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스크랩] 실제적인 위빳싸나 수행방법

마음정원(寂光) 2011. 9. 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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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적인 위빳싸나 수행방법

Practical Vipassanā Meditational Exercises

 

1. 위빳싸나 수행의 기초적인 이해

 

위빳싸나 혹은 통찰 수행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신체적(물리적) 현상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물리적) 현상이란 우리 주변에서 분명하게 지각된 사물이나 대상을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몸 전체란 한 덩어리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적인 현상이란 의식작용이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마다 생겨남이 분명히 지각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관찰하여 매번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봄, 봄’,‘들음, 들음’,‘냄새, 냄새’,‘맛, 맛’,‘닿음, 닿음’, 또는‘생각, 생각’이라고 주시해야만 한다.

 

(1)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수행 초기에는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을 주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분명하고 쉽게 지각되는 것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할 때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이 운동은 항상 분명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풍대 (風大: Vayodhātu, 동적 요소)로 알려진 물질적인 특성이다. 누구나 이 움직임을 의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배를 유심히 관찰하는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불룩해지고‘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하고, 배가 꺼질 때는‘사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해야 한다. 만약 움직임이 분명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인지할 수 없으면 손바닥은 배에 대면된다.

 

숨 쉬는 법을 바꾸지는 말아야 한다. 천천히 혹은 빨리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너무 깊이 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숨쉬는 방법을 바꾸게 되면 쉽게 지친다. 꾸준히 평상시대로 호흡하면서 있는 그대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주시하면 된다. 주시할 때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다.

 

위빳싸나 수행에서는 당신이 뭐라고 이름 짓고 말하든 상관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알고, 느끼는 것이다. 배의 일어남을 주시할 때에도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치 눈으로 그것을 보듯이 주시해야 한다. 배가 꺼질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움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인식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한다. 움직임과 움직임에 대한 정신적인지는 마치 표적을 맞추려는 돌처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배가 사라지는 움직임도 이와 같이 한다.

 

(2) 마음에 대한 관찰

배 움직임을 보는 동안 마음이 다른 곳을 방황하게 되는 수가 많다. 이럴 때에 또한‘방황, 방황’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한다. 한 번 혹은 두 번 주시되면 마음이 방황하는 게 멈춘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만약 마음이 어느 곳으로든지 가면‘감, 감’이라고 주시하고,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만나면‘만남, 만남’이라고 주시한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는 상상을 할 경우‘말함, 말함’이라고 주시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생각이나 회상이 일어나면 꼭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하고 있으면‘상상’이라고 주시하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생각’이라고, 계획을 하고 있으면‘계획함’, 자극을 느끼면‘느낌’, 회상하고 있으면‘회상’,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이라고, 싫증이 나면‘싫증’, 기쁘면‘기쁨’, 낙담하고 있으면‘낙담’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한다. 이렇게 모든 의식행동을 인식하는 것을 심수관(心隨觀 : cittānupassanā) 이라고 한다.

 

이렇게 의식행동을 주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한 사람 혹은 개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아는 (지각하는) 것이 바로‘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개인이 있어 살고 생각해 온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개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단지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의식행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인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의식행동이 매순간 일어날 때부터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주시하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3) 느낌에 대한 관찰

수행자가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앉아 있으면 뻣뻣한 느낌과 열기가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 역시 신중하게 주시되어져야 한다. 아픔이나 지루함 역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감각들이 고수(苦受 : dukkhavedanā 불 만족감)이며,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수수관(受隨觀 : vedanānupassanā) 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모두 다 인식하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나는 굳어있고, 열이 나고, 아프다. 좀 전에는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이제는 불쾌한 감각들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감각’과‘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개입되는‘나’란 없다. 단지 새로운 불쾌한 감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연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계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전기충격이 이어짐으로써 전등을 켜는 것과 같다. 매순간 몸에서 불쾌감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그것이 뻣뻣하거나, 덥거나, 아픔이 되었거나 간에 신중하고, 진지하게 주시되어야 한다. 실제 수행의 초기에는 이러한 감각이 강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싶은 욕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주시되어야만 하고, 이후에 수행자는 다시 뻣뻣함, 더움 등의 감각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내심이 열반으로 인도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수행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수행 중에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몸이 뻣뻣해지거나 열이 난다고 자주 움직이고 자세를 너무 자주 바꾸면 삼매(samādhi: 좋은 집중력)를 계발하기 어렵다. 삼매를 계발하지 못하면 통찰력을 얻기 어렵고, 이와 더불어 도(道: magga, 열반에 이르는 길)와 과(果: pjala, 이 길의 결과 ․ 열매)와 열반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에 있어서 인내심은 필수적이다. 몸이 경직되고, 열이 나고, 아프고, 참기 어려운 것과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불쾌한 감각도 잘 참아야 한다. 수행 중 그러한 감각이 일어나자마자 수행을 포기하거나 자세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참고 계속해서‘뻣뻣함, 뻣뻣함’혹은‘더움, 더움’등으로 즉시 그것을 주시해야(알아채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으면 이런 종류의 보편적인 감각들은 사라지게 된다. 집중력이 잘되고, 섬세하면 강한 감각들조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면 곧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물론 이러한 감각을 오랫동안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참을 수 없게 되면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이때에는 먼저‘자세를 바꾸려고 함, 자세를 바꾸려고 함’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만약 팔이 올라가면‘올라감, 올라감’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며‘올라감, 올라감’,‘움직임, 움직임’그리고‘닿음, 닿음’등으로 계속 주시해야 한다.

