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柳)씨와 시조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유래

마음정원(寂光) 2011. 8. 29. 13:44

  
 
 
 
 
문화 류씨(文化柳氏)의 유래
1. 시조(始祖)의 유래(由來)
車氏(차씨)와 같은 始祖(시조)에서 갈린 同族異性(동족이성)으로서, 예로부터 “三韓甲族(삼한갑족)”으로 일컬어져 왔다.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에는 “高麗士人(고려사인) 異族望相高(이족망상고) 柳, 崔, 金, 李 四姓爲貴種(사성위귀종)”이라 하여 柳氏를 高麗時代(고려시대)의 四大名族(사대명족)의 하나로 꼽고 있었으며, 權文海(권문해)도 “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에서 東漢名閥(동한명벌) 20성을 꼽는 가운데 柳氏를 9번째로 넣고 있다. 따라서 麗朝(여조) 이래 많은 名臣賢卿(명신현경)을 배출했는데, 특히 李朝(이조)에서는 잇단 士禍(사화), 黨爭(당쟁)에 손상을 입기도 했으나 꾸준히 伸張(신장)했다.
柳氏의 始祖(시조)는 高麗(고려) 太祖(태조)때의 大丞(대승) 柳車達(유차달)이다. 본래 儒州(유주) 現 黃海道(황해도) 信川郡(신천군) 文化面(문화면) 지방의 豪富(호부)였던 그는 高麗(고려) 開國(개국) 당시 太祖(태조) 王建(왕건)이 後百濟(후백제)의 甄萱(견훤)을 征討(정토)함에 軍糧補給(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수레 1천량을 제작, 私庫(사고)를 털어 軍糧을 보급해 줌으로서 翊贊壁上功臣(익찬벽상공신)에 敍勳(서훈)되고 벼슬이 大丞(대승)에 올랐으며 “以車爲達(이차위달)”의 뜻으로 太祖로부터 車達(차달)[初名(초명)은 海(해)]이란 이름을 賜名(사명)받았다고 한다. 그의 祖上에서 변성한 사실을 안 太祖가 “車氏의 공을 잊을 수 없고, 또한 柳氏로 變姓한지 6세가 지났으니 이도 역시 폐할 수 없다.”하며 그에 두 아들 중 長子(장자) 孝全(효전)은 祖上의 舊姓(구성)인 車氏姓(차씨성)을 繼承(계승)케 하고 本貴(본귀)를 延安(연안)으로 하여 오늘에 延安車氏(연안차씨)의 始祖가 되었고, 次子(차자) 孝金(효김)에게는 儒州(유주)에 살면서 柳氏姓(유씨성)을 承繼(승계)하였는데, 뒤에 儒州(유주)가 文化縣(문화현)으로 改稱(개칭)됨에 따라 後孫들이 本貴를 文化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 왔다.
그후 後孫이 繁盛(번성)하여 6개의 본으로 分籍(분적)되어 10세손 資成(자성) 豊山柳氏(풍산유씨), 10세손 成澗(성간) 瑞山柳氏(서산유씨), 10세손 良梓(양재) 全州柳氏(전주유씨), 10세손 仁庇(인비) 普州柳氏(보주유씨), 13세손 澥(해) 善山柳氏(선산유씨)를 각각 1세조로 하여 繼代(계대)하고 있으나 모두 柳車達의 血孫(혈손)이라는 信念으로 大丞獎學會(대승 장학회)를 조성하는 등 親睦(친목)을 敦篤(돈독)히 하고 있다.

2. 본귀(本貴)의 유래(由來)
柳車達의 선대는 원래 中國 고대의 帝王인 黃帝의 後裔(후예)로써 箕氏朝鮮(기씨조선)[실은 韓氏朝鮮(한씨조선)]때에 東來(동래), 平壤(평양) 一土山 아래에 隱居(은거)하며 山에 이름인 一土를 따서 王氏로 變姓(변성)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箕氏朝鮮(기씨조선)의 準王(준왕)이 衛滿(위만)에게 쫓겨나 南遷(남천)하게 되자, 그 무렵 “一土草家者王(일토초가자왕)이라는 讖謠(참요)가 유포되어 이에 疑懼心(의구심)을 품은 準王(준왕)이 一土山 王氏를 모조리 잡아죽이게 되니 王蒙(왕몽)이란 이가 아들 琳(림)과 함께 智異山(지리산)에 들어가 神人(신인)의 啓示(계시)를 받고 王字(왕자)의 변형인 田氏姓(전씨성), 申氏姓(신씨성)으로 고쳤다가 다시 車氏姓(차씨성)으로 改姓(개성)하고 이름도 無一(무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車無一의 32대손 車承穡(차승색)이 新羅 哀莊王(애장왕)때에 左相(좌상)을 지냈는데, 哀莊王 10년(809년) 왕의 숙부인 彦昇(언승)이 亂(난)을 일으켜 조카 哀莊王을 죽이고 스스로 憲德王(헌덕왕)이 되니, 車承穡은 喬木世臣(교목세신)의 도리로서 아들 恭叔(공숙)과 前王의 원수를 갚고자 憲德王을 暗殺(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령이 내리므로 아들 恭叔을 데리고 脫身逃避(탈신도피)하여서, 儒州(유주)[現 黃海道 信川郡 文化面] 九月山(구월산) 목방동으로 들어가 隱居(은거)하면서 祖母의 姓인 楊氏姓(양씨성)을 모방하여 柳氏로 이름을 穡(색)으로 다시 變姓名(변성명)하고 아들 恭叔은 叔(숙)으로 改名하여 그곳에서 定着(정착) 世居(세거)하였고, 이 柳穡의 5代孫이 곧 柳車達인데, 그가 出車給餉(출차급향)의 공으로 壁上功臣(벽상공신)에 敍勳(서훈)되면서 長子 孝全은 太祖의 允許(윤허)를 받아 本姓인 車氏姓을 承繼(승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車氏는 柳氏의 큰집이며 이것이 柳氏와 車氏가 分派(분파)되기까지의 대략의 전부인데, 上系(상계)를 멀리 4천여년 전까지 소급하여 中國 고대의 傳說上(전설상)의 帝王(제왕)인 皇帝(황제)나 夏后(하후)에게까지 접근한 점 등등은 다분히 傳說的인 所載(소재)여서 그대로 접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으나, 柳氏, 車氏가 우리 나라에서 가장 淵源(연원)이 오랜 姓氏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전한다.
어느 日本인 학자가 諸文獻(제문헌)을 토대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는 歸化族(귀화족) 姓氏가 무려 130여 성씨에 이르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夏(하)시대에 귀화했다는 柳氏, 車氏가 가장 淵源(연원)이 오랜 것으로 나타나 있다. [善生永祖(선생영조) “朝鮮의 姓氏와 동족부락(朝鮮の 姓氏と 同族部落)”]
한가지, 우리 나라의 族譜(족보)의 嚆矢(효시)는 明(명) 嘉靖年間(가정년간)[이조 明宗代(명종대)에 해당, 16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는 “文化柳氏譜(문화유씨보)”라는 것이 통설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文化柳氏 大同譜所(문화유씨 대동보소) 都有司(도유사) 柳寅鳳(유인봉) 측의 말에 의하면 “嘉靖譜(가정보)”보다도 140년 전이되는 명 永樂年間(영낙년간)[李朝 世宗 5년 癸卯(계묘)]에 이미 “文化柳氏譜(문화유씨보)”가 나왔다고 한다.
柳氏 인구는 지난 1960년도 당시 國勢調査(국세조사) 당시 5만7천여 가구에 33만6천 여명으로, 인구 순위는 19위가 된다고 한다.

