盤谷公 柳績(石盤洞)

盤谷公(棹)墓碣銘 [반곡공(도)묘갈명]

마음정원(寂光) 2011. 9. 17. 19:46

盤谷公(棹)墓碣銘 반곡공(도)묘갈명

盤谷柳公 _{棹}_ 墓碣銘

屛溪尹文獻公誌盤谷柳先生玄隧曰志潔而行修與伯氏白石公幷美齊芳蔚然爲南國之望殆古所謂難爲兄難爲弟者耶銘曰推我肫肫淑此鄕隣肫肫字何等高妙而如是推許歟是爲百世華袞而後生末學復何贅焉先生以 宣廟甲辰六月二十三日生而禀美質襲庭訓文行早著而長奉親命從伯氏師沙溪先生聞爲己之學忠信爲主篤行爲的探索於性理而魯論三省四勿爲樞要常書諸座右以密體之每蒙獎與於師門而又謂禮者人生日用吉凶常需之節文不可歇緩也以致精熟是以內行純備操履堅貞雖燕居幽獨之中必凝神靜坐如帝對越而志氣穆然未嘗有怠慢之容於世間之切浮榮聲利泊如也疏食弊縕人不堪其苦而處之裕然無幾微見於色辭經禮諸論精爽縝密如兪巿南鄭畸翁尹龍西諸公皆推以畏友爛漫講質孝愛天植養盡志體喪盡情文而慈氏高齡長癃時已中身而凡臥起扶攝便尿潔濯皆以身不使人粥飮藥液必嘗以進二艱經曲儀節一遵家禮慽色哭哀誠動見聞至有鄕里感化癸酉以親命赴省圍中生員庚子拜通善郞除濟用監叅奉壬寅拜童蒙敎官皆以學行也而俱不就丙子亂慷慨檄列郡糾兵聚糧將勤 王至淸州聞和成北望痛哭而歸遂遯居金堤勝盤山以自靖從學者傾嶺湖平生固窮而於周急恐緩也得濟者衆而嘗過壺山見一士人路哭其父母幷喪盖流離也與之歸斥田使資其返喪是有過於麥舟指囷而至于今南士相艷稱於書無所不讀而爲文簡而有法每膾炙人口而多散佚有若干卷癸卯十月十四日卒壽六十葬于金溝凰山北麓枕丙原後鄕人慕其德幷享于白石院諱棹字用濟盤谷其號文化人上祖高麗太師諱車達世冠冕而 國朝漢城判尹諱元顯縣令錄佐理原從勳諱孝中六世以上也曾祖隱菴諱陽輔以學行拜寢郎監役幷不 (724) 就祖諱德新考樹谷諱泰亨師沙溪以沙翁薦官至佐郎前妣金堤趙氏 贈承旨惟精女妣綾城具氏進士大仁女配金堤趙氏進士應女稱女士辛亥卒墓祔三男伯榮繼白石後仲榮季榮一女金尙稷側室二男希榮必榮曰載乾載益載恒載和李宇鳴李鼎昌妻伯榮出曰載熙載謙載厚李墉妻仲榮出曰載千載大李漢翊高應舟妻季榮出金婿二男銓鉉一女呂必英必榮三男一女以下蕃不述又按約齋宋公所撰狀德引尤翁之白石墓銘語曰後之欲知公者當於此求之如叔程之於伯程竊惟誠者天地之道聖人之本故四時行以百物生焉五常修而萬善著焉且莫貴於天爵而人爵得之固可以展天爵之蘊而不得苟實修其天爵則百世仰之而取法焉如堅操遏慾愼獨固窮三省四勿皆其修之之方法也先生承襲詩禮而依歸師宗惟誠是蹈而修其天爵不嘗斗祿而孝悌忠信感孚鄕里今數百年誦聲不衰猗歟盛哉彼顚倒名宦而死無稱焉者還不哀歟銘曰
樹翁有子白石盤谷難兄難弟程伯程叔生旣同德死同腏食少師儒宗淵源端的孝悌忠信爰成厥德布藜何修鄕化感得蹈誠持敬道自凝蓄不試何傷庸耀天爵屏翁玄誌約老狀筆俱是袞褒永世紅燭嵯峨凰山萬年幽宅令望與長警淑後俗
後學善山柳源模敬撰
後學礪山宋成鏞謹書