 

만약 몸이 흔들리면,‘흔들림, 흔들림’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또 발을 들면‘듬, 듬’, 움직이면‘움직임, 움직임’놓으면‘놓음, 놓음’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만약에 변화가 없으면 비록 잠깐 쉬는 동안에라도 다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사이에 잠깐이라도 틈이 생겨서는 안 된다. 앞서 주시한 행위와 앞으로 할 행위 사이에는 틈이 없이 계속 연결되어야 한다. 앞선 삼매(Samādhi: 집중상태)와 다음 삼매는 틈이 면밀히 연계되어야 하고, 앞선 지적행위와 다음에 이어지는 지적행위는 빈틈없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 오로지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지적상태가 성숙된 단계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도(道: magga)와 과(果)의 지(智)(Phala-nana: 길에 대한 지식과 그 열매)는 이러한 순간이 계속 모아질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명상 과정은 두 개의 나무토막을 계속 힘을 다해서 불꽃을 일으킬 때까지 쉴 새 없이 부벼대야만 필요한 열을 얻어서 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위빳싸나 수행에서의 주시도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든지 간에 각 관찰행동 사이에 잠시도 빈틈이 없이 꾸준히 계속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가려움증이 생기면 참기 어렵기 때문에 수행자는 곧 긁고 싶어 한다. 이때에는 긁어서 곧바로 가려운 감각을 없애 버리지 말고, 가려운 감각과 이 감각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이 주시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긁으면 가려움증이 없어지는 것도 관찰해야만 한다.

 

만약 가려운 곳을 긁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서 주시하면 가려움증은 일반적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다시 곧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해야 한다. 만약 주시를 해도 가려움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물론 긁어서 가려움증이 없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망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감각을 없애고자 하는 과정에 포함된 모든 움직임은 주시되어야 한다. 특히 닿고, 잡아당기고, 밀고, 긁는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며, 종국에는 배의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관찰로 되돌아 와야 한다.

 

 

2. 자세를 바꿀 때의 관찰

 

매순간 자세를 바꿀 때도 우선 바꾸고자 하는 의도나 욕망을 먼저 관찰한 다음 계속해서 각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앉은 자세에서 일어나거나 팔을 들거나 움직이고 펴는 모든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동작을 주시함과 동시에 자세를 바꿔나가야 한다. 몸이 앞으로 움직이면 그것을 주시한다. 일어날 때는 몸이 가벼워지면서 일어선다는 것도 알아채야 한다. 이러한 것에 마음을 집중시킬 때에는‘일어섬, 일어섬’이라고 신중하게 주시한다.

 

수행자는 마치 중병환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쉽게, 빨리,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중병환자는 매우 천천히 신중하게 행동한다. 이와 같이 허리가 아픈 환자도 허리를 다치거나 통증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아주 신중하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명상수행자도 그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아주 점진적이고 신중하게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집중이 잘되고 통찰력도 좋아진다. 그러므로 아주 느리게 서서히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일어날 때는 마치 환자처럼 행동하고, 동시에‘일어섬, 일어섬’이라고 주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눈에 무엇이 보여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수행 중에 수행자의 관심은 오로지 주시하는 것에만 집중되어야 한다. 보고 듣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괴상하고 충격적인 어떠한 것을 보고 들어도 못 보거나 못들은 척하고 오로지 신중하게 주시만 해야 한다.

