盤谷公 柳績(石盤洞)

[스크랩] 東陽齋記

마음정원(寂光) 2011. 9. 15. 13:10

 지난 2011.04.17. 일. (음 3.15) 모르고 고향에 들렀더니, 동양재에서 제를 지낸후 대청마루에서 음복을 하고 계셔서, 무척이나 무안했습니다.

 과거엔 합천, 거창 등을 비롯 각지에서 많은 분이 오셨었지만,  참석한분이 적어(안의 외 위천형님, 재성..?) 더욱 죄송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현판과 유래등을 살펴보고 있는데, 학렬 형님께서 저보고 유인물을 주시면서 앞으로는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라 하시어,  읽어보고 보관하다 이 내용들은 널리 그리고 많은 후손들이 알아야 겠기에 제가 다시 형식만을 편집해 올립니다.

  한자 한자 베끼면서 할아버지의 업적을 되새겨 보고, 너무 무심히 지났구나 하고 반성도 합니다.

 

 

  

東 陽 齋 記

동 양 재 기


長季應之 江東蓴鱸 陶臥龍之 尋陽松菊 (장계응지 강동순로 도와룡지 심양송국) 장계응의 강동순로와, 도와룡의 심양송국은

仰之若霄漢上 (앙지약소한상) 하늘같이 우러런다


註) 장계응의 강동순로 : 계응은 장한의 자 진나라 오군사람

    고향 강동의 미나리와 꺼지기를 생각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음

註) 도화룡의 심양송국 : 도연명의 심양에 거한 솔과 국화


基淸風孤節求諸百世之下 而不得基人 (기청풍고절구제백세지하 이불득기인)

그 맑은 바람, 높은 절개는, 백세 아래에서 구하여도, 그와 같은 사람을 얻지 못하는데


惟盤谷柳先生之 花林嘉遯可與二公幷基高觸此 (유반곡류선생지 화림가둔가여이공병기고촉차) 오직 반곡 류선생의, 화림에 숨은 자취는 가히 두공(장계응, 도와룡)과 더불어 그 높은 자취가 같으니


今日 東陽齋之所 由起也 (금일 동양재지소 유기야)

오늘날 동양재가 있고, 글을 짓는 이유다



公 諱績 貫文化 盤谷基號也 (공 휘적 관문화 반곡기호야)

공의 휘는 적이요, 본관은 문화며, 반곡은 그의 호다.


據 咸陽吳舍人 尙文 狀德之 (거 함양오사인 상문 장덕지)

함양 오사인 상문이 지은 행장문에 근거하여 살펴 보니


文化柳氏之 源發於 麗初歷世絓組輝映史冊而 (문화류씨지 원발어 려초역세괘조휘영사책이) 문화류씨의, 근원은, 고려초 시작되어 대대로 벼슬이 사책에 빛나고


本朝名相忠景公諱亮,判漢城尹京生寔公祖若考也 (본조명상충경공휘량 판한성윤경생식공조약고야)

조선조에 이름있는 정승 충경공 휘 량과, 한성판윤 경생은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다.


公起於奕世公孤之門 忠孝爲根基 (공기어혁세공고지문 충효위근기)

공은 혁혁한 공향의 가문에서 태어나, 충효가 근본이 되고


文學爲箕裘早自振拔聲名籍甚登蓮榜通桂籍歷敭 (문학위기구조자진발성명적심등연방통계적역양) 문학이 갑옷과 같이 튼튼하여 일찍이 스스로 명성을 떨치었다.


淸華成廟遺弓之年出知振威縣政尙嚴明事治理 (청화성묘유궁지년출지진위현정상엄명사치리) 성종말년에 진위현령으로 출사하여 정사를 엄명하게 다스렸으며


成末幾喬桐主昏虐日甚公豫卜史草之媒禍 (성말기교동주혼학일심공예복사초지매화) 이미 성종시대가 끝나고 주(연산군) 포학이 심하여 조정에 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遂投拔遯于嶠南之安陰縣石盤洞韜悔基跡以 (수투발둔우교남지안음현석반동도회기적이) 벼슬을 던져 버리고 남쪽큰산(덕유산) 안음현 석반동에 숨어 뉘우치며 살면서


琴書自娛於山水間有召命而竟不赴抗志以終其年 嗚呼 (금서자오어산수간유소명이경불부항지이종기년 오호)거문과와 공부로 스스로 산수를 즐기며 나라의 부름이 있어도 응하지 않고 뜻을 지키다 세상을 마감하니 슬프도다


炳幾不竣之見孤往不屑之操至今見稱於世 (병기불준지견고왕불설지조지금견칭어세) 맑고 높은 지조는 지금까지도 세상에 일컬어지고 있다

公 沒而葬 于是 子姓仍居焉 (공 몰이장 우시 자성잉거언)

공의 산소도 살던곳(석반동)에 있고 자손들도 대대로 살고 있다.


安之 有柳氏實 自公始雖其 (안지 유류씨실 자공시수기)

안음에 류씨가 있음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後承不甚繁 而猶以文行世基 (후승불심번 이유이문행세기)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지 않았으나 대대로 문학을 이어왔다.


家後孫載億懼遺芬之易沫慨餘韻之莫追乃就 (가후손재억구유분지이말개여운지막추내취) 집안 후손 재억이 공의 유분여운(조상이 남겨놓은 좋은일)이 물거품이 되어 없어질까 두려워

註) 載億 公의 12世孫 字 元禮 號 惠軒

   純祖13년   (1813)6月23日生 고종14년丁 (1877)8月 7日卒


公楸下築數間室子以爲歲薦之所扁之以永慕顧 (공추하축수간실자이위세천지소편지이영모고) 공의 무덤(楸 오동나무추)아래 작은집을 세워 영모재 현판을 달고 세상에 알리고


庇以曰白茅 歲久爲圮 (비이왈백모 세구위비)

초가(백모)지붕을 만들어 덮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다.


