盤谷公 柳績(石盤洞)

金川公(世泓)行狀 금천공(세홍)행장

마음정원(寂光) 2011. 9. 17. 19:38

金川公(世泓)行狀 금천공(세홍)행장

金川柳公 _{世 泓}_ 行狀

公諱世泓字深源生於嘉靖丙申自幼不事凡兒戱人咸器異之年六七喜文學工書隷事父母至孝一以順旨爲務和顔愉色不離侍側言忠行篤文章富贍累捷鄕解竟屈南省而了無榮進之意深慕聖賢之業日披閱濂洛群書與從哥申溪公世漢講論性理之學期得窮格之要鄭嶧陽趙孤山皆許以沈毅之操誠孝之篤人無間然矣四十八連遭考妣喪初終制儀一遵朱文公家禮無不極盡其誠居憂啜粥若有全米却而不飮蔬菜水醬亦不入口省墓之禮未嘗一日廢而雖祁寒盛暑風日雨夕不騎牛馬欒欒氣力有時僵仆哭奴攝之行行路莫不指點而嗟嘆以之終制亦無疾痒人皆謂誠孝所感云歲癸巳國中大飢餓莩載路公設粥賑飢捐財救民人多賴活焉歲丁酉倭宼犯縣時公年六十有二與本倅存齋郭公䞭咸陽郡守大笑軒趙公宗道俱有堅守捍禦之志率二子偕入黃石城中不以老爲辭而效國 (653) 之計彌堅八月十八日金海府使白士霖以出戰大將全有賣國存身之凶謀乘夜引賊躪入於昏黑之中一髮孤城毒鋒莫遏公使二子橿榎負內夫人出城而長子橿還入請去公曰我之一死已决於入城之日矣橿呼泣曰父旣有殉國之忠子豈無死父之孝乎俄而賊刃加公子橿以身覆之遂父子同死於一刃之下世稱其一家忠孝雙節與郭存齋家同耳曾於黃巖祠創建之日以一軆妥靈之意有列邑之通章而未得展當時之公議豈非子孫之遺恨也哉嗚呼公之嘉言寶墨蕩失於龍蛇兵燹之餘無隻字片言之傳於世悲夫
桐溪鄭蘊撰傳

 



공(公)의 휘는 세홍(世泓)이요 자(字)는 심원(深源)이다. 가정(嘉靖) 병신(丙申)(일오삼륙(一五三六))에 생(生)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보통아이와 행동(行動)이 다르니 사람들이 기량(器量)이 다르다 하더라. 나이 육칠(六七)세에 문학(文學)을 좋아하고 서례(書隷)를 공부(工夫)하며, 부모(父母)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한결같이 부모(父母)의 뜻을 순종함을 힘써 화안(和顔)과 유색(愉色)으로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말은 충성(忠誠)스럽고 행동(行動)은 독실(篤實)하였다. 문장(文章)이 부섬(富贍)하여 향해(鄕解)에 수차 합격했는데 마침 남성시(南省試)(회시(會試))에 낙제함에 영진(榮進)에 뜻을 두지 않고 성현(聖賢)의 업(業)을 깊이 사모(思慕)하여 날마다 염락(濂洛)의 여러 서적을 열람(閱覽)하고 종형(從兄) 신계공(申溪公) 세한(世漢)으로 더부러 성리(性理)의 학(學)을 강론(講論)하여 궁격(窮格)의 요체를 터득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정역양(鄭嶧陽)과 조고산(趙孤山)이 모두 공의 침의(沉毅)한 조리(操履)와 성효(誠孝)의 독실(篤實)함을 인정하니 사람들이 이론(異論)이 없더라. 사십팔(四十八)에 고비(考妣)의 상(喪)을 연속 당하여 초종(初終) 제의(制儀)를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대로 한결같이 준수(遵守)하여 그 성의(誠意)를 극진히 하고 거상(居喪)에는 철죽(啜粥)하되 만일 전미(全米)가 있으면 거절(拒絶)하여 마시지 않고 소채(蔬菜)와 수장(水醬)을 먹지 않고 일일(一日)도 성묘(省墓)하지 아니한 날이 없으며 비록 혹한(酷寒)과 성서(盛暑)와 풍일(風日)과 우석(雨夕)이라도 우마(牛馬)를 타지 않았다. 노쇠(老衰)한 기력(氣力)이 때로 넘어져가면서 통곡(慟哭)함에 노비(奴婢)가 부액(扶掖)하여 행(行)하니 길가는 이들이 가리키며 감탄(感嘆)하지 아니하는 이 없었다. 이같이 상기(喪期)를 끝내고 질병(疾病)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성효(誠孝)의 감동(感動)이라 말하더라. 계사(癸巳)(일오구삼(一五九三))에 국중(國中)이 큰 흉년이 들어 아사자(餓死者)가 도로(道路)에 연(連)했더니 공(公)이 죽(粥)으로 구제(救濟)하며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제하니 사람이 많이 구제되었다. (654)


정유(丁酉)(일오구칠(一五九七))에 왜적이 고을에 범(犯)하니 당시에 공(公)의 연(年)이 육십이(六十二)라, 본읍(本邑) 군수(郡守) 존재(存齋) 곽공(郭公) 준(䞭)과 함양군수(咸陽郡守) 대소헌(大笑軒) 조공종도(趙公宗道)로 더부러 굳게 지키어 방어(防禦)할 뜻을 두고 이자(二子)를 거느리고 황석성중(黃石城中)에 들어가서 노쇠(老衰)함을 잊어버리고 위국(爲國)할 계획(計劃)을 더욱 굳게 다짐하더니, 팔월십팔일(八月十八日)에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이 출전(出戰)하는 대장(大將)으로서 매국(賣國)하여 보신(保身)할 흉모(凶謀)를 두고 밤을 타서 적(賊)을 이끌고 혼흑(昏黑)한 가운데 짓밟고 들어오니 일발고성(一髮孤城)이 독봉(毒鋒)을 막을 수 없거늘, 공(公)이 이자(二子) 강(橿)과 가(榎)로 하여금 내부인(內夫人)을 업고 출성(出城)케 하였더니 장자(長子) 강(橿)이 들어와서 피할 것을 청하였다.

 

공(公)이 이르되 『나는 한번 죽기로 입성(入城)하는 날에 이미 결정(决定)하였다.』 한데, 강(橿)이 울면서 말하기를 『부친(父親)께서 이미 순국(殉國)할 충(忠)을 두셨는데 자식(子息)이 어찌 부친을 위해 죽을 효(孝)가 없으리요?』 이윽고 적인(賊刃)이 공(公)을 치거늘, 아들 강(橿)이 몸으로서 덮쳐 막으려다가 부자(父子)가 한칼 아래 함께 죽으니 세상(世上)에서 일가(一家)의 충효(忠孝) 쌍절(雙節)이 곽존재(郭存齋)의 집과 동일(同一)하다 칭(稱)하니라,


일찍 황암사(黃巖祠) 창건(創建)하는 날에 배향(配享)할 뜻으로 열읍(列邑)의 통장(通狀)이 있었으나 당시에 공의(公議)를 실행(實行)치 못하였으니 어찌 자손(子孫)의 유한(遺恨)이 아니리요? 아! 공(公)의 아름다운 말씀과 필적이 임진년(壬辰年) 병란(兵亂)에 탕실(蕩失)하여 척자편언(隻字片言)이 세상(世上)에 전함이 없으니 슬프고 애석(愛惜)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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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세보 무자보(2008년). Copyright: 문화류씨대종회, 2008.] (정리:류주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