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뜨락

촛불 문화에 대한 진단과 불교계의 역할 - 마성스님

마음정원(寂光) 2008. 8. 2. 09:50

촛불문화에 대한 진단과 불교계의 역할

 

 

* 이 글은 시국법회추진위원회가 ‘촛불의 진화(進化)를 위한 성찰’이라는 주제로 지난 2008년 7월 30일 오후 6시 30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한 「제1차 대중공사」에서 발표했던 지정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마성 / 팔리문헌연구소장

1. 촛불집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4월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어떻게 명명(命名)하느냐에 따라 이 집회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윤남진(NGO리서치 소장)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에 대해 먼 미래를 염두에 두고 보면, ‘촛불문화제, 촛불집회, 촛불시위’라는 용어보다 고유명사로서 ‘촛불문화’라고 쓰는 것이 알맞겠다고 본다. 이건 어쩌면 그 출발은 그렇지 아니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미래에 가서 되돌아보면 새로운 사회현상의 발생지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윤남진, 「촛불과 세대와 성」, p.1.)라고 하였다. 매우 훌륭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이 촛불집회를 ‘촛불문화’로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위’라는 단어와 ‘문화’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를 하루라도 빨리 잠재워야 할 입장에 있는 여당과 정부 측에서는 ‘촛불시위’ 혹은 촛불시위를 가장한 좌파들의 폭도라고 매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순수한 자발적 의지에서 이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이 집회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이러한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단체나 리더들은 사활을 건 투쟁이겠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과격한 시위가 아닌 평화적인 집회를 원하며, 어린이까지 대동하고 소풍 나오듯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촛불집회는 시위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집회를 통해 이익을 얻는 쪽이 있고, 피해를 입는 쪽이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일찍이 그 사례가 없었던 장기간의 촛불집회는 분명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현상’이므로 ‘촛불문화’라고 일컬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2. 촛불집회의 시발과 그 원인

 

촛불집회의 시발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위한 졸속 협상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이 사실이 보도되자 제일 먼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어서 30-40대 아줌마들이 움직였고, 나중에는 386세대의 직장인들과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는 인터넷상의 토론장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처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촛불집회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단체와 개인들이 참여하여 ‘이명박 OUT’이라는 ‘정권퇴진운동’으로 확대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 처음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순수한 의도의 여학생들과 시민들은 점차 뒷전으로 밀리고, 소위 전문 시위꾼들이 가담함으로써 ‘과격시위’와 ‘강경진압’이 충돌하게 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다시 촛불집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이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야당의 정치인들은 촛불집회가 확산되면 될수록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 시위꾼들과 야당 정치인들은 촛불집회가 확산되어 사회가 혼란스럽고 사태가 악화될수록 물을 만나 물고기마냥 활기가 넘치게 되어 있다. ‘시국법회추진위원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면 왜 이처럼 장기간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처음의 촛불집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촉발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의 ‘촛불문화’는 일반 서민들의 소외감, 허탈감, 절망감, 불안감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문화의 맹아(萌芽)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 전 ‘대통령직인수위’가 활동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직인수위’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부각되면서 안하무인격인 정책들을 쏟아냄으로 인해 그때부터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였다. 지난 7월 22일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한국지방신문협회 회원사 공동 인터뷰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경남신문》에 실린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일각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준비가 안 된 정권’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제 생각에는 ‘연습 안 된 정권’이라고 본다. 취임 전 대통령직인수위 때 충분한 연습기간을 거쳤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무슨 개혁 위주의 인수위가 돼 불안했다. 초기 국민적 반감은 인수위서 엄청나게 많이 생산했다. 과욕을 앞세운 인수위가 성과에 급급해 아마추어적인 조직개편에 나서면서 국민 공감을 얻지 못했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발단이 됐다. 잇따라 터진 악재에 대해서도 초기대응에 실패하면서 불신을 키웠다. 가장 큰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다.” (《경남신문》2008년 7월 24일자 3면)


이미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쏟아낸 정책들에 대한 반발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이를테면 ‘한반도 대운하 계획’, ‘영어몰입교육’, ‘종부세 폐지’, ‘의료보험 민영화’, ‘수자원 공사의 민영화’ 등의 정책을 내놓았다. 이명박 대통령 후대가 내걸었던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서민들의 경제를 가중시키는 정책들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접한 서민들은 허탈감과 함께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고,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놓은 이명박 정부의 개각 발표를 보고 국민들은 또 한 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했다. 사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경제를 살려 서민들의 가계가 나아지고, 청년들의 취업률이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사정은 전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국제유가의 급등으로 인해 서민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하루 전에 졸속으로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하기로 협상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의 감정이 일시에 폭발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촛불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요인들이다.

 

시민들이 자진해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어떤 결정적인 정책의 실수가 나타났다면,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을 것이다. 처음 촛불집회에 불을 붙인 것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게 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에게 희망과 신뢰를 심어주기 전에는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3. 시국법회의 개최 배경과 의미

 

처음 불교계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자 했던 ‘한반도 대운하 계획’에 대해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불교환경연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대운하 반대 국토 대행진을 실시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를 계기로 불교도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이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이러한 여론이 확산되자, 결국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불교계가 직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명분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불교의 승려들은 아직도 채식위주의 식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한 광우병 발생 우려에 대해 남의 일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와 관련된 촛불집회에 직접 참여하여 꺼져 가고 있던 촛불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던 참에 불교를 폄하하는 종교편향 사례들이 계속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때까지 불교계에서는 장로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좋은 호감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무조건 반대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일부 기독교 공직자들의 종교편향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불교도들이 정부를 성토할 명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최된 7·5 시국법회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의 비불교도들까지 시국법회에 동참하였다. 그만큼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촛불문화 확산의 걸림돌