今其族孫基俊與其孫基正謀于諸宗更拓永慕西北 (금기족손기준여기손기정모우제종경척영모서북) 이제 집안 후손 기준이 그(재억) 손자 기정과 같이 여러 종친과 협의하여 영모재 북서쪽


註) 基俊 公의 14世孫 字 璟字 재원의 증조

哲宗11년 庚申(1860)5월9일生 강진(1940)2월 11일 卒

高宗 20년 癸未(1883년) 武科 高宗 33년丙申(1896)宣傳副護軍 陞嘉善

계미년 무과 급제후 병신년 선전부 호군 임명가선대부 올랐다.

基正公의 14世孫 字 永春 號 春溪 재흥의 증조

哲宗12년 辛酉(1861)12월 4일生 甲茂(1934)12월3일卒

性寬弘正大孝養父母(성관홍정대효양부모)

성품이 넓고, 바르고, 너그럽고, 크며 부모에게 효도했다.

隱跡林泉漁樵耕讀爲一生(은적림천어초경독위일생)

산천에 은거하며 고기잡고, 나무하며, 밭갈고, 독서하며 일생을 살았다.

통符尊聖衛道視以已任鄕稱巨儒(통부존성위도시이이임향칭거유)

큰 성인으로 존경받아 유림에서 큰 선비로 불리워 졌다.


隅建瓦室四楹 爲久遠之圖 (우건와실사영 위구원지도)

언덕에 튼튼한(사영)기와집을 세워 구원을 도모하였으니


可以備蒸嘗于可以肄講學揭其楣 (가이비증상우가이이강학게기미)

가히 증상(체면, 구색, 찐 음식의 맛) 갖추고 가히 학업을 높이 날릴 수 있으며


曰 東陽齋 走書于其 (왈 동양재 주서우기) 이름하여 동양재라 하였다.


友 鄭君文燮介 而求余記 (우 정군문섭개 이구여기)

그의 친구 정군 문섭에게 부탁하여 나(정인학)에게 기문을 지어달라고 한다.

余 不嫺於辭何能道其詳 (여 불한어사하능도기상)

내 본래 문장이 우아하지 못한지라 어찌 자상하게 쓰겠는가.


但 東陽之義聞之夙矣蹟 (단 동양지의문지숙의적)

다만 동양의 의로움과 업적을 일찍 들었다.


公之 槩大雅所謂 (공지 개대아소위)

공의 행적(아)을 대략 말한다면 이른바


卽 明且哲以保其身者非歟觀其 (즉 명차철이보기신자비여관기)

즉 이미 밝고 또 어질어 그 몸을 보전하다 라고 한 것이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遠避矰繳永矢岩阿蟬蛻於汚濁之中鴻冥於 (원피증격영시암아선태어오탁지중홍명어)

멀리서(서울)피난와 주살(증격)당하지 않고 매미가 허물을 벗듯 더럽고 어두운 곳을 피해


雲水之淮水我不拔不脫之德而 (운수지회수아불발불탈지덕이)

심산유곡에서 아무탈 없이 덕을 쌓으니


使 子孫世業而不輟其視溺跡於 (사 자손세업이불철기시닉적어)

자손으로 하여금 거친 일 없고, 나쁜 것 안보고, 세업을 전하게 하였으니


利途絆身於名韁朝冕而暮鉗者其得與喪孰多也 (이도반신어명강조면이모겸자기득여상숙다야) 이익과 명예나 공명에 급급하여 아침에 면류관을 쓰고 저녁에 칼을 차는 자와 얻는 것과 잃은 것이 어떠하겠는가


宜後人之追募公不置也 (의후인지추모공불치야)

후세 사람들이 공을 추모함이 진실로 마땅하도다


至若登臨流峙之勝吾將膏車秣馬 (지약등임유치지승오장고거말마)

산수의 좋은 경치와 말이 꼴을 먹는 기름진 언덕을 내(정인학) 올라 바라보고


尋公盤谷之居撫公遺躅継和昌黎子之 (심공반곡지거무공유촉계화창려자지)

공이 반곡에 살아온 유적을 어루만지며 공의 후손이 화목하게 계속 살아와 창려자의

註) 창려자 : 한유의 호 이원을 반곡으로 보내면서 반곡가를 지어줌 - 고기보에 있음


盤谷歌一闋以道岩阿之邁軸姑是之地 (반곡가일결이도암아지매축고시지지)

반곡가 한소절로 바위 언덕 위를 배회(매축)하며 옛날부터 옳다고 칭찬할까 하노라


歲在 戊午 梧月 下澣

세재 무오 오월 하한

무오년(1918년) 7월 휴가때

資憲大夫 前行司憲府大司憲

자헌대부 전행사헌부대사헌

兼 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鄭 寅 學 記

정 인 학 기

後 學 林 苾 熙 書

후 학 임 필 희 서

己丑年 孟夏 公의 17世孫 在成이 飜譯한글을 옮겨 적습니다.

 

2011.09.08  류 청렬

 

 

   尋陽松菊-도연명의 심양에 거한 솔과 국화

 

  江東蓴鱸 - 고향 강동의 미나리와 꺼지기를 생각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욌다는 고사

 

 

   2011.04.17. 일 (음03.15) 제사후 대청에서 음복 - 너무멀리서 찍었습니다.

 

출처 : 풍장백세(風長百世)
글쓴이 : 돌서리(柳靑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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