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금강경 사구게와 해설 / 월호스님

마음정원(寂光) 2011. 6. 9. 10:53

금강경 사구게와 해설 ①

 

월호 스님

 

 

무릇 형상 있는 것은 한결같이 허망하다.

서른둘의 겉모습이 여래 아님 안다면은 여래 또한 볼 수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부처님의 육신과 법신을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얘기가 되겠죠. 그래서 부처님이 가진 대인의 특징, 서른두 가지 겉모습 이것은 진정한 여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 그것은 부처님 뿐 아니라 전륜성왕도 역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 겉모습이라는 거, 형상이라 거, 이런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왜냐? 변화한다고 하는 거죠. 쭈글쭈글해지죠. 나이가 들며는 다 육신은 변화하고 쭈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은 그렇지가 않다. 하는 그런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지금 말씀을 썼죠. 그렇다며는 이 육신과 법신은 그럼 완전히 별개의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육신과 이 법신, 법의 몸뚱이와 육신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몸뚱이 이것이 완전히 별개의 것인가?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또 완전히 별개는 아니라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금강경 오가해에 아주 유명한 게송이 있습니다.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고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어다.

앵음연어(鶯吟燕語) 개상사(皆相似)하니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라.

 

이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송 중에 하난데요, 쌍계사에 가며는 쌍계사 팔영루 앞에 주련으로 이게 걸려있습니다. 제가 강원에 있을 때 강원에서 법당으로 갈 때 항상 이 주련을 보면서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야~ 저게 도대체 어디 있을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금강경 오가해에 바로 이 32상을 설명해 주는 부분에 야보스님께서 붙인 게송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32상, 육신과 법신은 다르다고 했지만, 다른 가운데서도 또 같음이 있다는 거죠. 이 게송의 내용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고,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

나날이 산 위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앵음연어(鶯吟燕語) 개상사(皆相似)하니,

앵음, 꾀꼬리 울음 소리와, 연어, 제비의 지저귐이 모두 서로 흡사하니,

막문전삼여후삼(莫問前三與後三)이라,

전삼삼과 후삼삼을 묻지 말지어다.

 

이런 게송입니다.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을 찾지 말라.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마는 남해 바다 가며는 지금도 거기 물고기들이 많이 살아요. 그 물고기들이 지금 뭐라고 하면서 사냐 하며는, 제가 한번, 남해 바다 자주 갑니다. 그 보리암도 있고 그래서. 해제철에 한번씩 가서 또 보리암에 계신 관세음보살님을 제가 하하하~, 가서 인사를 드리고, 한 3일정도 묵으면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그러고 오며는 신기한 게 꼭 뭐가 한 가지씩 풀리더라구요. 허허허~ 그래서 야~ 역시 그 오대보궁, 삼대 관음기도 도량이 헛된 명성이 아니구나 이런 것을 제가 종종 느낍니다마는, 어쨌든 그쪽에 가며는 남해 바다가 보이죠. 전망이 뭐 아주 기가 맥힙니다.

 

남해 바다에 있는 물고기들이 이럽니다. “야, 바다라는 게 있다는데, 도대체 그 바다가 어떻게 생겼냐? 야~ 그 바다를 알아야 된다는데.” 하하하~ 하면서 지금도 역시 묻고 다닙니다.

 

그러고 제가 있는 국사암도 우리나라 명산 중에 천하 명산 지리산에 있죠. 국사암에 와서 또 그렇게 묻는 분들이 있어요. “여기 지리산 갈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고 하하하하하~ 지리산을 지금 가야 되는데 하하~ 어디로 가야 되냐고 물어보면 참 대답해 주기가 난감하데요. 여기도 지리산입니다. 하하~ 지리산에 있으면서 지리산을 묻는 거예요.