 

촛불문화를 이어가는데 최대의 장애물은 국가의 공권력이 아니다. 국가의 공권력으로 촛불문화를 강제적으로 진압할 경우, 오히려 더 큰 역효과를 가져올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공권력 대신 촛불문화를 주도하는 단체의 내부를 분열시키는 정책으로 나아갈 확률이 매우 높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정보망을 통해 그러한 전략전술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전략전술은 보수 언론과 보수 단체를 통해 맞불 작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보수 언론들은 촛불문화를 좌와우, 진보와 보수, 혹은 보수와 개혁의 관계로 몰고 간다. 특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집단들이 주도하는 촛불문화를 좌파·적색분자로 매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촛불문화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문화의 최대 걸림돌은 보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문화의 두 번째 걸림돌은 불교계의 보수 단체와 보수적인 성향을 띤 승려들이다. 과거에는 국가 권력자가 불법을 훼손하는 법난(法難)을 자행해 왔으나, 이제는 교묘하게 불교계 내부의 분열을 조장시킴으로써 서로 싸우다가 자멸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전술에 휘말려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불교도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정책으로 민중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잘못된 제도와 법을 고쳐 불교가 바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불교도라면 이 점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불교계의 보수 단체에서는 국가가 있어야 불교도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즉 종교(불교)보다 국가우위론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교는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한다. 호국불교라는 미명아래 불교의 지도자들이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붓다는 자기의 혈족인 석가족을 멸망시킨 적국 꼬살라국의 수도 사왓티(舍衛城)에서 25년간 안거를 보내면서 교화활동을 펼쳤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분별이 없다. 하물며 내 가족, 내 민족, 내 국가라는 개념도 모두 집착에 불과하며, 그러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 보편의 가르침임은 말할 나위 없다. 불교가 석가족만을 위한 종교였다면, 오늘날 전 인류를 위한 세계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5.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

 

종교의 기능은 크게 본래적 기능과 수단적 기능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종교의 본래적 기능이란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기종교의 교리나 신앙을 통한 정신적 위안, 긴장 해소, 죽음에 대한 공포 극복 등이다. 종교는 본래 성스러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향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의 수단적 기능이란 종교의 본래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말한다. 이를테면 종교의 제의(祭儀)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제의는 예배, 기도, 노래, 춤, 강설 등 다양한 행위로 나타난다. 특히 그 중에서 종교는 사회적 기제(機制)를 통한 표상으로 표출된다. 종교는 언제나 집단을 형성하여 움직인다. 그 때문에 때로는 종교권력과 국가권력 간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종교가 지나치게 정치와 현실문제에 집단적으로 간여함으로써 ‘종교의 현실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종교의 현실참여를 일방적으로 ‘좋은 현상이다’ 혹은 ‘나쁜 현상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교의 현실참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종교가 사회정의와 약자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불의와 정치권력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민중의 아픔에 동조하느냐 아니면 정치권력과 결탁하느냐에 따라서 종교의 현실참여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했던 3·1 독립운동이라든지 7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주로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같은 종교인이면서도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기독교계의 경우 권력에 아부하기 위해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선했던 성직자들도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호국불교라는 미명아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법회나 관주도형 데모에 앞장섰던 사례들도 있었다. 이러한 집회들은 반불교적·반민주적 집단행동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당시 불교지도자들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그로 말미암아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로부터 불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친북좌파라고 매도한다. 반대로 진보적인 단체에서는 그들을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몫이다. 다만 불교도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는다.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에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종교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사회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일본의 옴진리교와 같이 종교 자체가 사회악의 주범이거나 사회적 기능과 역행한다면 그러한 종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가 새로 탄생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종교도 수없이 많다. 그것은 그 종교가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한 것도 바로 이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최근 제기되었다.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에도 불교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인도에서처럼 도태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마디로 종교의 생명은 대사회적 기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전통 종교가 수행해 왔던 위안 기능이나 긴장 해소 등을 ‘대체종교’ 혹은 ‘대용종교’에게 넘겨주고 있다. 현대인들은 종교의 세속화 상업화에 식상하여 종교로부터 떠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주제로 떠오른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종교마저도 상업주의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종교적 상징이나 제도는 그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종교의 본래적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종교의 교리나 사상 체계보다도 오히려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종교에서 사회봉사를 통해 그들의 교세를 확장해 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사회적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면 그러한 종교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교세도 점차 확장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불교도의 가장 큰 결점은 종교의 대사회적 기능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기 수행을 통한 해탈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향으로 불교도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불교도들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둘로 구분하거나 그 선후를 상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한다. 바른 지혜를 갖추면 자비로울 수밖에 없다.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 혹은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수행에 해당되고, 자비는 교화에 해당된다. 수행과 교화를 구분하거나 그 선후의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수행이 곧 교화이고, 교화가 곧 수행이다. 그리고 생활을 떠난 수행이 따로 있고, 수행을 떠난 생활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을 떠나서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중생이 앓기 때문에 나도 앓는다.’는 말 속에 불교의 사회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붓다는 ‘전도선언(傳道宣言)’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했다. 이 전도선언 속에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불교도들은 지금보다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출가자가 직접 정치나 사회문제에 간여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출가자의 지나친 정치참여는 출가자의 본분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으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름지기 출가자는 불교적 관점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사회 구성원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것으로써도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월간 《불광》8월호에도 게재되었다.)▣

 

 

마성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