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방법 (1)|

마음정원(寂光) 2011. 9. 29. 18:04

위빠사나( vapassana) 혹은 통찰수행은 수행자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신체적인 현상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테적 현상이란 마음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게 된 몸이며 그 대상을 말한다. 우리가 알게 된 몸 전체란 한 덩어리릐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정신적인 현상이란 마음이나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 할 때마다 일어나게 되어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알아차려서 매번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 '봄, 봄' '들음, 들음' '냄새, 냄새' '맛, 맛' '닿음, 닿음' '생각, 생각' 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 초기에는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다 알아차릴 수는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분명하고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할 때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이러한 운동이 분명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풍대(진동, 바람의 요소)로 알려진 물질의 특성이다. 누구나 이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배를 유심히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불룩해지고, 숨을 내쉬면 배가 꺼진다. 이때 불룩해지면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려야 하고, 배가 꺼질 때는 '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만약 움직임이 분명하지 않아서 마음으로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손바닥을 배에 가져다 대고 알아차리면 된다. 이런 방법 외에 몸이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발이 바닥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앉음, 닿음'을 할 수도 있다.

숨을 쉴 때는 숨쉬는 방법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천천히 혹은 빨리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너무 깊게 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숨쉬는 방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바꾸게 되면 쉽게 지친다. 꾸준히 평상시대로 호흡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현상만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릴 때는 소리를 내서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수행자가 뭐라고 명칭을 붙이고 말하든 살관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알고 느끼는 것이다. 배의 일어남을 알아차릴 때에도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치 눈으로 그것을 보는 것처럼 알아차려야 한다.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이렇게 모든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움직임과 움직임에 대한 마음의 알아차림은 마치 표적을 맞추려는 돌처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배가 꺼질 때에도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 일어나고 꺼질 때의 움직임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정확히 일치하여 알아차린다.

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동안 마음이 다른 곳을 방황하게 되는수가 많다. 이럴 때 또한 '방황', '방황'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한다. 한 번 혹은 두 번 알아차리게 되면 방황하는 마음이 멈추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만약 마음이 어는 곳으로든지 갈 때는 '감, 감'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머리 속으로 누군가를 만나면'만남, 만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서 니야기하는 상상을 하게 되면'말함, 말함'이라고 알아차린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이나 회상이 일어나면 꼭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을 하고 있으면'상상'이라고 알아차리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생각'이라고, 계획을 하고 있으면 '계확함'이라고, 자극을 느끼면 '느낌'이라고 싫증이 나면 '싫증'이라고 알아차린다.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이라고, 싫증이 나면 '싫증'이라고, 기쁘면 '기쁨'이라고 , 낙담을 하고 있으면 '낙담'이라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의한 행동들을 한 사람, 혹은 개인이 하는 행동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안다는 것을 바로 '나'라고,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개인이 있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개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단지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행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행동이 매순간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랫동안 좌선을 하고 앉아 있으면 뻣뻣한 느낌과 열기가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 역시 신중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아픔이나 지루함 역시 이와 같이 알아차려야 한다. 이러한 모든 느낌들이 바로 '괴로운 느낌'이며, 이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느낌 알아차리기'이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에 "나는 굳어 있고, 열이 나고, 아프다. 조금 전에는 모든 것이 잘되었는데 지금은 불쾌한 느낌 때문에 괴롭다"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나'는 없다. 다만 불쾌한 느낌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연속되고 있을 뿐이다. 괴로운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계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전류의 흐름이 이어짐으로써 전등를 켜는 것과 같다. 매순간 몸에서 불쾌한 접촉을 하게 되면 불쾌감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이것들이 뻣뻣하거나 덥거나 아픔이 되었건 간에 진지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실제 수행의 초기에 이러한 느낌이 강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싶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욕구를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린 뒤에 수행자는 다시 뻣뻣함, 더움 등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