3. 대종(大宗)은 文化 柳氏
貴(귀)鄕(향)은 文獻(문헌)에 130여본이 전하고 있으나 현재는 大宗(대종)인 文化柳氏를 비롯하여 “三山(삼산), 二州(이주)” 즉 瑞山(서산), 豊山(풍산), 善山(선산), 普州(보주), 全州(전주)와 高興(고흥)의 7본뿐이라는 것이 柳氏 大宗會(대종회) 측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들도 모두 文化柳氏(始祖 柳車達의 9代孫代)의 分籍宗(분적종)이여서 柳氏 大同譜(대동보)上으로는 豊山波(풍산파), 善山波(선산파), 普州波(보주파), 全州波(전주파) 등등 文化柳氏의 一分波로 다루어지고 있다.
麗朝(여조)의 閥族(벌족)이였던 柳氏는 李朝에서도 文科 급제자 428명에 相臣(상신) 14명, 文衡(문형) 6명을 비롯하여 20여명의 功臣(공신)을 배출하는 한편, 특히 12명의 淸白吏(청백리)를 배출하여 姓氏別로는 李氏 52명, 金氏 27명에 다음가고 있다. 本貴別로는 文化柳氏가 134명으로 相臣 9명, 文衡 4명, 功臣 9명, 淸白吏 5명 등으로 단연 首位(수위)를 차지하고, 普州柳氏가 132명으로 相臣 2명, 文衡 1명, 功臣 8명, 淸白吏 4명으로 그에 버금가며 全州柳氏가 98명, 豊山 및 高興柳氏가 각 23명, 瑞山柳氏가 6명, 靈光 및 善山柳氏가 3명, 白川柳氏가 4명, 延安 및 仁同柳氏가 각 1명씩이다.

1) 文化柳氏(문화류씨)
世系(세계)는 始祖 柳車達의 10代孫 내지는 12代孫 代에서 14派로 大別되는데, 그중 벼슬의 閱歷(열역)으로나 인구수로나 大波로 꼽히기로는 忠景公(충경공) 柳亮(유양)派, 左相公(좌상공) 柳曼殊(유만수)派, 夏亭公(하정공) 柳寬(유관)派, 檢漢城公(검한성공) 柳元顯(유원현)派, 祗候使公(지후사공) 柳仁修(유인수)派 등 5파이다.

가) 忠景公派(충경공파)
忠景公派에서는 忠景公 柳亮(유양)이 李朝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이고 太宗(태종) 때 左明功臣(좌명공신)으로 文城府院君(문성부원군)에 봉해지고 藝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 右議政(우의정)을 지냈었고, 그의 5代孫 인 松庵(송암) 柳權(유권)[忠肅公(충숙공)]이 仁宗(인종) 때 左議政(좌의정)을 지냈다. 柳權은 仁宗이 승하한 후 院相(원상)으로 庶政(서정)을 맡았으나, 明宗(명종)이 즉위하고 戚族(척족)인 坡平尹氏(파평윤씨)의 大尹(대윤) 尹任(윤임), 小尹(소윤) 尹元衡(윤원형) 사이에 政權爭奪戰(정권 쟁탈전)이 가열되면서 小尹一派에 의해서 유배 賜死(사사)되었다. 그에 앞서 中宗때 柳權은 吏曹判書(이조판서)로 있으면서 李芎(이궁)의 兵曹判書(병조판서) 任命을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明宗 즉위 후 小尹一派와 손을 잡은 李芎이 右議政에 兵曹判書를 겸하게 되면서 사적인 원한을 푼 것이다. 이 무렵의 小尹에 의한 일대 숙청이 그 惡名 높은 乙巳士禍(을사사화;1545年)인데, 이 士禍 때 普州(보주) 柳氏의 吏曹判書 柳仁淑(유인숙)의 일가도 慘禍(참화)를 입었으며, 柳堪(유감) 大司諫(대사간) 全州柳氏, 柳希春(유희춘) 吏曹參判(이조참판) 善山柳氏, 柳景深(유경심) 大司諫(대사간) 豊山柳氏 등등도 罷職(파직) 당하고 귀향 가는 등 士禍(사화)의 여파는 柳氏들에게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 한편 忠景公의 伯氏派(백씨파) 府尹公派(부윤공파)에서 文興君(문흥군) 柳思瑗(유사원)左尹(좌윤)이 宣祖(선조)때 壬辰倭亂(임진왜란) 宣武功臣(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는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請兵(청병)을 위한 急告奏聞使(급고주문사)의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나라를 다녀왔으며, 丁酉再亂(정유재난) 때에는 明軍을 嶺南(영남)지방에 인도하는 등 전쟁 수행에 크게 이바지했다.