병계(屏溪) 윤문헌공(尹文獻公)께서 반곡(盤谷) 류선생(柳先生)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뜻을 결백(潔白)히 하고 행실을 닦아 백씨(伯氏)(백형(伯兄)) 백석공(白石公)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명성(名聲)을 함께 하여 울연(蔚然)히 남국(南國)의 망사(望士)가 되니 자못 옛적에 이른바 누구를 형(兄)이라 하기 어렵고 누구를 아우라 하기 어렵게끔 분간하기 어렵겠다.」 하고, 명사(銘詞)에 이르기를 「나의 정성을 미루어 그 향리(鄕里)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하였는바, 순순(肫肫)이란 글자는 실로 고상현묘(高尙玄妙)한 뜻이 내포(內包)되었거늘 이 같이 훌륭히 추허(推許)했던가? 이는 백세(百世)에 빛나는 평(評)이거니, 후생말학(後生末學)으로서 다시 무어라 군소리를 하겠는가?


선생(先生)은 선조(宣祖) 갑진(甲辰)(일륙영사(一六○四)) 육월이십삼일(六月二十三日)에 태어나셨는데 아름다운 기질(氣質)을 천품(天禀)으로 타고나 가정교훈을 독실히 익혀 문행(文行)이 일찍 드러났었다. 장성함에 어버이의 명(命)을 받들고 백씨(伯氏)를 (725) 따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先生)을 스승으로 섬겨 위기(爲己)의 학문(學問)을 듣고, 충신(忠信)을 주장으로 삼고 독행(篤行)을 목적으로 삼으며, 성리(性理)를 탐색(探索)하여 논어(論語)에 이른바 세가지 일로 반성하라는 즉 삼성(三省)과 예(禮)가 아니면 금(禁)하는 네가지 즉 사물(四勿)을 추요(樞要)로 삼아 항상 자리 오른편에 써놓고 실천함으로써 매양 사문(師門)의 칭상(稱賞)을 받았다.


선생(先生)께서 이르기를 「예(禮)란 것은 인생(人生)의 일용(日用) 길흉(吉凶)에 항상 쓰이는 절문(節文)이니 가히 그치지 못할일이다.」 하고, 정숙(精熟)하게 힘쓰셨다. 이로써 내행(內行)이 순수하고 조리(操履)가 곧아 비록 한가히 홀로 있을 때라도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앉아 상제(上帝)를 대(對)함과 같이 지기(志氣)가 목연(穆然)하여 일찌기 태만(怠慢)한 태도가 없었으며, 세간(世間)의 헛된 영화(榮華)나 명리(名利)에는 오직 담박하였다.


한편 변변치 못한 음식과 낡은 의복 등, 사람들은 그 고초(苦楚)를 견디지 못하였으나 선생(先生)은 유연(裕然)하게 대처(對處)하여 그 기미가 기색(氣色)과 언사(言辭)에 나타남이 없었다.
경의(經義)와 예설(禮說)을 논(論)함에 정확하고 세밀하므로 유불남(兪巿南) 계(棨) ·정기옹(鄭畸翁) 홍명(弘溟)·윤룡서(尹龍西) 원거(元擧) 제공(諸公)이 모두 외우(畏友)로 추중(推重)하여 강론(講論)하고 질문(質問)함이 많았었다.
효성(孝誠)과 우애(友愛)를 천성(天性)으로 타고나 지체(志體)의 봉양(奉養)을 다하고, 상(喪)을 당해서는 정(情)과 예절(禮節)을 다하였다. 자씨(慈氏)(모친(母親))께서 고령(高齡)으로 오래토록 환후(患候)가 계셨는데 당시 선생(先生)께서 나이 마흔살이 지났는데도 무릇 눕히고 일으키며 부축하여 드림과 대소변(大小便)의 시중과 세탁(洗濯)을 모두 손수 하되 남을 시키지 않았으며, 죽음(粥飮)과 약액(藥液)을 반드시 맛보고 드리었다.