 

바다 속에 있으면서 바다를 묻고. 그거와 유사하다는 거죠. 우리가 이 육신을 떠나서 법신을 찾는 것 또 법신을 떠나서 육신을 찾는 것이 마치 바다라는 게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되냐? 지리산이라는 데가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묻는 그런 물고기나

사람들 또는 새들은 또 엄청 지저귑니다. 아침에 요새 국사암에 있으면서 새벽 예불을 우리는 죽비 삼배를 하고 참선을 하는데 새벽 참선할 때 되며는 새들이 그냥 막 소쩍새를 비롯해서 온갖 이름 모를 새들이 막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대죠, 막. 와~ 진짜 딱~ 예불 삼배 드리고 새소리 들으면서 편안하게 앉아있는 그 시간. 극락이 따로 없죠.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저는. 허허허~ 가부좌 틀고 부처님 앞에 앉아서 새벽에 지저귀는 그 새소리들 듣고 있으며는 ‘아~ 이대로가 진리의 세계구나.’ 하는 것이 아주 몸으로써 느껴지죠.

 

여기도 보면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전삼삼과 후삼삼을 묻지 말지어다. 꾀꼬리 소리와 꾀꼬리가 둘이 아니고, 제비와 제비 지저귐이 둘이 아니다 이 소립니다. 꾀꼬리 소리가 들리면 거기 꾀꼬리가 있는 것이고, 제비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게 바로 제비가 있는 겁니다. 육신과 법신이 둘이 아니다. 이 소리죠.

 

그러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차별이 있죠. 왜냐? 육신에 일단 몸으로써 나툰 거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 제도를 하기 위해서 법신불에서 육신불로, 육신으로 나투신 거죠. 제비의 지저귐이 없으면 우리가 제비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몰라요. 꾀꼬리의 지저귐이 없으며는 잘 몰라요. 소쩍새가 새벽마다 그렇게 울어대는데 새벽마다 울어대니까 아~ 지금 내 이 사는 산중에 소쩍새가 같이 살고 있구나하고 알 뿐이지 만약에 안 지저대며는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거죠.

 

법신불도 마찬가집니다. 법신불이 항상 계시지만, 역시 육신의 화신불로 나투어서 우리에게 법을 설하지 않으시며는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전삼삼후삼삼을 묻지 말라.’ 하는 것은 바로 과거에 무착 문희 선사와 문수보살과의 대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중이 얼마나 삽니까?” 하고 물어 보니까 “전삼삼후삼삼”이라고 이렇게 대답을 한 그런 내용이, 일종의 화두가 되겠습니다.

 

 

 ♧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모습인지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하는 것이죠. 우리가 부처님의 모습을 어느 한 가지 형상으로 고착화한다며는 그것이 아닌 것은 다 부처님이 아닌 것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서른두 가지 대인상, 여기서 말하는 몸뚱이의 형상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갖추고 계신 서른두 가지 특수한 모습들 이겁니다. 그런 것을 보고 ‘아, 이것이 여래다.’ 어떤 외모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 서른두 가지 대인상은 부처님 뿐 아니라 전륜성왕도 역시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그래서 겉모습, 존재, 그것이 물질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든 존재하는 것은 모조리 다 변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도 변화합니다. 몸뚱이도 변화한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변화하는 것을 가지고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모습을 ‘이것이다.’ 하며는 그것은 계속 변화하는데 이름이 그것일 뿐이죠. 섬진강이 물을 흐르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 섬진강을 딱 잡아떼서 ‘요것이 섬진강이다.’ 해 버리며는 그 순간 이외의 섬진강은 그럼 뭐가 되는

거예요? 섬진강 아닌 게 돼버리지. 계속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형상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 금강경 오가해에 보며는 주석들을 달아 놓았어요.

 

불(佛) 고수보리(告須菩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요 부분에 대해서 육조스님이 이런 말씀을 달아놓았습니다.

여래께서 법신을 나타내고자 하므로 설하시기를 “일체의 모든 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일체 모든 상이 허망하여 실답지 않음을 깨달으면 곧 여래의 무상한 이치를 보리라.”

 

모든 상이 허망하다는 것은 모든 존재는 변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지마는 이거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또 내일 달라지는 것이죠. 근데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내 몸뚱이를 가지고 이것이 월호다 하며는 그럼 내일의 변화한 몸뚱이는 또 뭐가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는 모든 존재는 물질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든 존재하는 것은 변화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또 부대사가 또 이런 주석을 두셨습니다.