나)左相公派(좌상공파)
左相公派에서는 柳蔓殊(유만수)[贊成(찬성)]가 李成桂의 革命에 가담하여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나 제1차 “王子의 亂” 때에 芳遠(방원) 太宗에게 참살 당했다. 그의 玄孫(현손)인 老圃(노포) 柳洵(류순)[文僖公(문희공)]이 世祖 때 文科重試(문과중시)에 급제, 燕山君(연산군) 때 領議政을 지내다가 中宗反正 功臣(중종반정 공신)으로 文城府院君(문성부원군)에 봉해지고 다시 領議政을 지냈으며, 6代孫인 愚伏(우복) 柳琠(유전)[文貞公(문정공)]이 또한 明宗 때 文科重試(문과중시)에 급제, 湖當(호당)을 거쳐 宣祖 때 領議政을 지냈다. 뒤에 平難功臣(평난공신) 2등에 追錄(추록)되고 始寧府院君(시녕부원군)에 追封(추봉)되었다.
曼殊(만수)의 後孫에서는 功臣이 많이 나왔는데, 端宗 때 請難功臣(청난공신) 淑(숙)[判書(판서)], 洙(수)[贊成(찬성)], 泗(사)[判書(판서)]의 3형제는 그의 孫子이며, 中宗 反正功臣(반정공신) 應龍(응룡)[吏參(이참)]은 領議政(영의정) 洵(순)의 아들이다. 특히 柳洙(유수)[安襄公(안양공)]는 成宗 때 佐理功臣(좌리공신)에도 올라 文城君(문성군)에 봉해졌는데, 武術(무술)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다.
世祖 때 死六臣 事件(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成三問(성삼문)의 나이 어린 딸을 몰래 데려다가 숨겨 길러 며느리로 삼기까지 한 節臣(절신) 柳白楣(유백미)[監察(감찰)]는 蔓殊(만수)의 증손인데, 그의 아들 지(輊) 贊成(찬성)는 成宗 때 佐理功臣(좌리공신)이다. 한편 曼殊(만수)의 四寸 月亭(월정) 柳延顯(유연현)[貞肅公派祖(정숙공파조)]은 太宗 때 領議政(영의정)을 지냈다.

다)夏亭公派(하정공파)
夏亭公派에서는 夏亭公 柳寬(유관)[文簡公(문간공)]이 太宗 때 藝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으로 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를 겸하여 “太祖實錄(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世宗 때 几杖(궤장)을 하사 받고 右議政에 올라 “高麗史(고려사)”를 讎棱(수릉) 撰進(찬진)했는데, 淸白吏(청백리)에도 錄選(녹선)되고 學問과 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9代孫 約齋(약재) 柳尙運(유상운)[忠簡公(충간공)]은 肅宗(숙종) 때 文臣庭試(문신정시)에 장원하고 大司諫(대사간)으로 특진되어 領議政을 두 번,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를 세 번 지내는 동안 張禧嬪(장희빈)의 廢立(폐입)에 얽힌 黨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직되고, 혹은 付處(부처)되기도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英祖 때 左議政을 지낸 晩菴(만암) 柳鳳輝(유봉휘)는 柳尙運(유상운)의 아들이다. 柳鳳輝(유봉휘)는 이른바 “小論四大臣(소론사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景宗 1年 世弟(세제) 英祖 책봉을 반대했고 세제의 代理聽政(대리청정)이 실현되자 왕이 병을 앓지 않는데 代理 聽政케 함은 부당하다고 極諫(극간)하여 마침내 이를 철회케 하고 老論(노론)을 失脚(실각)시켰다. 그러나 辛壬士禍(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라는 老論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 左議政에서 免職(면직), 慶興(경흥)에 安置(안치)되어 配所(배소)에서 죽었다.
한편 柳寬(유관)의 次子(차자) 季聞(계문)이 世宗 때 刑曹判書(형조판서), 季聞의 손자 聃年(담년)은 中宗 때 兵曹判書(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유명한 磻溪(반계) 柳馨遠(유형원)[1622~1673]은 季聞(계문)의 8代孫이다. “磻溪隧錄(반계수록)”의 저자인 그는 평생 野人(야인)으로 마쳤으나 當代에 이름을 떨친 대학자로서 당시 社會制度(사회제도)의 改革(개혁)과 土地革命(토지혁명)에 의한 경제적 혁신을 부르짖은 그의 經世致用(경세치용)의 思想(사상)은 비록 結實(결실)은 못했으나 前近代와 近代와의 교량적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라) 祇候使公派(기후사공파)
한편 祇候使公派에서는 集賢殿(집현전) 출신의 학자로서 유명한 死六臣의 한 사람인 浪玕(낭간) 柳誠源(유성원)[忠景公(충경공)]과 正祖 때 實學者로서 朴齊家(박제가), 李德懋(이덕무), 李書九(이서구)등과 함께 “漢文新派四家(한문신파사가)”로 불린 泠齎(영재) 柳得恭(유득공)을 낳아 빛난다. 이 祇候使公派에서는 柳自新(유자신)[光海君(광해군)의 才人(재인)] 一家가 大北派로서 1689年 仁祖反正(인조반정)후에 크게 다쳤다.

마) 그외
이밖에도 文化柳氏로는 世宗 때에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으로 朴堧(박연)과 함께 雅樂(아악)의 기초를 세운 文肅公(문숙공) 柳思訥(유사눌) [夏亭(하정) 柳寬(유관)의 長姪(장질) 文肅公派(문숙공파)],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全羅道 義兵將(의병장) 高敬命(고경명)과 함께 錦山(금산)戰鬪에서 戰死(전사)한 月波(월파) 柳彭老(류팽노) [左相公派(좌상공파)], 宣祖(선조) 때 詩(시), 書(서), 射(사)의 三絶(삼절)로 꼽힌 柳湋(류위) 正祖(정조) 때 名儒(명유)로 “東史撮要(동사촬요), 朱文性命氣說(주문성명기설)”등을 撰述(찬술)한 柳大遠(유대원)[寄正鎭(기정진) 門人(문인)] 등이 있다.

