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법문

월명암 사성선원장 일오스님

마음정원(寂光) 2005. 3. 5. 22:40
월명암 사성선원장 일오스님
월명암 2.3km. 여기서부터는 걸어야 한다. 변산반도국립공원 한복판에 위치한 암자, 한동안 낯설었던 등산에 등줄기엔 땀과 푸념이 들끓는다. 다시 내려갈 일을 걱정해야 할 만큼 길은 길고 거칠다. 그러나 산행은 하산으로 완성된다.

월명암 사성(四聖)선원장 일오(一悟)스님. 스님은 지금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반평생을 일관되게 수행으로 살아왔으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번뇌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부처’인 것은 확실하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벽한 존재이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아 혼란에 부딪혔다. “육조 혜능스님부터 간화선 창시자 대혜스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스승의 할(喝) 한 마디에 마음의 이치를 알아 순식간에 깨우쳤어요. 나도 화두만 잡고 있으면 그렇게 될 줄 알았죠.” 언젠가 ‘내가 성취했다고 믿은 깨달음은 착각에 불과했다’는, 평소 존경했던 선사의 토로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위기감을 느꼈다. “금생에 겨우 불법을 만났는데 이번 생에 깨닫지 못하면 어떡하나 정말 막막했어요.” 스님은 결심과 도전마저 늙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초발심으로 돌아가고자 초기불교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함경〉 〈청정도론〉 〈근본불교의 이해〉 등을 정독하고 돌이켜 새기며 내 수행에 부족한 것은 ‘왜 수행하느냐’와 ‘어떻게 수행하느냐’였음을 알았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스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간화선 수행자로 부딪힌 난관을 초기불교경전으로 해소했다면, 선(禪)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것입니까.

“초기불교와 선 모두 내용은 같습니다. 다만 논리가 다르죠. 선이 ‘본래 부처’라는 대전제를 내세우는 반면 부처님은 오히려 아직 중생임을 인정하라고 강조합니다. 선이 단박에 깨닫는 ‘확철대오’를 지향했다면 부처님은 현실 속의 풍부한 예시와 비유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한 뒤 자연스럽게 본래부처라는 결론으로 이끌어가지요. 즉 선은 연역적이고 상근기를 위한 가르침이라면 초기불교는 귀납적이고 하근기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교학 철저히 공부한 후 화두 들어야”

부처님 사상 이해없는 정진은 허망

간화선 수행의 생명은 ‘큰 의심’…



“본래 부처는 본래 공(空), 즉 비어있음인데 하나의 독립된 실체라 착각하는 데서 간화선 수행에 착오가 생겼다”는 것이 스님의 비판이다. 부처라는 ‘진실’을 못 보고 부처라는 ‘지위’에 연연해 오만이 나타났다. 체계적인 교육도 부재했다. 무턱대고 좌선하고 맹목적으로 화두를 들었다. 남악회양 선사(677~744)의 말대로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격이다.

-간화선은 위기입니까.

“부처님의 기본사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없는 수행은 허망할 뿐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말씀은 모두 무상(無常) 무아(無我) 공(空)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은 이에 대한 치밀한 서술이 부족해요. 대승불교의 한 지류인 선종도 ‘본래부처’만을 강조해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핵심에 대해 소홀히 했습니다. 정(선정)에만 치중해 계(계율), 그리고 혜(지혜)의 중요성은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패배의식이 심각한 병폐에요. 적지 않은 수행자들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깨닫긴 하고 싶은데 왜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심은 희석되고 결국 타락하고 마는 것이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위한 교육이 재정비돼야 합니다. 수행자는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소화한 가운데서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학을 철저히 공부해야죠. 옛 스님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 탓에 강원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건 잘못이에요. 물론 간화선이 최상승의 수행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위빠사나나 제3수행법은 주관과 대상의 구분을 타파하지 못해 일체여래지의 경계에 들지 못합니다. 교(敎)로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고 선(禪)으로 자기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정혜쌍수의 중요성에 대한 설파는 초기불교든 선이든 일치해요.”

-불립문자도 허상입니까.

“화두도 문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언어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글을 배운 자만이 글을 버릴 수 있죠.”

