무학을 돼지라고 했는데 왜 무학은 과인을 부처라고 하는것인고?"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껄껄 웃었다.

이처럼 무학은 훌륭하고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좋은 답변 되시길 바랍니다.

(출처 : '무학대사가뭐에요?' - 네이버 지식iN)
조선을 세우기 전부터 무학대사가

조선이 앞으로 숭유억불정책을 세울거라는 걸 알았을까요?

무학대사가 예언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려 말기에 혼란스러운 때

나무아들이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한문으로 쓰면 木子得國 (목자득국)이라고 하는데

木에 子를 더하면 李(이)가 되지요.

곧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되는데,

그때, 이성계가 사람들로부터 거론이 된것이고,

그런 민심과 정도전, 조준, 남은 같은 개혁파 인물들의 힘을 받아서

이성계가 고려를 몰아내고 조선을 세운 것입니다.

木子得國이야기 같이, 민심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를 참요라고 하는데,

서동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도성 아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부르게했다는

서동요같은것도 참요중에 하나지요.

잠시 샛길로 빠졌군요... 아무튼..

설령 이성계가 왕이 되어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쓰리라는 것을 알았어도

무학대사가 협조 했을 겁니다. 그 당시 이성계가 왕이 될거라는 것은 알게모르게

사람들에게 참요로써 널리 퍼졌고, 민심이 그러 했으니까요.

조선이 기본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세조같은 왕같은 경우는 불교를 극진히 숭상했다고 합니다...

(출처 : '무학대사는 스님이면서 왜 조선을 세우는데 찬성하였을까요?' - 네이버 지식iN)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무학대사와 이성계이야기


고려가 국운이 쇠퇴하여 쓰러져가고 있을 즈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뜻을 품고 팔도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제사를 행하고, 신불의 가호와 허락을 받고자 다녔는데 곁에는 항상 무학대사가 동행하였다. 그런데 팔도 명산의 산신령들이 모두 좋다고 허락을 하였는데, 유독 회문산의 산신령만이 건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학대사와 더불어 상의한 끝에 ‘회문산 만일사’에서 백일제를 지냈는데, 백일이 되던 날 밤 꿈에 산신령이 현신하여 말하기를,


"네 정성이 가상하여 눈감아 주되, 대사를 도모할 천시가 아니므로 백성 없는 왕이 될 것인즉 이 절에 천일향을 시주하고 백성을 다스리지 말고 섬기도록 하여라"하였다 한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럴 것이 천일향 쯤 시주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도대체 천시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백성을 다스리지 말고 섬기라 하니, 대체 어떻게 해야 섬기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 출처 : 중앙승가대학교 총동문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