2) 普州柳氏(보주류씨)
高麗(고려) 密直司(밀직사)인 柳仁庇(유인비)[柳車達의 9代孫]를 始祖로 하고, 그의 孫子代에서 翊襄公(익양공) 惠芳(혜방)派와 安簡公(안간공) 惠蓀(혜손)派로 크게 나뉘는데, 이밖에 高麗 上將軍(상장군) 柳挺(유정)을 始祖로 하는 別派(별파)[세칭 “土普州(토보주)”]가 있다. 이들은 李朝에 相臣(상신) 2명, 文衡(문형) 1명, 功臣(공신) 8명을 비롯하여 많은 武將(무장)을 배출하여 文化柳氏에 버금가고 있는데, 거의가 翊襄公派(익양공파)에서 나왔다. 文科(문과) 급제자 수도 文化柳氏와 더불어 많다.
翊襄公派에서는 柳珣(류순)[太祖朝(태조조) 政堂文學(정당문학)]과 그의 아들 謙(겸) [形儀(형의)] 父子가 함께 淸白史(청백사)에 올랐는데, 淸白史 琰(염)[世宗朝(세종조) 史判(사판)]은 珣(순)의 四寸이고 濱(빈)[中宗朝(중종조) 史判(사판)] 忠正公(충정공)은 謙(겸)의 5代孫이다. 이 派의 인물은 모두가 謙의 玄孫(현손)인 柳順汀(유순정)[中宗朝(중종조) 領議政(영의정)]과 竹堂(죽당) 柳辰仝(유진동) [明宗朝(명종조)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의 後孫이다.
柳順汀(유순정) 文成公(문성공)은 佔畢齎(점필재)의 門人으로 成宗 때 謁聖文科(알성문과)에 장원하여 北征都元師(북정도원사) 許琮(허종)의 휘하에서 野人 정벌에 戰功을 세우고, 中宗反正(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靖國功臣(정국공신) 1등에 箐川府院君(정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이어서 右議政에 올라 李顆(이과)의 獄事(옥사)를 다스려 定難功臣(정난공신) 1등이 되었다. 뒤에 領議政까지 이르고 中宗廟廷(중종묘정)에 配享(배향)되었다. 柳順汀(유순정)의 아들 松塘(송당) 柳泓(유홍)[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 겸 副摠管(부총관) 普山君(보산군)]과 조카 濚(영) 普陽君(보양군)이 中宗反正功臣(중종반정공신)이 되었으며, 中宗 때 두 차례나 使臣으로 明나라에 다녀와 戶曹(호조), 工曹判書 등을 거쳐서 左議政(좌의정)에 오른 柳溥(류부) [初名(초명) 蔣(장)]도 그의 조카이다. 英祖(영조) 때 文章家(가)로서 禮曹判書(예조판서)를 지내고 普陽君(보양군)에 봉해진 省庵(성암) 柳儼(유엄) 惠靖公(혜정공) 그의 11代孫이 된다.
한편 竹堂(죽당) 柳辰仝(유진동) 貞敏公(정민공)은 副提學(부제학), 工曹判書(공조판서) 등을 지낸 벼슬 閱歷(열력)보다 文翰(문한)으로 알려졌다. 文詞(문사)가 뛰어나고 竹畵(죽화)를 잘 그렸으며, 글씨로도 유명하여 崇禮門(숭례문)[지금의 南大門(남대문)]의 글씨가 그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후손에서는 壬辰倭亂 때의 名將(명장) 柳珩(유형)[統制使(통제사)]과 丙子胡亂(병자호란;1636년) 때의 名將 柳琳(유림) 摠戎使(총융사) 忠壯公(충장공)을 비롯해서, 孝傑(효걸) 仁祖朝 振武功臣(진무공신) 莊毅公(장의공), 赫然(혁연) 孝傑의 아들, 肅宗朝 工判(공판) 武愍公(무민공), 炳然(병연) 孝傑의 조카 肅宗朝 兵使(병사) 忠毅公(충의공), 就章(취장) 景宗朝(경종조) 副摠管(부총관) 武愍公(무민공), 相弼(상필) 憲宗朝(헌종조) 型判(형판) 武肅公(무숙공)], 相亮(상량) 禁衛大將(금위대장) 등 이름이 있는 武科(무과) 출신의 將臣(장신)을 많이 배출하여 “武人(무인)의 집”으로 유명하다. 그중 柳赫然(유혁연)은 肅宗 6년 訓練大將(훈련대장)과 摠戎使(총융사)를 겸임하다가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으로 南人이 숙청될 때 유배되어 賜死(사사)당했으며, 柳就章(유취장)은 景宗(경종) 1年 辛壬士禍(신임사화;1721년) 때 “老論四大臣(노론사대신)”과 함께 禍(화)를 입었다.
普州柳氏(보주류씨)의 유일한 大提學(대제학)인 西坰(서경) 혹은 孤山(고산) 柳根(유근) 1549~1627年 文靖公(문정공)은 高麗 上將軍(상장군) 柳挺(유정)의 後孫이다. 李退溪(이퇴계)의 門人으로 宣祖 때 文科에 올라 湖當(호당)을 걸쳐 吏曹正郞(이조정랑)으로 文臣庭試(문신정시)에 장원했고, 壬辰倭亂 때 왕을 義州로 扈從(호종)하고 扈聖功臣(호성공신) 3등에 普原府院君(보원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大提學(대제학), 左贊成(좌찬성)을 지냈다.
이밖에도 肅宗 때 南人으로 갖은 정치적 파란을 격은 茅山(모산) 柳命堅(유명견) 吏參(이참), 退堂(퇴당) 柳命天(유명천) 禮判(예판), 靜齊(정제) 柳命賢(유명현) 吏判(이판) 형제는 柳根(유근)의 慫(종)증손이 된다. 또한 乙巳士禍(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죽은 靜叟(정수) 柳仁淑(유인숙) 吏判(이판) 文貞公(문정공)도 이 普州柳氏(보주류씨)의 인물이다.