 

 

3. 경행시의 관찰

 

몸을 움직일 때에도 중병환자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신중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구부리고, 펴며,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린다. 이런 모든 움직임은 천천히 진행되어야 한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도 매우 천천히 해야 하며,‘일어섬, 일어섬’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반듯이 서면‘서있음, 서있음’이라고 주시한다. 여기저기를 쳐다볼 경우‘쳐다봄, 봄’이라고 관찰한다. 걸을 때는 발걸음을 주시하며 오른발을 들었는지 왼발을 들었는지를 관찰한다. 발을 들어서 놓을 때까지 개입되는 연속적인 움직임을 모두 알아차려야만 한다. 오른발로 걸었는지 왼발로 걸었는지 각각 나가는 발자국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이 빨리 걸을 때 주시하는 방법이다.

 

빨리 걷거나 약간 먼 거리를 걸을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시하면 그것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걷거나 Cankama 걷기(위 ․ 아래 걷기)를 할 때에는 각 걸음을 세 단계로 관찰해야 한다. 발을 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는 것이 그것이다. 우선은 들고 놓는 것부터 관찰한다. 발을 드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채야만 한다. 이와 같이 발을 놓을 때에는 발이‘무겁게’내려가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채야만 한다.

 

각 걸음마다‘듦, 놓음’을 주시하며 걸어야 한다. 이틀쯤 지나면 이렇게 주시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때부터 비로소 위에서 언급한‘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음’이라는 세 가지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오로지 하나 혹은 두 가지 움직임만을 보기가 쉽다. 그러므로 빨리 걸을 때는‘오른발, 왼발’, 천천히 걸을 때는‘듦, 놓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걷다가 앉고 싶을 때에는 우선‘앉고 싶어 함, 앉고 싶어 함’이라고 주시한다. 그리고 실제로 앉을 때에는 몸이‘무겁게’내려가는 것을 면밀히 관찰한다.

 

일단 앉으면 다리와 팔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하는 움직임을 주시한다. 만약 그런 움직임이 없고 몸이 단지 고요하다면(정지 상태에 있다면) 곧 배의‘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한다. 배의‘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도중에 무릎이 뻣뻣해지고 몸의 어딘가에서 열이 난다고 느끼면 계속해서 이들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의‘일어남,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주시하는 도중에 눕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이것을 주시한 후, 누울 때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팔을 들어올리고, 움직이고,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몸을 움직이고, 다리를 펴고 눕기 위해 몸을 기울이는 등의 모든 움직임이 주시되어져야 한다.

 

이렇게 누울 때 주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움직임(즉, 눕는 것) 도중에 확실한 지식(magga-ñāna와 phala-ñāna, 길과 그것의 결과의 지식)을 획득할 수도 있다. 삼매(집중)와 지혜(통찰력)가 강하면 확실한 지식은 어느 순간에든 나타날 수 있다. 단순히 팔을‘구부리거나’,‘펴는’도중에 나타날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아난다(Ānanda) 존자도 아라한이 되었다.

 

 

4. 아난존자의 경행정진

 

아난다 존자는 제1차 불교도회의(경전결집회의) 바로 전날 밤에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정진하고 있었다. kāyagatāsati로 알려진 일종의 위빳싸나 수행을 밤을 새워 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주시하고, 오른발 왼발, 을 관찰하며, 들어서, 앞으로 내밀어, 놓는 움직임과, 걷고자 하는 욕망과 걷는데 따르는 모든 일어나는 순간순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거의 새벽이 다 되도록 계속하였지만 그는 아라한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걷기 수행을 너무 많이 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삼매(집중)와 정진(Viriya, 노력)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잠깐 동안 누워서 명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방에 들어가서 침상에 앉은 다음 몸을 눕혔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도 그는‘누움, 누움’을 관찰하였으며, 순간 그는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아난다 존자가 눕기 전에는 단지 수다원(Sotāpanna, 예류자(預流者) 즉, 승리자의 대열에 낀 분, 열반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에 이른 분) 이었다. 수다원위(Sotāpannahood : 예류위(預流位))에서 수행을 계속함으로써 사다함(Sakadāgāmihood, 일래위(一來位) 즉, 한 번 되돌아오는 자의 상태, 혹은 길(道)의 두 번째 단계를 이룬 분), 아나함(Anāgāmihood, 즉 되돌아가지 않은 상태, 길의 세 번째 단계를 이룬 분)과 아라한(Arahatship, 즉 길의 마지막 단계를 이룬 성스러운 분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보다 높은 세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잠깐 사이였다. 아라한에 이른 아난다 존자의 예를 생각해 보라. 이러한 성취는 어떠한 순간에라도 찾아올 수 있으며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5. 잠자기 전후의 관찰

 