전후(前後)로 양친상(兩親喪)을 당하여 모든 의절(儀節)을 한결 가례(家禮)에 좇아 행하고 슬픈 기색(氣色)으로 애곡(哀哭)함에, 보고 듣는 이가 감동하였고, 드디어 향리(鄕里)에서 감화(感化)하였다.
인조(仁祖) 계유(癸酉)(일륙삼삼(一六三三))에 어버이의 명(命)으로 성위(省圍)(과장(科場))에 다달아 생원(生員)에 급제(及第)하였다.
현종(顯宗) 경자(庚子)(일륙륙영(一六六○))에 통선랑(通善郞)으로 제용감참봉(濟用監叅奉)에 제수(除授)되고, 임인(壬寅)(일륙륙이(一六六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되었는데, 모두 학행(學行)으로 받았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분(義憤)이 북바쳐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내어 의병(義兵)을 규합하고 병량(兵糧)을 취합하여 임금에게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진군(進軍) 끝에 청주(淸州)에 이르러 화전(和戰)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으로 향하여 통곡(痛哭) 끝에 돌아와 마침내 김제(金堤) 승반산(勝盤山) 아래 자취를 감추어 자정(自靖)하니 선생(先生)을 좇아 배우는 (726) 자가 영(嶺), 호남(湖南)에 많았다.
평생에 곤궁(困窮)함을 굳이 지켜 살면서도 급난(急難)한 이를 돕는데 게으를까 두려워 함으로써 구제(救濟)를받는 이가 많았었다. 일찌기 호산(壺山)(여산(礪山))을 지나는데 한 선비가 객지에서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반장(返葬)도 못하고 길에서 호곡(號哭)하고 있었다. 이를 가엾게 여기고 데리고 돌아와 전토(田土)를 떼어 팔아서 반장(返葬)토록 자금(資金)을 대어 주었다. 이는 북송(北宋) 때의 명신(名臣) 범중엄(范仲淹)이 석만경(石曼卿)의 상(喪)에 보리를 보내어 치상(治喪)토록 한 것보다 더함이 있는지라 지금까지 남도(南道)의 사림(士林)들이 서로 흠앙하여 칭송하고 있다.


서적(書籍)을 읽지 않은 것이 없어 문장(文章)이 간결하고 법도(法度)가 있어 매양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膾炙)되었으나 많이 산실(散失)되고 약간(若干)의 책이 남아 있다.
계묘(癸卯)(일륙륙삼(一六六三))십월십사일(十月十四日)에 졸(卒)하니 수(壽) 육십세(六十歲)로 금구(金溝) 황산(凰山) 북록(北麓) 병좌원(丙坐原)에 안장(安葬)되었다.
후에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그 덕(德)을 사모하여 백석서원(白石書院)에 추향(追享)하였다.


공(公)의 휘는 도(棹)요, 자는 용제(用濟)이며, 반곡(盤谷)은 그 호이다.
문화인(文化人)으로 그 상조(上祖)는 고려(高麗) 때 태사(太師) 휘 차달(車達)인데 대대(代代)로 관작(官爵)을 연이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한성판윤(漢城判尹) 휘 원현(元顯)과 현령(縣令)으로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策錄)된 휘 효중(孝中)은 육세(六世) 이상이다. 증조(曾祖)는 은암(隱菴) 휘 양보(陽輔)인데 학행(學行)으로 침랑(寢郞)(참봉(叅奉)), 감역(監役)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모두 취임(就任)치 않았으며, 조(祖)는 휘 덕신(德新)이요, 고(考)는 수곡(樹谷) 휘 태형(泰亨)으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을 사사(師事)하였는데 사계(沙溪)께서 천거(薦擧)하여 관직이 좌랑(佐郎)에 이르렀다. 전비(前妣)는 김제조씨(金堤趙氏)로 증승지(贈承旨) 유정(惟精)의 따님이요, 비(妣)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진사(進士) 대인(大仁)의 따님이다 .
배위(配位) 김제조씨(金堤趙氏)는 진사(進士) 응식(應埴)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칭송이 있었는데 신해(辛亥)(일륙칠일(一六七一))에 졸(卒)하여 묘소는 부장(祔葬)하였다.