3) 全州柳氏(전주류씨)
李朝에 많은 인물을 배출, 상당한 세력을 폈었으나 士禍, 黨爭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氏族의 하나로 기록 될 만하다.
全州柳氏(전주류씨)의 대표인물은 春湖(춘호) 柳永慶(류영경)[宣祖朝(선조조) 領議政(영의정)]이다. 宣祖 31年 壬辰倭亂이 종식되고 北人이 집권하게 되면서 大北, 小北으로 分派되자 그는 小北의 領導者로서, 앞서 世子에 冊封(책봉)된 光海君(광해군)을 제쳐놓고 대신 永昌大君(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으나 宣祖의 急逝(급서)로 大北측 鄭仁弘(정인홍), 李爾瞻(이이첨)이 밀던 光海君이 王位에 오르게 되면서, 그는 大北측에 의해서 賜死(사사)당하고 그의 一家도 滅族(멸족)되다시피 되었다. 이 무렵의 政治的 상황은 제 14代 宣祖 임금은 在位(재위) 41年間(1567~1608)을 戰禍(전화)와 黨爭(당쟁) 속에서 보낸 悲運의 왕이다. 그러나 그의 悲運은 그가 죽은 뒤에도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宣祖에게는 아들 14명이 있었다. 正妃(정비)인 懿仁王后(의인왕후) 朴氏[潘南朴氏(반남박씨)]의 몸에서는 아들을 얻지 못한 대신 恭嬪金氏(공빈김씨), 順嬪金氏(순빈김씨), 仁嬪金氏(인빈김씨) 등 여러명의 嬪에게서 많은 아들을 얻은 것이다. 여러 아들을 두고서도 正妃(정비) 소생의 왕자가 없어 世子冊立(세자책립)을 미루어 오던 宣祖는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恭嬪金氏(공빈김씨)의 소생인 2자 光海君을 서둘러 世子로 冊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宣祖 33年 懿仁王后(의인왕후)가 승하하고 그 2年 뒤 繼妃로 맞은 人穆王后(인목왕후) 金氏[延安金氏(연안김씨) 金悌男(김제남)의 딸]에게서 유일의 적통인 永昌大君(영창대군)이 出生하자, 小北측은 光海君을 지지하는 大北派에 맞서 은연중에 永昌大君(영창대군)의 世子冊立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중 1608年 宣祖가 갑자기 승하하고 그뒤를 이어 光海君이 즉위하게 되자, 大北派의 李爾瞻(이이첨), 鄭仁弘(정인홍)등은 柳永慶(유영경)을 비롯한 小北派를 숙청하는 한편, 仁穆大妃(인목대비)를 廢(폐)하여 庶人(서인)으로 만드는가 하면 왕위에 대해 위협적인 존재인 永昌大君을 비롯, 臨海君(임해군)[光海君의 同腹兄(동복형)], 金悌男(김제남) 등을 逆謀(역모)로 몰아 죽이니, 이 일이 곧 “廢母殺弟(폐모살제)”의 變이요, 악명 높은 1613年에 “癸丑獄死(계축옥사)”이다. 뒤에 光海君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仁祖는 仁嬪金氏(인빈김씨)의 소생인 定遠君(정원군)의 아들이다.
이 變亂(변란)으로 柳永慶의 세 아들과 조카 등도 慘禍(참화)를 입었고, 그의 家産(가산)마져 籍沒(적몰)당했으나 그의 손자 廷亮(정량)[宣祖駙馬(선조부마), 全昌君(전창군) 孝靖公(효정공)]만은 요행히 慘禍를 면하고 귀향을 갔다가 仁祖反正(인조반정) 뒤에야 풀려나와 都摠管(도총관)을 지냈다. 한편 柳永慶의 형 月蓬(월봉) 柳永吉(유영길)[慘禍를 입은 조카의 父母]은 明宗 때 文科에 장원, 宣祖 22年 江原道 觀察使(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丁酉再亂(정유재란)에 行護軍(행호군) 延安府使(연안부사)로 활약 京畿道 觀察使(경기도 관찰사) 禮曹判書(예조판서)를 지냈는데 詩文(시문)에 능했다.
또 한사람은 中宗 때 性理學者로서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 등을 길러낸 眞一齋 柳崇祖(진일재 유숭조)[文穆公(문목공)]는 成宗 때 文科에 급제, 掌令(장령)으로서 燕山君의 失政(실정)을 極諫(극간)하다가 1504年 甲子十禍(갑자십화)에 유배되어 1506年 中宗反正 후 풀려나와 大司成(대사성), 觀察使(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는 道學政治(도학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한 최초의 性理學者로서 眞一齋集(진일재집) 性理淵源撮要(성리연원촬요), 經書諺解(경서언해) 등의 著書(저서)가 전한다.
이밖에 全州柳氏 인물로는 淸白吏(청백리) 柳軒(유헌)[燕山朝(연산조) 大司諫(대사간)]과 柳慶昌(유경창)[顯宗朝(현종조) 禮參(예참)], 世宗 때 學者로 이름난 吏參(이참) 柳義孫(유의손)과 그의 5代孫 柳復立(유복입)[宣祖朝(선조조) 普州城(보주성) 싸움에서 殉死(순사)] 등이 두드러지고 또 柳塤(유훈)[兵判(병판)] 柳復明(유복명)[英祖朝(영조조) 大司憲(대사헌) 貞簡公(정간공)] 柳義養(유의양)[正祖朝(정조조) 禮參(예참)] 등을 들 수 있다.

