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柳)씨와 시조

[스크랩] 문화류씨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문화에서 일어난 사건들

마음정원(寂光) 2011. 8. 29. 13:48

 문화고을은 황해도 서북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수가 화려한 구월산과 고조선당시의 단군과 환웅, 환인의 성인을 모신 삼성사가 있기도 한 곳이다. 서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자리하고, 남으로는 넓게 펼쳐진 재령평야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땅의 최대 곡창지대로 전라도가 있듯이 북쪽땅에는 황해도와 결줄만할 것이다.

고려의 옛도읍지인 개성도 가까이 있어 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물류 거점지대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풍부한 농수산물과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부호들이 많았다 한다. 일례로 황해도지방을 거의 장악할 정도로 경제적인 면에서 상당한 재력을 갖춘 이가 있었으니 그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일천량의 군량미를 내어주어 후삼국을 멸망시키고 통일제국을 건국한 고려삼한통합벽상익찬개국이등공신이며, 문화류씨시조 류차달공이 있다.

 

 

문화류씨시조 대승공 류차달 묘소

 

 

 

 

대승공유지저택 전경

 

 

 

류차달공의 선계에 대해는 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고증할 수 없겠으나 군량미 일천량이상의 물량이라면 지금 생각해도 상당한 양이라는 것이다. 옛날 수레(달구지)가 현재의 1톤트럭정도의 규모이기에 일천대라면 1톤트럭으로 한 가득 실어 일천대라는 결론이 나온다. 역시 상당한 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류차달공의 선계는 고려이전 시대인 통일신라시대나 더 오래전인 고구려시대부터 황해도지역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재력가의 후손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고려건국이후 가문은 번성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 류차달공이하 10여대손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달리하는 류문이 생겨났다고 하나 이도 정확한 사료가 없기에 확실히 증명하긴 어렵다. 아무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기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한다.   

조선중반에는 도적떼(장길산,임꺽정)들이 듫끓기도 했고 조선후반에는 조선 최초의 민란인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 했던 것이다. 서기 1811년(순조1년) 외숙인 류학권에게 글을 배우면서 안동김씨,풍양조씨등 당시 세도가문과 비교하며 자신의 자격지심과 무능력에 의한 사감으로 중소지주,중소상인,일반평민들과 규합하여 일으킨 민란이다.

물론, 홍경래는 평안도지방에서 난을 일으켜 한때는 정주성을 함락하며 1년간 지속하다 관군에 의해 참살당했다.라는 것 다 아는 얘기지만 과연 홍경래의 난이 평안도에만 국한되었을 까라는 의문이 든다. 외숙이며 스승인 류학권의 본가는 평안도 중화군이라 한다. 평안도 중화군과 황해도 안악군,신천군과도 거리상으로 가까이 있다.

안악군과 신천군은 문화류씨 시랑공파와 하정공파 후손들이 모여사는 세거지이기도 했기에 신천군 문화고을도 홍경래난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홍경래에 의해 외숙인 류학권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일가 친척이면서 먼 친척들도 상당한 피해를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문화류씨 대종회에서 각 파별로 문중 인구를 조사한 것이 있다. 이를 보면 갑파중에서도 시랑공파의 후손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고, 하정공파조 류관공의 둘째아들 류중문공의 후손들이 200년전쯤 인구가 갑자기 감소한 사실이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들이다.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사실인 사료가 없어 확실히 고증할 수 없지만 수 천년 전해지는 설화도 아니고 200년전의 사실이기에 신빙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본인의 단순한 추측으로 꾸며낸 것이 아닌 문화류씨대종회에서도 구전되어진 것들이기에 단순한 추측이 아님을 밝혀둔다.

문화고을에 세거한 문화류씨 하정공파 대호군 류중문의 후손들은 홍경래의 난에 의해 약 140여호가 몰살되고 일부 일족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남하하여 가깝게는 개성,강화와 멀리는 강릉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문화고을에서 일어났고 문화류씨를 멸족했다는 뜻으로 일명"문화방사건"이라 부른다.

200년전의 일인데도 역사적인 사료가 전무한 실정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규장각도서를 살펴봐도 당시 상황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상태다. 대역죄인인 홍경래를 공초한 사실을 기록한 "추안급국안(사건기록안)"이라는 사료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기록한 사료인 "임신석보 영인본"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행방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석보라함은 돌에 새긴 기록문서와 같은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홍경래난이 임신년에 일어났기에 임신석보라 했을 것이고 탁본을 떳기에 원본이 아닌 영인본이라 하는 가 보다.

이는 단순히 한 가문에 대한 문제가 아닌 모든 류씨가 살펴보고 고증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류씨의 고향인 문화고을...

1950년 10월 한국전쟁중에도 문화고을을 포함한 황해도 신천군 양민학살사건이 또 일어났다. 신천군민의 1/3정도인 2만여명이 학살된 것이다. 노근리학살사건처럼 미군이 저질렀다고도 하고 북한 인민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들 하나 이 사건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고 한다. 200년전의 역사든 60년전의 역사든 우리는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위 내용은 본인의 조모이신 고 제주고씨와 고 류인국님, 고 류재호님, 문화류씨대종회 관계자님의 말씀을 토대로 작성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출처 : 유(柳)씨->류(柳)씨로 무료상담.
글쓴이 : 松溪 류문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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