여래께서 몸뚱이의 모양을 드신 것은 세상의 정(情)을 따른 것이니, 사람들이 단견(斷見)을 낼까 두려워해서 방편으로 헛된 이름을 세웠도다. 거짓으로 32상이라 하고 80종호 또한 헛된 소리로다. 몸이 있는 것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요, 모양이 없어야 참다운 형상이로다.

 

32상이니 80종호니 하는 것은 부처님이 가지신 특이한 그런 형상입니다. 그래서 그런 형상은 진실한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고 모양 다리가 없어야 비로소 참다운 형상이다. 모양 다리가 없는 것으로써 형상을 삼는다 이거죠. 무상이야말로 진실한 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상은 무상이라.’ 왜냐? 고정된 형상이 없으므로 어떠한 형상으로든 나툴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고정된 형상이 있으며는 그 형상 이외의 형상으로는 나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보스님이 또 여기다 아주 멋진 게송을 달았어요. 여러분도 잘 아는 게송입니다.

 

산시산수시수(山是山水是水)니 불(佛)이 재심마처(在甚麽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부처님이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많이 들어본 게송이죠? 산은 산 물은 물. 이것이 바로 금강경 오가해에 야보스님께서 달아 놓은 게송입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니 부처님이 어느 곳에 있겠느냐? 그래서 만약에 한결같이 부처님이 그럼 모양이 없다 그러면 모양 밖에서 부처님을 찾게 되죠. 그러나 모양이 없는 가운데 모양이 있는 것이죠. 그 뭐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바로 지금의 이 모습이 바로 참다운 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지금 이 산은 산이요 물을 보면 곧 이 물이니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어느 곳에 계시겠어요? 아니 계신 곳이 없게 되는 거죠. 산은 산으로 나타나고 물은 물로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몸이다. 상이 있고 구함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고 그렇다 그래서 또 형태가 없고 봄이 없다고 하면 이것은 또 역시 치우친 소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당당하고 밀밀하여 간격이 없이 한 줄기 찬 빛이 큰 허공을 빛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도죠.

 

그래서 불교는 유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에 떨어져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둘 다 사견을 이루는 것이예요. 유와 무가 둘 다 사라져야 비로소 한맛으로 항상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죠.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기 때문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내가 항상 ‘참 나’인 것이죠. 계속 변화하고 있는 이 순간 어느 순간만 참 나다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나를 만들어 간다.’고 하는 거.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형상에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 그래서 또 형상이 없다고 하는 단견. 단견이라는 것은 끊어진 견햅니다. 뭐가 없다 무에 떨어지는 거예요. 허무주의. 허무주의에 떨어지지도 않고 그렇다 그래서 또 상견, 상견은 뭡니까? 항상 있다고 하는 견해죠. 그래서 불교는 중도법이다. 상견에도 떨어지지 않고 단견에도 떨어지지 않아야 된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실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 있기는 있지만 이게 항상 변화하면서 있는 것이고 또 사라진다. 그래서 아주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시 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예요. 연 따라 그 모습이 나타났다 연 따라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중도법이나 연기설이나 공사상이나 무아설이나 결국은 똑같은 얘기를 달리 표현할 뿐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뭡니까?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행위가 나를 만들어 간다.’ 이게 되겠습니다.

 

 

 ♧ 부처님은 법신을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육신을 보고 이것이 부처님이다 하며는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고 난 후에는 그럼 부처님이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돼버리죠. 부처님의 육신은 입멸하셨을지 몰라도 법신은 여전히 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수보리존자 같은 분은 부처님께서 천상으로 어머니를 제도하기 위해서 설법을 하러 갔다가 오랜만에 내려오실 때 부처님을 많은 사람들이 마중 하러 나갔죠. 그때 수보리존자도 마중을 하러 나갈라고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지금 부처님을 마중

하러 나간다고 하지만, 진정한 부처님은 어떤 몸뚱이로 된, 몸뚱이의 형상으로 된 분이 진정한 부처님이 아니다.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법신이라고 하죠. 부처님의 법신불.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형상을 가진 것은 그것이 물질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라는 것은 바로 신을 이야기 하는 거죠. 물질적 존재든 정신적 존재든 형상이 있는 것은 한결같이 허망하다고 하는 겁니다. 변화한다고 하는 거죠.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 대인의 모습, 다시 말해서 서른둘의 겉모습이 진정한 부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며는 진정한 여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른둘의 겉모습은 육신의 부처님이고 진정한 여래는 바로 법신의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5분과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금강경 오가해에 보며는 종경스님께서 아주 멋진 게송을 붙여서 이 대목을 설명하고 계세요. 소개를 해 드리겠습니다.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보신불과 화신불은 참이 아니라 마침내 허망한 연일 따름이니,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라.