4) 豊山柳氏(풍산류씨)
李朝(이조) “中興(중흥)의 名相(명상)”이라는 칭을 듣는 西厓(서애) 柳成龍(유성용)[1542~1607年, 文忠公]을 낳아 빛난다. 明宗 21年 黃海道 觀察使(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柳仲郢(유중영)의 아들인 西厓(서애)는 退溪 李滉(퇴계 이황)의 門下에서 學文을 닦아 일찍부터 文名이 있었다. 明宗 때 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걸쳐 壬辰倭亂 때 四道 都體察使(사도 도체찰사)와 領議政으로서 戰爭을 主導했다. 宣祖 31年 倭亂이 종식되자 그는 戰亂 중 和議(화의)를 주장했다는 北人측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西厓(서애)는 色(색)으로는 南人이었지만, 학문, 문장, 글씨 등에 뛰어났었으며 德行(덕행)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의 著書(저서) “懲毖錄(징비록), 愼經錄(신경록), 永募錄(영모록)” 등은 특히 유명하다.
한편 西厓(서애)의 형 謙庵(겸암) 柳雲龍(유운용)[文敬公(문경공)]도 退溪(퇴계)의 門人으로 壬辰倭亂 때 司僕寺僉正(사복사첨정)이 되고, 豊基郡守(풍기군수)로 土賊(토적)을 소탕했으며, 原州牧使(원주목사)를 지냈다. 西厓의 아들 袗(진)은 持平(지평)을 지냈고, 袗(진)의 6代孫 尋春(심춘)이 都正(도정)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이 高宗 때 左議政(좌의정) 柳厚祚(유후조)와 兵曹判書(병조판서) 柳相祚(유상조)이다. 梅山(매산) 柳相祚(유상조)[文憲公(문헌공)]는 哲宗(철종) 때 府使(부사)로서 文科에 급제하고 高宗 초에 吏曹參判(이조참판), 工曹判書(공조판서)등을 걸쳐 右議政(우의정)에 올라 奏請使(주청사)로 淸나라에 다녀와서 左議政에 이르고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로 致仕(치사), 奉朝賀(봉조하)가 되었는데 文名였다. 또 雲龍(운룡)의 증손 萬軒(만헌) 柳世鳴(유세명)은 柳元之(유원지)의 門人으로 肅宗 초에 文科에 올라 持平(지평), 校理(교리)를 지내고 賜暇讀書(사가독서)했다. 일찍이 公忠道都事(공충도도사)로 있을 때 舒川郡守(서천군수)의 不正(부정)을 탄핵하여 파면케 했는데 性理學에 밝고 文名이 높았다.

5) 瑞山柳氏(서산유씨)
瑞山柳氏는 始祖 柳成澗(유성간)[瑞寧府院君(서영부원군)]의 현손 인 思菴(사암) 柳淑(유숙)[文僖公(문희공)]이 麗朝(여조) 知樞密院事(지추밀원사)로서 奇轍(기철) 일당을 숙청한 공으로 安社功臣(안사공신), 紅巾賊(홍건적)을 물리치고 忠勳節義贊化功臣(충훈절의찬화공신), 또 興旺寺(흥왕사)의 변란을 진압하고 一等功臣에 책록되어 僉議贊成事(첨의찬성사),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 知春秋館事(지춘추관사)에 오르고 恭愍王(공민왕)의 朝庭(조정)에 配享(배향)되었다.
그의 종제 柳方澤(유방택)은 判司天監事(판사천감사)요, 方澤(방택)의 아들 柳伯濡(유백유)[文靖公(문정공)]는 麗末(여말)에 文科에 자원하여 判典義寺事(판전의사사)를 지내고 李朝 太宗 때 吏曹判書(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밖에 世宗 때 學者로서 四佳亭(사가정) 徐居正(서거정), 大田(대전) 李甫欽(이보흠) 등을 길러낸 泰齊(태제) 柳方善(유방선)[柳淑(유숙)의 증손]을 비롯하여 世祖 때 文科에 급제하고 “分類杜工部詩諺解(분류두공부시언해)” 25권을 편술한 柳允謙(유윤겸)[戶議(호의), 方善(방선)의 아들], 中宗 때 大學者인 雪江(설강) 柳泗(유사), 肅宗 때 學者인 東村(동촌) 柳帶春(유대춘) 등이 이름났다.

6) 高興柳氏(고흥유씨)
高興柳氏는 始祖 柳英(유영)[戶長(호장)]의 6代孫 淸臣(청신)[英密公(영밀공)]이 高麗 忠宣王(충선왕) 때 贊成事(찬성사), 僉議政丞(첨의정승)을 지내고 高興府院君(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柳濯(유탁)[忠靖公(충정공)]이 恭愍王(공민왕) 때 紅巾賊(홍건적)을 물리치고 高興府院君을 襲封(습봉)받고 都僉議政丞(도첨의정승)에 올랐다. 濯(탁)의 아들 柳濕(유습)[襄靖公(양정공)]이 太宗 때 吏曹(이조), 禮曹典書(예조전서)를 거쳐 世宗 1年 右軍元師(우군원사)로 對馬島(대마도)를 정벌했다. 淸臣(청신)의 6代孫 柳世雄(유세웅)[興陽君(흥양군)], 柳涇(유경)[參判(참판), 高興君(고흥군)] 등이 中宗反正功臣(중종반정공신)에 올랐고, 濕(습)의 6代孫이 說話文學(설화문학)의 大家인 於于當(어우당) 柳夢寅(유몽인)[義貞公(의정공)]이다. 그는 光海君 때 中北波(중북파)의 領袖(영수)로서 廢母論(폐모론) 때는 李爾瞻(이이첨) 등과 대립, 그에 가담하지 않아 仁祖反正(인조반정) 후에 禍(화)를 면했으나 李适(이괄)의 난 때 叛軍(반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로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名筆(명필)이였으며 “於于野談(어우야담)”을 남겼다. 이밖에도 敬菴(경암) 柳龜山(유귀산)[世宗朝(세종조) 王子師傳(왕자사전)], 柳夢寅(유몽인)의 조카인 醉吃(취흘) 柳瀟(유소)[仁祖朝 參判], 肅宗 때 文人인 月谷(월곡) 柳宗興(유종흥)[崔瑞林(최서림)의 門人], 高宗 때 學者인 省齋(생재) 柳重敎(유중교) [李恒老(이항노)의 門人], 韓末 義兵將인 毅菴(의암) 柳麟錫(유인석)[李恒老, 柳重敎의 門人], 三一運動(삼일운동) 때의 순국소녀 柳寬順(유관순)도 高興柳氏다.