그러므로 수행자는 매순간 부지런히 주시해야 한다. 주시를 늦추지 말고“이렇게 잠깐인데 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눕는 데 관련되는 모든 움직임과 팔 다리를 가지런히 하는데 따르는 모든 움직임은 신중하고 면밀하게 주시되어져야 한다. 움직임이 없고 가만히 있을 땐,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늦어져서 잠잘 때가 되어도 금방 잠들지 말고 계속 관찰을 놓지 말아야 한다.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인 수행자는 잠을 전혀 안 잘 듯이 마음 챙김에 전념해야 하며, 잠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 수행하여야 한다. 만약 수행이 잘되고 우세하면 잠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편 졸음이 우세하면 잠에 떨어진다. 졸음이 오면‘졸음, 졸음’이라고 주시해야 하고, 만약 눈꺼풀이 내려오면‘내려옴,’무겁거나 둔해지면‘무거움’, 만약 눈이 쿡쿡 쑤시면‘쑤심’이라고 주시한다. 이렇게 졸음은 가시고 눈은 다시 맑아질 것이다.

 

수행자는 그때‘맑음, 맑음’이라고 주시한 후 계속해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한다. 어쨌든 수행자가 끈기 있게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졸음이 올 때 잠에 떨어지게 된다. 잠에 떨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매우 쉽다. 누워서 수행을 하다보면 점점 졸리고 마침내 잠에 떨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초보자는 누운 자세로 너무 많이 수행해서는 안된다. 되도록 앉거나 걷는 자세로 훨씬 더 많이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지고 잠잘 때가 되면 누운 자세에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면서 수행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잠이 들 것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자는 시간은 휴식시간이다. 그러나 아주 진지한 수행자는 잠자는 시간을 네 시간 정도로 제한한다. 이것은 한밤중 시간으로 부처님에 의해 허용된 시간이다. 네 시간만 자면 충분하다. 초보자가 네 시간만 자는 게 건강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으로 늘릴 수 있다. 여섯 시간의 수면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분명코 충분하다.

 

수행자가 잠에서 깨어나면 곧 바로 관찰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진정코 도지(道智: magga-ñāna)와 과지(果智: phala-ñāna)에 이르고자 라는 수행자는 잠을 잘 때에만 쉬어야 한다. 그 외의 시간, 깨어있는 순간에는 계속해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주시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깸, 깸’이라고 그의 마음이 깨어난 상태를 주시해야 한다. 만약 아직 이러한 상태를 알아차릴 수 없다면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만약 잠자리에서 일어나고자 하면‘일어나려고 함, 일어나려고 함’을 주시한다. 그 다음엔 계속해서 팔과 다리를 조정하기 위해 하는 모든 변화하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인식한다. 머리를 들고 일어설 때는‘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주시한다. 앉을 때는‘앉음, 앉음’이라고 주시한다. 팔과 다리를 조정할 때 움직임이 변화하면 움직임은 또한 주시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움직임이 더 이상 없고 단지 조용히 앉아 있게 되면,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세수를 하거나 목욕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시한다. 이러한 행위에 개입되는 모든 움직임들이 다소 빠르게 진행될지라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옷을 입고 잠자리를 치우는 행위나 문을 열고 닫는 행위들도 모두 가능한 한 매우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6. 식사시의 관찰

 