삼남(三男)에 백영(伯榮)은 백석공(白石公) 후(後)로 출계(出系)하고 중영(仲榮)과 계영(季榮)이요, 일녀(一女)는 김상직(金尙稷)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側室)에서 이남(二男)을 두어 희영(希榮)과 필영(必榮)이다. 재건(載乾), 재익(載益), 재항(載恒), 재화(載和)와 이우명(李宇鳴), 이정(李鼎) 창(昌)의 처(妻)는 백영(伯榮)의 소생이며, 재희(載熙), 재겸(載謙), 재후(載厚)와 이(李) 용(墉)의 처(妻)는 중영(仲榮)의 소생이며, 재천(載千), 재대(載大)와 이한익(李漢翊), 고응주(高應舟)의 처(妻)는 계영(季榮)의 소생이며, 금서(金婿)의 이남(二男)은 전(銓)과 현(鉉)이요 일녀(一女)는 여필영(呂必英)의 처(妻)이며, 필영(必榮)은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다. 이하는 번성하여 다 쓰지 못한다. (727)


약재(約齋) 송공병화(宋公炳華)가 지은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우암선생(尤菴先生)께서 지은 백석묘갈명(白石墓碣銘)을 인용(引用)한 말에 이르기를 「후에 공(公)을 알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이에 구(求)할지니, 숙정(叔程)(이천(伊川) 정신(程頣)) 백정(伯程)(명도(明道) 정호(程顥))과 같았다. 」하였다.


그윽히 생각컨대 성(誠)이란 천지(天地)의 도(道)요 성인(聖人)의 본(本)이다. 때문에 사시(四時)로 행하여 백물(百物)이 살고, 오상(五常)을 닦아 만선(萬善)이 드러난다. 또 천작(天爵)(인의충신(仁義忠信))보다 귀(貴)한 것이 없는바, 인작(人爵)(관직(官職))을 얻으면 가히 천작(天爵)의 쌓은 바를 펼 것이요, 인작(人爵)을 얻지 못하면 진실로 그 천작(天爵)을 닦아야 할것이니 이럴진대 백세(百世)토록 앙모(仰慕)하여 법(法)으로 취(取)할 것이다. 굳은 지조(志操)로 욕심(慾心)을 끊음과 홀로 삼가함으로 곤궁(困窮)을 이김과 세가지 반성(反省)과 네가지 금법(禁法) 등은 모두 그 수행(修行)의 방법(方法)이다.
선생(先生)께서 가정에서 시례(詩禮)의 교훈(敎訓)을 이어 받아 사문(師門)에 의귀(依歸)하고, 오직 성(誠)을 실천하여 그 천작(天爵)을 닦되 두록(斗祿)(국록(國祿))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그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행실이 향리(鄕里)에 널리 감동되어 지금 수백년에 이르도록 칭송이 쇠하지 않으니 아름답고 훌륭하도다.


저 이름난 벼슬에 거꾸러져 죽음에 이르러서 칭송이 없는 자 도리어 슬프지 않겠는가? 명(銘)에이르노니,


수곡공(樹谷公)이 어진 아들을 두어, 백석(白石)과 반곡(盤谷)이었도다.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려운바, 명도(明道)와 이천(伊川) 같았도다.
살아서 이미 덕(德)이 같았고, 죽어서 함께 향사(享祀)하였도다.
젊어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을 스승으로 섬겨, 연원(淵源)이 분명하였도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이 돈독하여, 그로써 덕(德)을 이루었도다.
곤궁(困窮)한 이를 도와주니 향리(鄕里)에서 모두 감복(感服)했도다.
성(誠)을 실천하고 경(敬)을 견지하여, 도(道)가 스스로 쌓였도다.
과시(科試)에 응하지 않음이 무슨 상관이랴? 천작(天爵)이 빛났도다.
병계선생(屏溪先生)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약재선생(約齋先生)이 행장(行狀)을 지었도다.
모두 훌륭히 포양(褒揚)하였으니, 영원히 대대로 밝게 전하리라.
높다란 저 황산(凰山)에, 만년(萬年)토록 전할 유택(幽宅)이로다.
훌륭한 명성(名聲) 장구(長久)하리니, 후세의 풍속(風俗)을 맑게 깨우치리라.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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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Copyright: 문화류씨대종회, 2008.] (정리:류주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