7)善山柳氏(선산유씨)
善山柳氏는 유명한 眉巖(미암) 柳希春(유희춘)[文節公(문절공)]을 낳았다. 그는 崔山斗(최산두), 金安國(김안국)의 門人으로 中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湖當(호당)에 뽑히고 宣祖 때 副提學(부제학), 大司諫(대사간), 吏曹參判(이조참판)등을 역임했는데, 經史(경사)와 性理學(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著書(저서)로 “眉巖日記(미암일기), 詩書釋義(시서석의), 朱子語類箋解(주자어류전해)”등이 있는데, 그중 “眉巖日記(미암일기)”는 宣祖 초기 9年間의 公私(공사) 體驗(체험)을 日記體로 엮은 것으로 귀중한 史料(사료)로 평가받는다. 眉巖(미암)의 부인 宋氏[號는 德奉(덕봉)]도 당대 손꼽힌 女流詩人으로서 詩集 “宋氏詩藁(송씨시고)”를 남겼다. 眉巖의 형 懶翁(나옹) 柳成春(유성춘)도 또한 名 詩人으로서 文科에 올라 吏曹正郞(이조정랑)에 이르렀으나 1519年 己卯士禍(기묘사화)로 유배되었는데, 당시 尹衢(윤구), 崔山斗(최산두)와 아울러 湖南三傑(호남삼걸)로 불리었다.

8) 靈光柳氏(영광유씨)
靈光柳氏는 始祖 柳漹(유언)의 손자 規(규)[貞肅公(정숙공)]가 睿宗 때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柳子煥(유자환)[初名 子晃(자황) 文襄公(문양공)]은 1543年 癸酉靖難(계유정난) 때 首陽大君(수양대군)[뒤의 世祖]을 도와 靖難功臣(정난공신) 3등에 筽城君(오성군)에 봉해지고 都承旨(도승지), 大司憲(대사헌), 全羅道 觀察使(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庶弟(서제)인 柳子光(유자광)은 金馹孫(김일손)의 史草(사초)에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이 실린 것을 트집잡아 燕山君(연산군) 4年 戊午士禍(무오사화)를 일으켜 佔畢齋(점필재) 門下의 士林派(사림파)를 숙청하고, 1506年 中宗反正(중종반정)에 참여하여 靖國功臣(정국공신) 1등에 오르고 武靈府院君(무녕부원군)에 봉해졌는데, 뒤에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 죽었다.


문화류씨 족보와 성씨 이야기


1. 문화류씨 족보

한국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인데, 아쉽게도 현재 서문만 남아있다. 그 후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 1477년 성종 7년; 3권, 364 페이지)와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나왔는데 현존한다. 이 두 족보는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위의 경우 성명만 쓰고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은 일체 쓰지 않은 반면 그 자손(외손 및 외외손)은 6-7대까지 자세히 적고 있어 핏줄을 중시하고 있다. 가정보의 경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양자기록이 나오고 서자(庶子)의 기록은 없으며,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와 후부(後夫)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기까지 75년간 나라에서 89회의 문과(文科) 과거가 실시되어 1595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거의 대부분인 1071명이 문화류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급제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놀라운 수치이다.

가정보 이후 여러 차례의 족보 간행이 있었다.


2. 문화류씨의 시조

문화류씨의 가장 윗 조상으로서 기록에 나타난 이가 바로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는 류차달(柳車達)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에 고려 명종 때 활약하신 류공권의 항목에 보면 "그의 6대조는 대승 류차달인데 태조를 도와서 공신이 되었다"고 나온다. 또 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에 류양(柳亮)의 전기가 나오는데 이 분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동안 우의정에 이른 분이다. 여기에 "그 선대에 류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호(號)를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내렸다"고 나온다. 1565년에 완성된 "가정보"에는 고려태조가 남정(南征: 남쪽지방을 공격함)할 때 많은 수레를 내어 양식을 보급했기에 대승(大丞)이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조금 더 보충 설명이 되어 있다. 류차달은 또한 아들 류효금(孝金) 한 분만 낳으셨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 외에 류차달의 선계에 대한 이야기와 류차달 자신에 관한 사실들(처음 이름이 해(海)였다거나 자(字)나 호(號)가 있었다는 등)은 후세에 지어진 것들이라 생각된다. 또한 문화柳씨는 왕에게 사성(賜姓) 받은 적이 없으며, 대승공이 이름(차달)을 사명(賜名) 받았다는 후세의 기록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후손들이 선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풍습이라 시조를 "대승공"이라 부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승공은 신라말-고려초의 인물로서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서 큰 부(富)를 지녔던 지방 호족(豪族)이었고, 그 부를 기반으로 왕건의 삼한 통일을 도울 계기가 있어 고려의 공신으로 된 분이다.

한편 공주 계룡산 동학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해져온다. 곧 태조 19년(936년) 대승공께서 그곳을 갔다가 신라의 박혁거세와 박제상을 모신 곳이 황폐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동계사(東谿祠)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1956년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대승공을 그곳에 추가로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대승공 연고지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승공의 사당은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에 건립되어 있으며 대동사(大東祠)라 불린다.

묘는 황해도 구월산에 있으며, 류릉(柳陵)이라 불린다고 한다. 묵방재(墨坊齋)라 불리는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도 있다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3. 류차달의 선계(先系) 문제

17세기말에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원파록"이라는 문헌과 "차원부설원기"라는 문헌이 나타났다. 여기에서는 문화류씨에서 연안차씨가 갈라져 나갔으며, 문화류씨는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시작하여 그의 성씨인 희(姬)씨에서부터 사([女以])씨-왕(王)씨-차(車)씨를 거쳐 문화류씨가 되었다고 주장되어 있다. 그러나 두 문헌 모두 정황적으로 그 출현에 있어 의심 가는 점이 많으며, 객관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들로 채워져 있어 믿기 어렵다. 특히 원파록의 경우 차씨들의 족보에도 그 허구성을 주장하는 글이 올라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 사상과 조상 부풀리기, 그리고 윗사람의 글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는 풍조 등이 맞물려, 급기야 심지어 우의정을 지내신 분까지도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근자에 두 건의 문헌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문화류씨 선계(先系)에 대한 내용이 허구일 가능성이 밝혀지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늦게나마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이트에서는 현존하는 문화류씨의 최고의 족보이며 객관성이 높은 "가정보"와 고려사와 왕조실록 등의 정사의 기록에 근거한 검증된 내용들만을 기초로 하여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밝힌다.