법신이야말로 청정해서 넓기가 가이 없도다.

천강(千江) 유수천강월(有水千江月)

일천 강에 물이 있으면 일천 강에 달이 비치고,

만리(萬里) 무운만리천(無雲萬里千)이라.

만 리나 되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으면 만 리가 그대로 하늘뿐이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대목을 설명해 주는 거죠. 바로 말해서 불교의 삼신불 사상을 아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 진짜 부처님이냐? 여러 가지 설명과 이야기가 있죠. 그래서 정말 대부분 참선하는 분들은 화신불이나 보신불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하고 법신불 자리야말로 진정한 부처님이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들이 많고 또 기도하는 분들은 기도해서 가피를 얻었다. 또는 꿈에서 어떤 부처님, 보살님을 만나 봤다. 이런 분들 있죠. 그것은 바로 보신불 자리의 부처님입니다. 그러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투신 석가모니 부처님, 이거는 화신불이죠.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크게 나누어서 세 개의 몸이 있다. 이걸 반드시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어디서 무슨 말을 들어도 헷갈리지가 않죠. 한 가지만 알고 있으며는 다른 얘기하는 거를 못 알아듣습니다.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입니다. 법신불은 바로 법으로 된 몸뚱이. 다시 말해서 불교의 진리 그 자체, 본마음 참나 자리, 우리 성품 자리, 이것을 법신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공한 것입니다. 성품은 공하다. 이게 불교의 성공설이죠. 그러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은 바로 비어 있다.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바로 그 자리죠. 일정한 형상이 없습니다. 법신불은. 고정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어떠한 형상으로도 나툴 수 있다. 이게 바로 법신불 자리고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얘기해 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누구나 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미 법신불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법신불, 형상이 없는 법신불만 계신다며는 이 불교를 신행할 수가 없어요. 왜냐? 이 중생들은 뭔가 보거나 듣거나 해야 이 믿음이 가거든요.

 

그래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 예를 들어서 관세음보살님이나, 아미타부처님, 이런 분들이 대표적인 보신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하며는 기도를 듣고 가피를 주시고 이런 분들이 바로 보신불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도 또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죠. 마음의 눈이 떴거나, 또는 기도를 정말 지극 정성으로 잘 해서 꿈속에서나 어떻게 간신히 볼까, 일반인들은 또 보거나 듣거나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거나 듣거나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 그게 바로 화신불, 석가모니 부처님, 또는 조선 시대 때 세조의 등을 밀어줘서 세조의 병을 낫게 해 줬다고 하는 문수보살님, 이런 분들이 전부 화신불입니다. 또 지금 바로 이 시대 이 나라,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화신불은 나툴 수가 있어요. 예, 몰라요 지금.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다 화신불일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법당에 있는 등신불에는 절을 잘 하면서 주변에 있는 화신불을 무시 했다가는 무시를 나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모습에서 또 화신불의 모습을 찾아야 된다.

 

그래서 이렇게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세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보신불과 화신불은 사실은 참이 아니고 허망한 연일뿐이다. 왜냐? 중생 제도를 위해서 일부러 나투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법신이야말로, 본마음 참나 이것이야말로 청정해서 가히 없이 넓다. 우주보다 더 큰 게 바로 본마음 참나 자리입니다. 우주 속에 본마음이 있는 게 아니고, 본마음 속에 우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달이 비치고 이것은 바로 보신불과 화신불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들의 원에 따라서 제불보살님께서 감응하시는 것을 천강 유수천강월이라고 표현하신 거예요. 만리 무운만리천은 바로 법신불의 자리예요. 만 리에 구름 한 점 없음은 그대로가 청천 하늘이다. 하늘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채울 수가 있는 바로 그 자리. 그게 법신불의 자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