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의 향기

현대 한국불교 최고지도자 고암스님

마음정원(寂光) 2011. 11. 7. 09:42

현대 한국불교 최고지도자 고암스님
"困果는 분명한 법…조심해서 살거라"
고암 스님

현대 한국불교의 고승인 고암(古庵)의 본관은 양주 윤씨이다. 어릴때 이름은 지호(志豪)였으며, 법호가 고암이고, 법명은 상언(祥彦)이며, 자호는 환산(歡山)이다. 고암은 1899년 10월 5일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서 아버지 문과 어머니 정원행(鄭原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9세부터 12세 때까지는 서당에서 한한을 익혔고, 13세에는 적성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15년 여름 우연히 행각승을 만나 회룡사에서 하룻밤을 묵은 인연으로 화계사에서 수개월간 머물렀다. 고암은 1916년 가을 서울 사동 포교당에서 설법하던 용성(龍城)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망월사에 갔다가, 이듬해 7월 해인사에서 제산(霽山)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그후 고암은 화장사(華藏寺)에서 동안거를 했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화장사 대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심원사, 석왕사, 신계사, 건봉사, 유점사, 마하연사, 표훈사, 신흥사, 불영사, 고운사 등지에 머물면서 선 수행과 교학공부를 겸했다.

 


1920년 봄에는 통도사 극락암에서 혜월 화상을 친견하고 좌선에 몰두했다. 1921년 고암은 망월사에서 열린 용성 선사의 선회(禪會)에 참석했고, 서울 대각사에서 사교(四敎)를 배웠다. 1922년 봄에는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했고, 8월에는 문경 대승사, 금룡사, 용문사 등을 거쳐 해인사로 가서 용성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예산 정혜사로 가서 만공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으며, 이듬해는 백양사 운문암에서 용성 선사의 지도아래 동산, 석암, 금포 등과 함께 정진했다. 이때 고암은 오후불식과 묵언정진을 했으며, 특히 전강선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후에도 그는 직지사, 수도암, 지리산 칠불암, 망월사, 천성산 내원사 등지에서도 묵언하면서 용맹정진했다.

 


이처럼 각처 선원에서 치열하게 정진을 계속하던 고암은 내원암에서 정진하던 무렵 첫 깨달음의 희열을 경험하고 선정삼매는 항아리 속의 일월과 같고(禪定三昧壺中日月), 시원한 바람이 부니 가슴 속엔 근심이 없네(凉風吹來胸中無事) 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한편 고암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정진할 때, 그는 선방에서 제법 알아주는 고참 납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암은 누구나 기피하는 공양주 소임을 자청하여 궂은 일을 도맡아 했으며, 엄동설한에도 대중들의 신발을 남몰래 깨끗하게 닦아놓고 새벽이면 세숫물까지 데워 주었다.

 


1938년 여름 고암은 내원사 천성선원에서 용성선사 지도를 받으며 정진하다 문득 새로운 세계가 열려짐을 느껴 법거량을 청했다. 용성이 “조주(趙州) 무자(無字)의 열가지 병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고암은 “다만 칼날 위의 길을 갈 뿐입니다(但行劍上路)”라고 답했다.
이에 용성이 다시 “세존이 영상회상에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신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고암이 “사자 굴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 없습니다(獅子窟中無異獸)” 라고 답했다. 다시 용성이 “육조스님이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고암은 지체없이 일어나 세 번 절을 한 뒤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습니다(天高地厚)” 라고 답했다.
마침내 용성은 제자의 견성(見性)을 인가하고, 만고에 풍월을 아는 자 누구인가(萬古風月知音者誰), 고암을 독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古庵獨對風月萬古) 라고 읊고 법호를 지어주었다.

 


이후 고암은 1939년부터 해인사, 백련사, 표훈사, 직지사, 범어사 등지의 선원에서 조실을 역임했다. 1944년 2월에는 해인사에서 대선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1945년 10월에는 나주 다보사 선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고암은 1954년까지 10여년 동안 전국 각지와 제주도에서 포교에 전념했다.

 


또 고암은 용성 선사로부터 율법을 전해 받았고, 제산과 한암의 율맥도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 전수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각처에서 보살계를 설했다. 1952년에 고암은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1955년 8월에는 마산 성주사 주지로 취임했다. 1958년 9월에는 직지사 주지로 취임하여 교단정화운동에 비구측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로 취임했고, 대처승측의 사찰 재탈취 기도에 맞서 제주도 지방을 담당해 적극 활동했다. 고암은 사찰의 주련을 한글로 쓰고 선원에 스님과 일반 신도들이 함께 수행하도록 했다. 그는 평소에도 기도와 송주를 많이 했는데, 목에는 언제나 108염주가 걸려 있었고 앉으면 늘 염주를 돌렸다.

 


1967년 7월 고암은 대한불교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되었으며, 1972년 7월 제4대, 1978년 5월 제6대 종정을 역임했다. 그는 신년법어, 부처님 오신날 법어, 하안거와 동안거 결제와 해제 법어 등을 통해 불법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에 힘썼다. 특히 그는 보살계산림, 군불자포교, 해외포교 등에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진력했다.
고암은 인간정신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원각경’을 인용하여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청정해진다(心淨卽國土淨)”는 법문을 자주 했다. 또 그는 “본래 참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세계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으며, “금가루가 귀한 것이지만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는 법문도 즐겨 했다.

 


한편 고암은 신도들이 특별한 예물을 공양하면 얼마뒤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언제나 빈손이었다. 그리고 평생 옷이 두벌 밖에 없었으며 만년까지도 손수 빨래해서 입었다.
고암은 1980년 2월 용성 대종사 문도들의 모임인 용성문장(龍城門長)이 되었으며, 5월에는 신임 총무원장 월주에게 종단 사무를 인계하고 3년동안 끌어오던 종단 불화사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암은 종정직을 사임한 후 제자 대원이 하와이에서 해외포교에 나서자 그곳에 가서 머물렀다. 이때 고암은 손수 공양을 지어 마지를 올리고 대중에게 공양하는 수행자의 본분사를 여실히 행했으며, 한달에 대여섯 번 법문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또 그는 1985년 3월에는 인도와 동남아 여러나라를 전법 순력했으며, 7월에는 호주에서 국제보살계단 전계사로 법을 설했고, 유럽과 미국도 방문해 그곳의 한인불자를 위해 보살계를 설했다.

 


1988년 미국 산호세에 있는 한국 사찰에 설법하러 가다 일어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앓다가 귀국한 고암은 10월 25일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가야산에 단풍이 짙게 물들었으니(伽倻山色方正濃), 이제 천하는 가을이로다(始知從此天下秋), 상강이라 낙엽지면 뿌리로 돌아가고(霜降葉落歸根同), 구월의 보름달은 허공에 빛나네(菊望月照虛空)’라는 임종게와 “조심해서 살거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과는 분명한 법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0세, 법랍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10월 29일 종단장으로 영결식을 봉행하고 연화대에서 다비하니 영롱한 사리 16과가 나왔다. 이듬해 문도 70여명이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고암은 평생을 자비와 겸손으로 일관했으며, 인자한 성품과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행(下心行)을 실천한 고승이었다. 또 그는 맑고 깨끗한 삶을 산 큰 스님으로서 천진하고 순박한 모습에 항상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자비보살이었다. 특히 고암은 한 곳에 6개월 이상 머물지 않고 늘 만행하면서 설법과 교화에 전념한 위대한 율사이자 선객이었으며, 3번이나 종정을 역임한 한국 현대불교사의 최고지도자였다.

 


김 탁〈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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