시조는 한 집안의 내력을 기록할 때 그 이상의 조상을 밝힐 수 없어 맨 위에 나타난 분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사성(賜姓) 등으로 인해 분성(分姓)을 한 경우, 나중에 윗조상이 밝혀진 경우 등)이 아니면 시조 위의 조상이 밝혀져 있다면 모순이다. 그리고 윗조상이 밝혀진 경우는 계통을 새로 짜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다. 다만 후손들이 인원이 많거나 중간에 가문을 중흥시킨 이가 있을 때는 파(派)를 구성하여 파조(派祖)를 세우기도 하지만 이는 시조와 엄연히 다르다.

현재 믿을 수 있는 대승공 선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옛날에 기록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고 기록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왕건이나 이성계의 경우조차도, 설화 수준의 얘기는 많이 있지만, 실제로 믿을 수 있는 선계의 기록은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대승공 당시 이미 柳씨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할 때 망설이는 그를 재촉하고 분위기를 만든 그의 부인이 바로 柳씨였다. 당시 개성 지역, 구월산 지역, 서주(아마도 현재의 서산), 전주 등지에 류씨들이 다수 살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들이 중국에서 온 성씨인지, 중국 성씨를 본떠 만든 성씨인지, 아니면 성씨의 필요에 의해 자생된 성씨인지 알 수 없다. 당시의 관향은 대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사는 것)한 지역을 붙이는 것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에 당시의 류씨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다. 다만 문화류씨는 유주(현재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류씨 일족들 가운데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적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신 류차달의 자손이라 보면 충분할 것이다.


4. 문화(文化)라는 곳

문화는 황해도 구월산 동남쪽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이후 행정 단위의 변동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09년 신천군으로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초에 유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대승공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인데,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류경은 문장에도 뛰어났기에 후에 시호도 문정(文正)으로 되었다. 유주의 儒(선비 유)자와 문화의 文(글월 문)자를 보면 그 지역이 학문으로 상당히 알려진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역이 모두 그랬다기 보다는 대승공 이하 대대로 바로 그 분들 자신이 문장이 높은 분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문화류씨를 유주류씨로 불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문화류씨대종회에서 발간하는 잡지 이름이 "유주춘추(儒州春秋)"이다.

한편 문화를 생각하면 자연히 구월산을 떠올리게 된다. 황해도는 대개 평평한 지역이다. 가장 높은 곳이 구월산으로서 953 m의 높이를 갖는다. 구월산 정상에서 동남쪽 40리에 문화현이 있었다. 구월산이 내려와 평지가 이어지는데 그곳이 문화이다.

구월산은 북한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풍광이 수려하며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사달산이라고도 부르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白岳)이란 곳으로 옮겼는데, 그 백악이 바로 구월산 아래라 한다. 단군이 이 산으로 돌아와서 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구월산은 민족의 신성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류씨는 뿌리가 그곳에 있기에 자연스레 구월산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다고 한다.(재실의 이름을 경사루(敬思樓)로 부르기도 하던데, 확인 요.) 묘소의 위치가 해방 전 지명으로는 황해도 초리면(草里面) 흥학동(興鶴洞)인데 지도를 살펴보니 구월산 정상 정남쪽에 688 m의 아사봉(鵝沙峰)이 있고, 그 아래에 다시 583 m의 비산(飛山)이 있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평지가 되는데 그 평지의 지명이 달천리이다. 달천리와 비산 중간에 흥학동이 있다. 해발 150-200 m 쯤 될 듯하다. (이 아사봉 때문에 후대사람들이 대승공의 호를 '아사'라 만들어 부른 듯하다.) 대승공은 구월산 아래 동네에 사시다가 구월산에 묻힌 것이다. 그 묘소는 대단한 명당이라 알려져 있다. (문헌과 지도만 보고 추측해 쓴 글이라 물론 실제와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5. 문화류씨의 수호 동물

문화류씨 집안에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웅녀) 같은 동물과의 내력이 있다. 그건 호랑이이며, 류차달의 독자(獨子)인 효금(孝金)의 얘기에 등장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효금이 구월산에서 재(齋: 불교의 의식) 올리러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입속에 흰 물건이 가로로 걸려 있었다. 효금이 그 호랑이를 보고 "네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네 목에 걸린 것을 뽑아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는 머리를 끄떡였다. 그는 옷소매를 걷고 주먹을 호랑이 입에 넣어 뽑아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그날 밤 효금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했다. "나는 산신령이다. 어제 성당리(지명)에 가서 한 부인을 잡아먹었더니 목구멍에 물건이 걸려 심히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리라."

효금이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여겨 성당리로 가보니 마을 가운데 한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집으로 찾아가 그 사연을 물으니 그 집 주인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 부인(역주: '女子'라고 나오는데 비녀를 꽂았던 것을 보면 부인일 듯)이 마루에서 자다가 호랑이에게 잡혀간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습니다." 하였다. 효금이 그 부인이 머리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으니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효금은 자기가 겪은 일을 자세히 말해주고 돌아왔다.

한편 다른 전승에는 꿈 부분에서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곧, 호랑이가 은혜를 갚으려고 꿈속에서 구월산 남쪽에 대대로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는 명당을 점지해 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영락보(1423년 간행)는 현재 서문만 전하는데, 그 시작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효금을 말함)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陰德: 남이 모르게 행한 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이하, 효금 혼자 덕을 쌓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대대로 적선(積善: 착한 일을 많이 함)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이어짐.]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100여년 전의 글이다. 이것을 보면 이 얘기가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이야기에서 인간 이상의 신령함을 지녔다고 믿어졌던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은 내용이 나오지만, 이야기의 주안점은 효금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구해준 것이며, 또한 꿈속에서의 호랑이의 축복이 효력을 가졌다는 증거를 현실의 확인을 통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바람을 가득 품으며 하늘을 드리운 버드나무와 형안을 번쩍 빛내며 대지를 딛고선 산중호걸의 모습, 상상하기에 참으로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참고: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유주춘추(문화류씨 종친회보)


- 2004. 12. 9.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