일자무식인 노인이 어느 날 법문을 들으러 갔다. 노인은 ‘즉심즉불’이라는 스님의 법문을 ‘짚신이 부처다’라고 잘못 알아들었다. 그럼에도 신심깊은 노인은 ‘짚신이 부처다’를 화두삼아 정진해 마침내 깨달았다. 일오스님은 “이 이야기가 올바른 화두 참구의 좋은 예”라고 지적했다. “문자적 오독은 그리 대단한 실수가 아니에요. 성패는 얼마나 묻고 의심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수행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요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탈주입니다.” 스님은 “의심의 마지막 자리엔 의단(의심덩어리)만이 펄펄 살아 숨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심의 끝도 의심”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대변되는 조사선은 본래 우리는 깨달아 있으니 일상에서 그 도를 실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의심이란 개념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죠. 반면 후대의 간화선은 ‘화두’를 도입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조사선과 간화선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평상심시도입니다. 누구나 본래 깨달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평상심을 별도의 무엇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끄달리면서 폐단이 생긴 것이지요. 대혜스님이 간화선을 만든 이유는 화두라는 수단을 통해 집착을 걷어내고 ‘참나’를 직시하라는 취지입니다.”

-‘의심’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연상됩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끊어내야 할 ‘6식(意識)’에 불과합니다. 사유를 통해 나의 존재가 규정된다면 그것은 (남과 다른)나의 사유일 뿐이며 분별심을 야기합니다. ‘참 나’는 다른 누군가와 구별되는 나가 아니라 내가 곧 삼라만상 전체가 되는 경계입니다.”

의심의 끝도 의심, 정상에 도달해도 정상이 아니라니 다시 내려가라니 답답한 일이다. 욕망의 눈으로 보면 죄다 부질없는 고행이다. 하지만 삶에 대한 치열한 응시는 대개 음행이나 수다, 편견의 시간에 끊어진다. 남들이 산정(山頂)에서 깨달은 척하거나 부처님 흉내만 낼 때, 스님은 주저없이 내려간다. “‘너희들이 할 일은 정진이다. 내 장례는 재가신도들이 알아서 잘 치러줄 테니 장례식에도 오지마라. 오직 정진만 해라.’ 열반에 드는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 그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에게 묻고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의심’이다.

부안=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월명암 사성선원

신라 부설거사 창건 일출.일몰정경 황홀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 입구의 남여치매표소에서 1시간쯤 걸어 오르면 쌍선봉 아래에 월명암이 위치하고 있다.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때인 691년 부설거사가 창건했으며 소실과 중수를 거듭하다 현재는 대웅전, 사성선원과 전각, 요사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 스님이었던 부설거사는 지아비가 되어달라는 묘화의 간청에 못 이겨 환속하고 그녀와 결혼했다. ‘사문의 위의보다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목숨을 구하고 수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15년만에 집을 떠난 거사는 딸 월명의 이름을 따 월명암을 짓고 오랜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월명암엔 부설거사의 수행과정을 소설로 엮은 〈부설전〉 필사본이 보관돼 있다.

사성선원의 ‘사성(四聖)’은 부설과 묘화, 아들 등운, 딸 월명을 뜻한다. 가족 모두가 성불했기 때문이다. 근현대 선지식 학명스님이 주석하기도 했으며 현재 4명의 스님이 이곳에서 안거정진하고 있다.

월명암은 고적한 지리적 환경 탓에 일반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적의 때가 묻지 않아서인가, 암자를 둘러싼 자연의 절경이 매우 신비롭다. 특히 만학천봉이 안개에 묻혔을 때의 장엄함이 압권이다. 경내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도 더없이 아름답다. 암자 뒤편 오솔길로 20분 정도 올라가면 서해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낙조대가 있다.

일오스님은 2003년부터 사성선원장을 맡고 있다. 1943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65년 월인스님을 은사로 함양 상연대에서 출가했다. 71년 화엄사에서 도광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73년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범어사 등 전국 각지의 선원을 돌며 간화선 수행에 전념했다. 77년 강진 만덕사, 92년 사천 구룡사 주지를 역임했다.

스님도 월명암만큼이나 세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편이나 수좌계에서는 용맹납자로 이름이 높다.



[불교신문 2103호/ 2월8일자]