식사를 할 때 밥상을 바라보면서도‘바라봄, 바라봄’이라고 주시해야 한다. 음식을 향해 팔을 뻗치고, 음식에 손이 닿아서 모으고 조정해서, 들어서 입에 가져오며 고개를 숙이고 음식물을 입에 넣고, 팔을 내리고 고개를 다시 드는 이런 모든 움직임들은 그때그때 주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주시법은 미얀마식 식사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포크나 숟가락, 또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움직임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씹을 때는‘씹음, 씹음’이라고 주시하고, 음식의 맛을 알게 되면‘앎, 앎’이라고 주시한다. 음식의 맛을 느끼고 삼켜서 음식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이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주시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음식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들 때마다 매순간 주시한다. 국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팔을 뻗쳐서 숟가락을 잡고 뜨는 등등의 모든 움직임들이 주시되어야 한다. 식사시간에는 관찰하고 주시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주시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초보수행자는 주시해야 할 것을 몇 가지씩 놓치기가 쉽지만, 처음부터 모두 다 주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초보수행자가 빠뜨리고 보거나 몇 가지를 놓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그의 삼매가 강해지면 이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면밀하게 주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7. 수행의 진보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수행자가 주시해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요약해보면 주시해야 할 것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빨리 걸을 땐‘오른발, 왼발’을 주시하고, 천천히 걸을 땐‘들어서, 놓음’을 주시한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는 단지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한다. 특별히 주시할 것이 없다면 누워 있을 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주시한다. 이렇게 주시하는 동안 마음이 방황한다면 일어나는 의식행위를 주시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또한 몸의 뻣뻣함이나 고통, 아픔, 간지러움 등의 감각도 일어날 때마다 이와 같이 주시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다리를 뻗고,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고, 들고, 몸을 흔들고 쭉 펴는 행위도 나타나는 대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는 다시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수행자가 주시를 계속해나가면 일어나는 일들을 점점더 많이 주시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마음이 이리저리 떠다녀서 많은 것을 주시하지 못하고 놓쳐버리기 쉽다. 그렇다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모든 초보자들이다 그런 어려운 경험을 한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에 떠다니는 모든 행위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마침내는 마음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된다. 마음이 주의 집중대상으로 꽉 차 있으면 마음집중 행위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같은 주의집중대상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다시 말하자면 배의 일어남은 그것을 주시하는 행위와 동시가 된다. 배의 사라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신체적(물리적) 집중대상과 주시라는 정신적 행위는 한 쌍처럼 발생하고 있다. 이 발생과정에는 어떠한 사람도 개체도 개입되지 않는다. 단지 신체적(물리적) 집중대상과 주시하는 정신행위만이 한 쌍처럼 함께 발생할 뿐이다. 이때에 수행자는 실제로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는 동안에 수행자는 배가 일어남이 신체적(물리적) 현상이며, 그것을 주시하는 정신적 행위가 정신현상이라는 것을 식별하게 된다. 배가 사라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러한 정신적 * 신체적(물리적) 현상이 함께 한 쌍으로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매번 주시행위를 할 때마다 수행자는 집중의 대상인 물질적 특성과 그것을 주시하는 정신적 특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식별력은 명색식별지(名色識別智: nāmarūpa-pariccheda-ñāna)로 불리우며, 관지(觀智: vipassanā-ñāna)의 시작이다. 이러한 인식을 정확하게 얻는 것은 중요하다. 수행자가 관찰을 계속한다면 이어서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능력, 즉 연섭수지(緣攝受智 : paccaya-pariggaha-ñāna)라고 불리는 인식을 얻게 된다.

 

수행자가 주시하기를 계속해 나가면 모든 일어나는 것은 잠시 후에 사라진다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물질적 * 정신적 현상이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일생을 계속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영원히 지속되는 현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현상은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져버려 눈 깜짝할 순간동안도 지속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시를 통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런 모든 현상의 덧없음(무상함)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확신을 무상관지(無常觀智 : anniccānupassanā-ñāna)라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고수관지(苦受觀智 : dukkhānupassanā-ñāna)로 이어져서 이 모든 무상함이 곧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수행자는 온갖 몸의 고통을 겪기 쉬우며, 몸은 곧 고통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도 또한 고수관지이다. 다음으로 수행자는 이러한 모든 정신적이고 신체적(물리적) 현상은 어떠한 개체도 자아 그 자체도 구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깨달음을 무아수관지(無我受觀智: anattānupassanā-ñāna)라고 한다.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수행자는 이러한 모든 현상이 무상(無常:anicca), 고(苦:dukkha)와 무아(無我:anatta)라는 것을 확고하게 깨닫게 되며 이렇게 하여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전의 모든 부처, 아라한 및 성자들은 바로 이러한 길을 통해 열반을 실현했다. 모든 명상수행자는 그들 자신이 바로 지금 이러한 념처(念處: sati-patthāna)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과정(道)에 대한 지(智) (phala-ñāna), 열반법(Nibbāna-dhamma)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또한 자신의 바라밀(공덕의 완성)을 익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전에는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오로지 부처, 아라한, 성자들만이 경험했던 삼매(집중에 의해 얻어진 마음의 고요)라는 숭고한 체험과 지혜(초세간적 인식, 지혜)를 얻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기쁠 것이다.

 

오래지 않아 수행자들은 모든 부처, 아라한 및 성자들이 경험한 도지(道智: magga-ñāna), 과지(果智: phala-ñāna)와 열반법 (Nibbāna-dhamma)을 스스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체험은 수행을 시작한 지 한 달, 혹은 20일, 혹은 15일 만에 이루어질 수 있다. 특별히 바라밀이 출중한 수행자들은 이 법들을 7일 이내에 체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위에서 말한 기간 내에 이 법을 이루리라는 신념과,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tthi. 자아에 대한 신념)과 의심 (vicikicchā 의심,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며, 악도에 다시 태어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리라는 확신 속에 기꺼이 머물러야 할 것이다.

 

모든 수행자들이 수행을 잘해서 부처, 아라한과 성자들이 체험한 열반을 어서 빨리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출처 : 만다라불교미술연구원
글쓴이 : 만다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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